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2nd. 새로 꿰는 단추 (5)
늦은 밤인데도 검은 대형세단들이 차례차례 성문처럼 높은 솟을대문을 통과했다.
5천 평 남짓 되는 대궐 같은 저택의 주차장에 여덟 대의 차가 멈춰 섰고, 차에서 내린 지긋한 중년의 남자들이 돌판을 밟고 2층 건물 중 이대수가 거처하는 본관으로 들어갔다.
건물로 들어간 사내들은 알려주는 이 하나 없음에도 익숙한 듯이 2층 계단으로 향했다.
그들이 발걸음이 멈춘 곳은 위엄이 느껴지는 서재의 문 앞이었다.
“회장님, 모두 도착했습니다.”
[들어와.]
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맨 앞에 있던 깡마른 반삭 머리의 남자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고, 그 뒤를 이어 나머지 남자들도 그룹 내 서열대로 따라 들어갔다.
“고 실장까지 다 왔구먼. 명진이는 중동 출장 때문에 못 왔고···. 다들 앉아.”
하나 남은 아들, 장남만큼 똘똘한 아들이 없는 게 아쉽지만 각자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어쩌겠는가. 이대수가 일자로 길게 놓인 탁자의 상석에 앉자 여덟 명의 남자들도 서열에 따라 좌우로 네 명씩 앉았다.
“이 늦은 밤에 무슨 일이십니까, 회장님?”
이대수의 오른쪽 가장 가까이에 앉은 장년의 깡마른 반삭 머리의 남자가 물었다.
그의 이름은 배재훈.
그룹의 모기업인 해동물산의 상사부문 대표이사이자 그룹 서열 2위로서 그의 눈빛은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자네들을 부른 건 우리가 지금 고민하는 일 때문일세.”
이대수의 무거운 목소리에 모두들 마른침을 삼켰다.
“금융···실명제 말씀입니까?”
“지금까지 알아본 거 다들 말해 봐. 배재훈이 자네부터 시작해.”
배재훈은 올 것이 왔다는 듯 담담하게 스타트를 끊었다.
“홍 장관 만나서 얘기해 봤는데 재무부에서는 유보를 권했다고 합니다. 착실하게 준비하고 추진해야 탈이 안 날 거라고요.”
“태재호 자네는?”
“저도 경제수석하고 차 마시면서 얘기해 봤는데 똑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국가 경제가 흔들릴 일이라고 천천히 추진할 거라 하더군요.”
서열 3위인 태재호 해동물산 물류유통부문 대표이사까지 말하자 4위인 조영찬 해동종금 대표이사나 나머지 계열사 대표들도 차례대로 두 부처 차관급들이나 여당 중진 등을 만나서 들은 얘기를 내놨지만 하나 같이 발뺌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굳은 얼굴로 사장들의 말을 듣던 이대수가 맨 끝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를 불렀다. 그 남자는 서열과 별개로 이대수의 최측근 중 한 명인 고승주 해동그룹 비서실장이었다.
“고 실장아.”
“예, 회장님.”
“어떻게 생각하느냐?”
“느낌이 안 좋습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임관식 연설만 해도 낌새가 수상합니다.”
“그렇긴 하다만···. 부족해. 확실한 한 방이 없어.”
이대수가 굳은 얼굴로 말하자 모두들 표정이 어두워졌다.
“경제부총리에 국무총리까지 발뺌만 하고 있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꽁꽁 숨기고 있는지, 원.”
이대수의 푸념을 끝으로 모두들 침묵하는 가운데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이성민 도착했습니다.]
문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
할아버지의 서재 문 앞에서 긴장된 마음을 추스르고 있으려니,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예, 회장님.”
문을 열고 들어간 내 눈에 책상에 앉은 아홉 명의 남자들이 들어왔다. 중동에 있을 이명진의 빈자리도 눈에 띄었다.
‘다들···.’
