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2nd. 새로 꿰는 단추 (4)
나는 서운했던 마음을 털어내듯 팽 소리를 내며 코를 푼 뒤, 박태진에게 손수건을 넘겨주며 물었다.
“자동차는 어떻게 됐어요?”
“내일 아침에 실장님 뵙고 계약서로 꾸밀 예정입니다. 회장님께서도 껄껄 웃으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아시면 화내실 텐데 괜찮아요?”
“없는 곳에서는 나랏님 뒷말도 하는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이런 걸 말씀하실 도련님도 아니고요, 흐흐.”
조심스러워하는 내게 박태진이 능글맞게 웃었다. 그 모습에 나는 살짝 기가 질렸다.
박태진에게 이런 면이 있는 건 처음 알았다. 여유가 생기니 농담이 나오는 건가?
“계약서 꾸미면 바로 가져오세요. 보여줄 사람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도련님.”
박태진은 누구에게 보여줄지도 모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가 빠른 양반이니 누구를 위해 계약서를 빨리 준비해달라고 하는지 알지도 모르겠다.
***
“이성민 걔, 자동차에 목매달았다며? 어떻게 된 거야, 오빠!”
쪽만 당하고 온 장수연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회사에 있을 장용재에게 전화를 걸어 신경질적으로 화를 냈다.
[왜 그렇게 화가 나 있어? 화풀이할 거면 딴따라 놈들 알아봐.]
장용재는 화를 좀처럼 주체하지 못하는 장수연에게 항상 하던 것처럼 반반한 남자 가수들이나 끼고 놀라면서 넌지시 말했다.
“아, 진짜 오빠도! 오늘 걔네들 얼굴 보면 이성민 생각나서 열 받을 것 같다고. 안 그래도 반질반질하게 생겨서는.”
그렇게라도 해서 화가 풀릴 것 같으면 진작에 반반하고 얄쌍스럽게 구는 남자 가수들을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건은 달랐다.
오빠인 장용재의 말만 믿고 나섰다가 이복 언니라고도 불러주기도 싫은 장하연 앞에서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가? 남보다 더 지긋지긋한 년 앞에서 그런 모욕을 당했으니 이번 일은 장용재에게 악을 써야 꼬인 속이 풀릴 것 같았다.
이번에는 꼼짝없이 장수연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직감한 장용재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그렇고, 항상 부처님 손바닥처럼 눈에 훤했던 이성민이 이상하게 나온 것이 수상했다. 장용재는 장수연을 달래면서 슬쩍 상황을 물었다.
[자동차 판다고 한 거, 사실이야?]
“그렇다니까? 지 할아버지인가한테 자동차 팔고 허락받아서 타겠다는데 이게 대체 뭔 소리야?”
장수연의 목소리가 또다시 날카로워졌다. 지금껏 이성민에 대해 훤히 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할아비라는 작자가 이성민을 그렇게 감쌌던 이유를 오늘에야 알았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지 않았나?
짜증나는 건 장용재도 마찬가지였다. 장용재도 장수연의 화를 들어줄 만큼 한가한 사람도 아닐뿐더러, 시킨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왔으니 불만을 표할 사람은 이쪽이었다.
[말이 좀 심하다? 내가 이만저만하니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코치해줬으면 그 뒤는 니가 알아서 했어야지. 걔 얼굴 보고 뭐가 이상하게 꼬이는 것 같으면 한 발 뒤로 물러섰어야지, 거기서 뻗대다가 뭐 하나 못 얻어온 게 누군데 그래?]
“오빠!”
장수연이 빽하고 소리를 지르자, 장용재가 한숨을 푹 쉬었다.
[나 요새 물산 자동차사업부에서 일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 네가 좀 도와주면 안 되냐?]
“그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열 받은 거 아냐? 나도 올봄부터 신성기획에서 일하잖아. 그래서 이성민부터 이번에 확 잡아놓고 오빠 도와주려고 했지!”
장수연은 안 그래도 고급 인력인 이성민을 꼬드겨서 잔뜩 부려먹을 생각이었다. 일이 잘만 풀렸으면 제게 간이며 쓸개며 다 내줄 테니 첫 단추를 잘 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계획이 처음부터 미끄러졌으니 골치가 아파왔다. 오늘 당한 치욕과는 별개로 이성민 만한 인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장수연은 한참 동안 장용재에게 화를 쏟아내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이성민··· 이성민···.”
장수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이 놓친 먹잇감의 이름을 되뇌었다. 한 번 놓쳤다고 포기하기엔 아쉬운 먹잇감이기에 미련이 점점 짙어져 갔다.
***
다음 날 아침.
박태진은 말끔하게 양복을 입고 강남 테헤란로에 있는 해동그룹 쌍둥이 사옥 제 1 본관에 들어갔다. 늘 그랬던 것처럼 엘리베이터에 탄 그는 비서실장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실장님.”
박태진이 인사를 건네자 책상 앞에 앉아서 서류를 보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남자 앞에 있는 책상 위에는 ‘비서실장 고승주(高丞株)’라고 적힌 자개박이 명패가 놓여있었다.
먼지 한 톨 없이 반짝거리는 명패를 보고는 박태진이 빙긋 웃었다.
“언제 봐도 반짝거리네요, 하하.”
“회장님께서 선물로 주셨는데 당연하지.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내가 직접 닦는다, 하하.”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았다.
“회장님 말씀 들었다. 성민이, 스포츠카 한 번만 더 타면 상속 포기하겠다면서?”
