8화. 3rd. 행동 개시 (1)
이성민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이대수는 고승주와 함께 꿀물을 마셨다. 장손이자 첫째 손주 앞에서 체면 차리느라 참기 힘들었던 이야기를 장남처럼 여기는 고승주와 나누기 위해서였다.
“성민이 고놈이 그리 바뀔 줄은 몰랐어.”
“똑 부러지더군요. 예전 같았으면 회장님 앞에서 기도 못 폈을 텐데.”
두 사람이 알던 이성민은 영민한 머리에 비해 숫기가 없는 아이였다. 그랬던 아이가 대담하고 날카롭게 변했으니 가벼이 넘길 수가 없었다.
“태도도 태도지만 그놈 말 들어보니 지금껏 엄한 다리만 벅벅 긁고 있었어. 청와대 주인장, 육참총장하고 기무사령관 모가지 날릴 때도 그랬다지?”
“예, 회장님. 국방장관과 독대해서 지시했다고 합니다. 최근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나머지 살생부는 실무진들이 짜고 있다고 합니다.”
해동그룹의 정보력은 반 세기에 걸쳐서 구축된 인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인맥에 더해 각종 정보회의에서 돌아다니는 정보들을 비서실을 통해 수집한 고승주의 보고는 틀린 적이 거의 없었기에 이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장손한테 한 방 제대로 먹었구먼, 허허.”
이대수는 손자의 통찰력에 감탄할 뿐이었다. 버젓한 선례가 새로 생겼는데도 모두들 지금껏 해온 대로 고위급들만 상대하지 않았는가?
그에 반해 이성민은 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했으니 사업가에게 필요한 순발력까지 입증한 셈이었다.
“이놈이 앞으로 얼마나 클지 지켜봐야겠구먼, 허허.”
체면 때문에 내색하지는 못했지만 생사의 경계선에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인 손자가 집안과 그룹에서 안개까지 걷어줬으니 이대수의 입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
“쉬세요, 형.”
“예, 도련님.”
계단을 타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친 뒤, 넥타이를 풀고 침대에 몸을 던지듯이 누웠다.
“휴우-.”
아직도 믿기 어려워 볼을 꼬집어봤지만 돌아온 건 짜릿한 통각이었다.
“안 되겠어.”
이대로 뻗어버리고 싶었지만 잠이 안 와서 몸을 일으켜 세운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노트를 펼쳐서 닥치는 대로 생각나는 일들과 연, 월, 일을 적었다. 내 머리가 좋아도 앞으로의 그림을 그리려면 역시 눈에 보이게 정리하는 게 최고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정리한 건 신성그룹이었다.
신성전자와 신성물산을 중심으로 신성그룹 최대 계열사와 모태를 가져간 장호건.
신세기백화점과 제일제분처럼 돈 빨아들이는 계열사들을 쥐고 출가한 장호경.
신성중공업과 신성건설, 신성정유를 앞세워 벌 땐 화끈하게 버는 중화학공업 분야를 만지는 장호민.
그 세 남매가 공동으로 지배하고 각자의 지분만큼 써먹는 신성생명과 그 산하의 금융계열사들.
피를 나눴음에도 남보다도 못했던 이 세 남매는 신사협정이 끝난 1997년부터 내전을 시작했다.
각자의 계열사를 일궈서 만든 힘으로 상대방의 지배구조를 흔드는 건 기본이요, 상대방 계열사에 사람을 심어놓고 내부 정보, 그것도 일가족들의 치부를 캐내서 까발리기까지 했다.
덕분에 나와 같은 항렬의 처사촌들은 온갖 질 낮은 추문에 시달렸지만 나는 예외였다. 장수연이 내게 붙여둔 감시 장치 때문인 것보다 장하연 앞에서 추잡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장호경과 장호민 일가는 나 때문에 돌아버렸을 것이다.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내가 장호건 일가의 충실한 개가 되어 자신들의 개인적, 사업적 약점들을 인정사정없이 물어뜯고 할퀴어서 자신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렸으니까.
그런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신성그룹의 내부자들만큼 속사정을 가장 잘 아는 유일한 외부자다. 신성그룹의 핵심부서와 계열사들을 거치며 가족 관계부터 각자의 성격, 사업 방향까지 줄줄이 꿰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신성그룹에 대해 아는 게 하나 더 있다면 임원들이었다.
누가 누구의 편이거나 적인 것부터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 준 사람이나 손해를 끼친 사람 등 온갖 사람들을 알고 있으니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조커가 될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어디 하나 만만한 곳이 없군, 젠장.”
손톱으로 책상을 두들기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병법에서도 공격하는 쪽은 수비하는 쪽의 최소 세 배는 되어야 비슷하게 싸우고 열 배는 되어야 승리를 확신한다고 했다.