할아버지 밑에 좌우로 앉은 남자들을 보니 또다시 눈물이 나려는 걸 겨우 참았다.
이들 모두 나 때문에 초라한 노년을 보낸 사람들이다. 개인재산이야 남부럽지 않지만 저물어가는 남자들에게 수컷 냄새가 나게 하는 건 자리와 명패가 아닌가?
이들에게서 자리와 명예를 빼앗은 나는 천하의 둘도 없는 쓰레기였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이들, 그리고 나와 인연이 닿은 사람들과 함께할 것이다. 절대 실패하지 않고 실패처럼 보이는 것조차도 더 큰 성공으로 향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앉거라.”
“예.”
테이블 가장 아랫자리에 앉자 마주 보고 있는 할아버지와의 거리가 이 책상의 거리보다 아득하게 느껴졌다. 철없던 시절에는 몰랐지만 이제야 이 방의 무게가 느껴지는 걸까? 그 시절과 지금이 겹치니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뭐가 좋다고 웃는 게야?”
“퇴원하고 처음 뵙잖습니까, 회장님.”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하자 할아버지가 헛기침했다.
“알았다. 앞으로 사고 칠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마.”
“네, 회장님.”
“이번에는 확실히 말해야 할 게다. 시작하거라.”
자리에 앉은 나는 할아버지의 지시에 숨을 가다듬고 말을 시작했다.
“현재의 문민정부를 보면 한 단어가 떠오릅니다.”
“뭐냐?”
“대도무문입니다.”
“대도무문이라···.”
“큰 길에는 문이 없듯이 대통령은 자신의 길에 거침이 없어야 한다고 믿죠. 현 상황을 봐도 그렇고요.”
짝, 짝.
나지막이 되씹던 할아버지가 묵직하게 손뼉을 쳤다. 현 상황을 제대로 짚는 사람이 없어 꽤나 답답했을 차에 당신 장손이라는 놈이 속 시원하게 짚어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럴싸하구나. 당 세 개를 합쳐서 손에 쥐고 봉황 의자에 앉았으니 거리낄 게 없겠지.”
“그렇습니다, 회장님. 지금 문민정부는 막힘없이 달리는 자동차입니다. 허나, 이제 겨우 첫 톨게이트를 지났을 뿐입니다.”
“···시작에 불과하다는 게냐?”
할아버지의 눈매가 가늘어졌지만 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예. 얼마 전 육군사관학교 임관식 연설로 군부에 선전포고를 하고 육군참모총장에 기무사령관까지 날렸잖습니까?”
그게 뭐가 대수냐고 할 수 있다. 애당초 신임 대통령도 ‘알 만한 사람들’만 알 수 있게 메시지를 던진 게 아닌가?
할아버지도 그 ‘알 만한 사람들’에 포함돼있으리라 믿었다. 세심한 통찰력을 가진 분이니까.
내 예상은 절대 빗나가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그 증거였다.
“그 말인즉 하나회를 모조리 날려버릴 거란 뜻이냐?”
“예. 조만간 모든 하나회 장성들의 어깨에서 별이 떨어질 겁니다. 영관급은 말할 것도 없겠죠.”
“흐음···.”
굳은 표정으로 침음성을 흘리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치자. 허나 하나회 숙청이 금융실명제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하나회 숙청은 신임 대통령의 공약 이행 의지를 가늠할 기준이 될 겁니다. 가장 위험한 일을 해내면 다른 약속 또한 지키지 않겠습니까?”
“호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지만, 고승주는 굳은 얼굴로 침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할아버지는 놓치지 않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구먼. 기탄없이 물어보게.”
“예, 회장님.”
허락을 받은 고승주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문제는 금융실명제를 시작할 시점이란다. 회장님 돈과 그룹 자금이 걸렸으니 반드시 알아내야 해.”
우리 그룹과 우리 집안의 금고를 지키는 사람답게 고승주는 조용히, 안전히 한 푼이라도 더 빼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보였다.
숨을 고른 나는 앞에 놓인 찻잔을 두 손으로 잡고 한 모금 축인 뒤 입을 열었다.
“예, 실장님.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종료 다음 날. 그 날이 금융실명제의 디데이가 될 겁니다.”
단언하듯 말하자 할아버지를 비롯한 아홉 남자들이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회장님, 저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게나.”
배재훈이 헛기침을 하고 날 보며 물었다. 할아버지 다음으로 그룹의 연장자이니 어떻게든 설득해야 한다.
“성민아, 금융실명제는 이 나라 경제를 흔들 일이다. 어떻게 그리 쉽게 장담하는 거냐?”
“정치인이 하는 일이니까요.”
“정치인?”
잠시 뜸을 들인 나는 숨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모든 정치인들은 4년제 비정규직인데도 천년만년 금뱃지를 달기 위해 정치를 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표와 돈인데, 이 모든 걸 뒷받침하는 건 지지율입니다.”
“그 말은 지지율 때문에라도 할 거란 거냐?”
“네. 정확히 말하자면 레임덕을 안 보고 싶어서라도 할 겁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둬야 지지율을 최대치까지 당겨놓지 않겠습니까?”
신군부를 숙청한 현 정권은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에 이어 금융실명제를 단행하면서 지지율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나중에 가요계에 나올 '삼단고음'보다 앞선 '삼단지지율'이랄까?
“너무 극단적으로 보는 것 같구나. 금융실명제가 시행되면 이 나라 경제에 큰 혼란이 올 거다. 그 돈이 은행에 잠기면 시중에 돈이 마를 텐데?”
“소비는 국민들이, 대출은 은행들이 해주니 돈이 마를 일은 없습니다. 꼬리표 없는 돈이 은행에 잠기면 자본금이 늘어나는 셈이니 돈이 더 풀리지 않을까요? 그리고.”
잠시 말을 끊고 배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국민들 대다수는 부자를 싫어합니다. 그 정서를 자극하면 표가 모이죠.”
지난 23년간 봐온 게 맞으면 정치인들은 지지율, 아니 표를 위해서라면 똥오줌이라도 맛있게 비벼먹는 먹방이라도 찍을 족속들이다.
그런 정치인들이 경제, 문화, 국방, 외교, 법률···. 심지어 기업의 경제활동까지 주무른다. 금융실명제라고 정치권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대표님, 지금 대통령은 군바리라면 치를 떠는 사람입니다. 군바리들이 못했던 걸 해내면 개인적으로는 자존심을 세우고 공적으로는 지지율까지 높이니 안 할 이유가 없습니다.”
복잡한 셈법 따위는 필요 없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부자와 부자가 아닌 자의 머릿수 차이, 부자를 질시하는 속성, 현 대통령의 인생만 되짚어도 금융실명제는 확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마뜩잖아하는 배재훈에게 한 가지를 더 알려줬다.
“입법부가 방해해도 안 될 겁니다.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발동하면 되니까요. 그러니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일정만 확인하면 됩니다, 대표님.”
나와 배재훈을 조용히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이 방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회장님. 허언 따윈 절대 허락되지 않는 곳이잖습니까?”
수많은 정‧재계 인사들도 이 방에서 할아버지를 상대로 거짓부렁을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드러난 건 신성의 10분지 1도 안 되지만 오랜 세월 그늘진 곳에서 축적된 해동그룹의 부와 권력을 무시할 곳은 거의 없으니까.
“제가 하는 말의 무게도 알고 있습니다. 초대 회장님 때부터 일궈온 부와 역사가 걸린 일이 아닙니까? 은행 놈들과 정치꾼들이 그 역사를 가로채는 걸 참을 수 없습니다.”