그런데 범 신성그룹의 자산규모는 현재만 해도 해동그룹의 열 배 가까이에 벌어들이는 돈은 스무 배 가까이 많다. 덩치와 수익성 모두 독특하다 못해 기괴해 보이기까지 하는 할아버지만의 경영 스타일 때문에 신성에 밀리고 있으니 할아버지를 바꿔야 한다.
그렇다고 그늘진 곳에 숨겨진 돈을 함부로 쓸 수도 없다.
그룹 내에서 조성된 비자금이라면 모를까 명동에 들어가 있는 우리 집안의 돈은 은행의 자본금 같은 돈.
그 돈을 기반으로 몇 배의 신용이 창출돼서 명동 사채시장의 상당부분이 돌아가고 있으니 한꺼번에 목돈을 쓰면 대한민국 경제에 초대형 싱크홀이 만들어질 것이다.
여기에 신성을 제외한 국내 재벌들과의 충돌, 몇 년 뒤 닥칠 외환위기까지 생각하면 국내에서의 불필요한 사세확장은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이다.
양질의 먹거리가 널렸는데 정크푸드를 처묵처묵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고민을 하던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수 없군. 카르타고 흉내를 낼 수밖에.”
카르타고가 1차 포에니 전쟁의 상처를 회복했던 방법.
그 방법만이 현재의 해동그룹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다.
카르타고.
제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게 진 뒤, 국력 회복을 위해 하밀카르 바르카의 주도로 히스파니아(Hispania, 지금의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했다.
그곳의 은광과 농장을 바탕으로 힘을 비축한 하밀카르는 허망하게 죽었으나 그의 아들 한니발은 아버지의 유산으로 제 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켜 로마를 10년 이상 괴롭혔다.
그럼에도 한니발은 자마에서 패전하고 객지에서 독살까지 당했지만 나는 앞으로의 전쟁에서 이길 것이다. 나, 우리 집안, 우리 그룹의 히스파니아를 세계 곳곳에 만들 테니까.
그 히스파니아들은 앞으로 신성그룹 장 씨 가문의 사위가 되더라도 신성그룹의 바깥에 있을 내가 신성그룹과 장 씨 가문을 빠뜨릴 늪이 될 것이다.
신성그룹 계열사들을 천천히 집어삼킬 늪.
장 씨 일가가 이유도 모르고 허우적거릴 늪.
그 늪들이 선성그룹과 장 씨 가문을 집어삼키고 나면 내가, 우리가 그 위에서 번창할 만큼 단단하게 굳을 것이다.
아직은 요원하지만 나는 그 날을 떠올리며 내 기억들을 노트에 쏟아냈다.
***
다음 날 아침 6시 50분.
강남 테헤란로 해동그룹 쌍둥이 사옥 제 1 본관의 비서실장실 옆 회의실에는 고승주 실장 이하 그룹 비서실과 계열사 기획실 관계자들이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늦어도 매일 아침 8시까지 모이는 그룹 내 브레인 집단이지만 오늘따라 더 빨리 나오라는 고승주의 채근에 모두들 새벽 5시부터 일어나서 회의 10분 전까지 들어와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기에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이 가득했다.
“회장님 지시사항이다.”
자리에 앉은 이들이 침묵한 채 고승주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부터 조용히, 빠른 시일 안에 그룹 비자금을 회수한다.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가 끝나기 전까지 서둘러야 해.”
상석에 앉은 그의 서늘하고 단호한 눈빛을 본 그들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물산.”
“네, 실장님.”
“배 대표님, 태 대표님 뵙고 현금보관 협조 요청해. 백화점 물류창고, 항만 보세창고에 컨테이너 박스··· 뭐든 동원해야 한다고 말씀 드려. 가명과 익명은 전부 인출할 거다. 여의치 않으면 백화점 상품권으로 바꿔놔.”
“돌아가는 대로 보고하겠습니다.”
편리성이나 수익을 따지면 은행에 보관하는 게 최고지만 언제든 꺼내 쓸 현금은 있어야 한다. 주민등록증을 던져주면 찾을 수 있는 차명계좌는 몰라도 없는 사람의 이름으로 만든 계좌들은 그대로 둘 수 없었다.
“보안유지 철저히 해야 한다. 믿을 수 있는 놈들로 불러서 작업해.”
“알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해동물산 담당자가 준비해 둔 수첩 위에서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종금.”
“네.”
“종금에 그룹 비자금 묻을 거라고 조 대표님께 말씀 드려. 다른 은행 신규 차명에도 묻어야하니 계좌가 많이 필요할 거다.”
“얼마나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실장님?”
조심스레 물어보는 와중에도 해동종금 담장자의 얼굴은 멸치털이나 새우잡이를 하는 사람들의 주민등록증까지 명동 사채시장에서 긁어모아도 부족할 거라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최소 천 개. 기름칠 잘해둬.”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고승주와 달리 담당자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은행 지점장들을 구워삶아 만든 계좌 하나당 수억 내지 백억 단위의 돈이 들어가는데 최하 천 개라니?
“네, 실장님.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해동종금 담당자가 펜을 계속 놀리는 와중에도 고승주는 건설 담당자를 불렀다.