금융실명제로 그룹 비자금과 사채자금을 모두 잃은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 격한 감정을 드러내자 할아버지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썩을 놈들이 우리 뒤통수를 후려치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할아버지의 굳은 표정을 보니 내 말을 심각하게,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할아버지의 그 표정을 보고 의견을 보탰다.
“물론입니다, 회장님. 하나 더 보탠다면 금융실명제는 장‧차관보다 실무진들을 감시해야 합니다. 재무부나 경제기획원, 한국경제개발연구원에서 차출될 만한 사람 위주로요.”
“왜 그리 해야 한다는 게냐?”
“지금 대통령은 고위관료들도 적으로 생각할 겁니다. 적에게 폭격 시점을 알려주는 군대는 없잖습니까? 제 생각이 맞으면 하나회 숙청도 그랬을 걸요?”
할아버지라면 알 것이다.
하나회 숙청이라는 깜짝쇼를 실무진들이 준비했다는 것을.
한 번 먹힌 방법을 막힐 때까지 우려먹는 인간의 나태함을.
그 믿음을 담아 마지막 쐐기를 박자 할아버지는 흡족한 표정으로 호탕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역시 내 장손이구나. 잘 들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쿵!
할아버지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고 실장 자네는 내일 은행 문 여는 대로 우리 돈 회수해.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마지막 날 맞춰서 전부 찾아.”
“회장님?”
“한꺼번에 다 찾으라는 게 아니야. 다른 놈들 팔다리 날리려면 조용히, 천천히 해야겠지? 은행 지점 놈들하고 명동 녀석들한테도 우리 흔적 지워버리라고 해.”
할아버지의 말에 만세삼창을 하고 싶었다. 뒤틀어진 과거를 바로잡는 일이 아닌가? 해동그룹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면 내 말에도 신뢰와 힘이 실릴 것이다.
나와 달리 여덟 남자들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끝은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마지막 날이다. 가 봐.”
할아버지가 가볍게 책상을 두들기고 말하자 일곱 사장들이 방을 나갔고, 나 또한 고승주의 뒤를 따라 나가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 실장하고 성민이는 남아있어.”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우리 둘이 다시 자리에 앉자 할아버지가 깍지 낀 손에 턱을 괬다.
“우리 장손 세상 보는 눈이 어느 틈에 넓어졌을꼬?”
할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는 눈에서 흐뭇함과 대견함이 가득 보였다. 하지만, 앞으로의 미래를 다 겪고 왔다고 말할 수는 없기에 할아버지 입맛에 맞게 말했다.
“좀 더 넓고, 좀 더 깊게 보면서 그 일을 하는 사람에 집중하다 보니 깨달았습니다.”
“요놈아, 진즉에 이리 말했으면 좀 좋았느냐? 이유도, 방법도 아주 기발했어, 으허허.”
껄껄 웃는 할아버지를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늘 태산처럼 아득하게만 보이던 분을 이긴 성취감은 덤이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회장은 무슨. 할아버지라고 부르거라.”
“그래도 이 방에 실장님까지 있는데 어떻게···.”
이 방은 해동그룹의 회장 집무실이고, 고승주는 그룹의 실세다. 할아버지와 독대를 한다면 몰라도 고승주까지 있으니 직책으로 불러야 한다. 하지만···.
“고 실장이 네 백부 같은 사람이야, 이놈아. 어찌 내외를 하누?”
해동그룹 회장실이자 사채시장을 호령하는 할아버지의 집무실에서 사적인 호칭을 허락받다니···. 온몸이 짜릿해졌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그래. 우리 장손이 이 할애비 걱정거리를 덜어줬으니 뭔가 선물을 주고 싶구나. 뭘 해줄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필요할 때 부탁해도 될까요?”
“이놈아, 무슨 선물을 필요할 때 달라는 게냐?”
“할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이니 신중하게 골라야죠.”
“허허, 알았다. 필요할 때 말하거라.”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짓자 할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이렇게 내가 알던 미래는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