“건설.”
“예, 실장님.”
“차명으로 된 동탄, 판교, 연기, 이서 땅 전부 건설과 물산에서 매입할 거다. 다른 데 사둔 땅들도 마찬가지야.”
해동건설 담당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해동건설은 매출이 작아도 부채비율 50퍼센트에 현금도 1천억 이상 쥐고 있는 건실한 기업이다. 그룹 비자금과 별도로 움직이는 자체 비자금도 많아서 전국에 천만 평 남짓한 땅을 쥐고 있고 급할 때는 회사에서 발행한 어음 수백억을 액면대로 인수해서 묵혀둘 정도다.
하지만 액수가 너무 큰, 결정권 밖의 일이기에 담당자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시, 실장님, 그래도 그 땅을 전부 매입하려면 대표이사님 외에도 중동에 계시는 사장님 승인이 필요합니다.”
손수건으로 말까지 더듬으며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는 그를 보며 고승주가 손을 내저었다.
“어젯밤에 연락해뒀어. 처리하라고 했으니 현금화하면 전부 인출하거나 새로 만들 계좌에 태워둬.”
“예, 실장님.”
고승주는 건설 담당자의 얼굴이 밝아지는 와중에도 나머지 계열사 담당자들에게 관련사항을 전달하고서야 가장 중요한 지시사항을 꺼냈다.
“그룹 인맥 총동원해서 정부 동향 파악해. 금융실명제 관련부서 실국장급 이하 실무진 동선 철저히 마크하고. KDI 연구위원들도 마찬가지야.”
“그건···.”
모두들 과하다 싶은 지시에 모두들 영문을 모르는 듯했지만 물을 마시고 숨을 고르는 고승주의 눈빛을 마주하고는 표정을 다듬었다.
“인사이동, 사무실 변경, 해외출장. 전부 눈속임이다. 부족한 눈, 귀는 걱정말고 계열사 대표님들, 고문님들께 말씀드려. 판공비는 무제한으로 밀어드린다고 해.”
고승주의 지시는 돈다발을 주머니에 꽂아주든, 술을 입에 부어넣든, 여자를 옆구리에 끼워주든 금뱃지들과 공무원 나리들을 구워삶을 모든 수단을 쓰겠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들을 미행하고 감시하라니 잠시나마 도망자에서 추적자로 바뀐 상황에 모두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막 쓸 분들도 아니겠지만 말이야.”
“실장님도 참···.”
책상 여기저기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계열사 대표이사들과 고문들은 해동그룹의 67년 역사를 일군 일등공신들이자 주주들이다. 회삿돈을 자기들 주머니에 꼬불칠지언정 정부청사와 여의도 영감들 밑 닦는 데 허투루 쓸 인사들이 아니었다.
“항상 말하지만 풀어지지도, 긴장하지도 마. 중심을 잡는 게 진짜 프로다.”
고승주의 주문에 모두들 긴장한 것 같으면서도 입술이 씰룩거렸다. 자신들이 할 일들이 밝혀지면 다른 이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벌 받더라도 늘 그 이상의 대가가 따라왔으니 이런 일을 거부할 바보가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상.”
고승주는 살짝 들뜬 분위기를 싹 지우고 칼처럼 인사하는 사람들을 내보낸 뒤, 사무실로 돌아와 금고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방금 전까지 이 방에 있던 이들조차 모르게 처리해야 하는 일이기에 혼자만 있는 이 방에서 대포폰을 써야 했다.
“회장님 지시입니다. 오늘부터 은행에서 회장님 자금 철수시키고 명동에서 회장님 흔적 지워야 합니다. 그룹 어음 매입은 유지하고요. 다른 분들께도 연락할 겁니다. 예.”
그 뒤로도 이대수 휘하의 전주들에게 십여 통의 전화를 넣고서야 고승주는 핸드폰을 금고에 넣고 소파에 파묻히듯이 앉았다.
“이제야 한시름 덜겠군.”
넥타이까지 끌르는 그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재계의 비서실장들 중 스카우트 1순위로 꼽히는 그조차도 그룹과 사채조직의 자금을 건져냈다는 사실에 비로소 어깨가 가벼워졌다.
앞으로 6개월.
다른 기업들이 ‘설마’라는 늪에 빠져 방심하고 있을 때 아무도 모르게 그 늪을 피해서 디데이가 오기 전까지 모든 자금을 회수해야 한다.
보는 눈이 많은 재계라지만 고승주는 자신 있었다. 피는 안 섞였어도 친조카보다 아끼는 이성민이 디데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나?
해동그룹과 명동 사채조직을 비롯해서 이 씨 가문이 이 나라가 해방되기 전부터 만들어온 인적 네트워크, 지금까지 이권 획득보다 정보 수집에만 써먹어온 그 그물이라면 디데이라는 월척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고 녀석 참··· 허허.”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에 보이는 하늘은 오늘 따라 유난히 맑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