“예. 이젠 두 분을 보내드리려는 것 같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명우하고 제수씨한테는 미안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 오 회장님뿐만 아니라 다른 성민이 외가 분들도 걱정했으니. 그런데···.”
박태진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중 고승주는 잠시 흐렸던 말끝을 이었다.
“왜 성민이가 굳이 ‘개인적으로’라는 단어를 넣어서 조건을 달았는지 모르겠어. 어차피 우리 그룹에서 공적으로 자동차 탈 일이라곤 임원 되는 것밖에 없는데.”
해동그룹에서 탈 것을 만드는 곳은 군산에 있는 해동중공업 지게차 공장 하나뿐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해동그룹과 사업 관계가 밀접한 아도그룹의 아도자동차뿐인데 이성민이 테스트 드라이버로 나서는 걸 이대수가 두고 볼 리 없었다.
“괜찮을 겁니다. 그만큼 각오를 보여주고 싶다는 거겠죠. 그 아이도 회장님과 명우 형님 핏줄이잖습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박태진의 말에 고승주가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하긴. 회장님, 명우 핏줄이니 하늘을 찌를 자존심은 못 속이겠지. 요즘 너무 예민했어.”
박태진은 조심스럽게 고승주의 눈치를 살피고 물었다.
“그 일··· 때문이십니까?”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그룹 비서실도 다들 예민한 일이잖냐. 금융실명제.”
순식간에 공기가 무거워지자 박태진은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다른 일도 바쁘실 텐데···. 얼른 계약서부터 꾸미시죠.”
비서실 재무팀과 법무팀 직원이 들어와서 계약서를 꾸미고 이대수와 이성민의 도장까지 찍었지만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금융실명제라는 다섯 글자는 절대 지워질 수가 없었다.
***
병원에 누워 4학년 봄 학기 교재를 보고 회복에 집중하다 보니 벌써 3월 초가 됐다. 학교에는 다음 주부터 나갈 거라고 박태진이 교수들에게 말해뒀기에 마음도 홀가분했다.
“아 해봐.”
“누나, 굳이 안 그래도···.”
“가만 있어 봐. 아-.”
“아-.”
그 홀가분한 마음으로 난 장하연이 내 입에 넣어준 사과를 베어 물었다.
“맛있어?”
“응.”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내가 깎은 사과라지만 장하연이 내미는 과일을 받아먹다니.
장하연은 내가 전생이라는 악몽에서 깨어난 날부터 하루도 안 거르고 병문안을 와줬다.
일 때문에 한 시간 정도만 있다가 호텔에 돌아가곤 했지만 화병의 꽃을 바꿔주고, 말동무를 해주고, 고려호텔에서 사 온 음식이나 과일을 나눠 먹었으니 병실에서 하는 데이트라지만 천국이 따로 없었다.
사과를 받아먹던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하연의 눈을 봤다.
“왜, 누나? 말할 거 있어?”
“그거···. 한 번만 더 봐도 돼?”
장하연은 자기가 말해놓고도 민망해했지만 난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배게 밑에서 하드 케이스로 된 서류철을 꺼내 넘겨주자 장하연은 서류철을 펼쳐서 안에 있는 종이를 봤다.
박태진이 계약서를 가져온 날부터 장하연은 하루도 안 빠지고 계약서를 봤다. 올 때마다 믿기지 않았는지 계약서를 보고 해맑게 웃는 그녀의 밝은 얼굴을 보니 고맙고, 또 미안했다.
이 쉬운 걸 전에는 왜 못했을까. 자존심을 세워야 할 때는 따로 있었는데. 그 같잖은 자존심을 내려놓으니 사랑하는 사람의 웃는 얼굴을 마음 편하게 볼 수 있었다.
잠시 회한에 젖어있던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는 장하연의 목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너, 괜찮아? 스포츠카, 포기해도 돼?”
“왜? 싫어?”
일부러 뚱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장하연은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싫기는. 앞으로 너 안 다칠 거 생각하면 얼마나 좋은데.”
“그럼 됐잖아. 더 필요해?”
“그게 아니라···.”
머뭇거리는 게 오늘은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았다.
“스포츠카 한 번만 더 타면 상속 포기하겠다고 했잖아. 무슨 뜻인지 알고 한 거야?”
모를 리가 있나.
우리 같은 재벌가 사람들에게 ‘상속’은 주민등록신고 같은 거다.
스포츠카를 판 것도 모자라 ‘개인적’으로 스포츠카를 타면 상속을 포기하겠다고 계약으로 못 박았으니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자기 때문에 그런 줄 알고 미안해하는 장하연을 보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철없이 레이싱 할 일은 없어. 테스트 드라이버를 한다면 모를까.”
그때서야 장하연은 내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었다는 걸 깨닫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너 또···?”
“걱정 마. 누나 말대로 옆에 전문레이서 태우고 운전할 거니까. 그런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네. 우리 그룹, 자동차회사 없잖아?”
가장 중요한 사실을 짚어주자 장하연은 나지막이 탄성을 흘렸다.
“아··· 그렇지?”
“뭐, 내가 신성자동차에 발을 걸친다면 모르겠지. 그땐 내 일이 될 테니까.”
장하연은 날 보며 싱그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녀의 얼굴에 분홍빛 기운이 번지는 걸 보니 어떤 식으로 내가 신성자동차에 발을 걸칠지를 상상하는지 대충 감이 오고 있었다.
“그러겠네, 후훗.”
귀여운 코웃음 소리를 내는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생각하는 신성자동차에 발 걸치는 방법은 매우 다를 것이다. 그녀가 알면 경악할 만한 방법이니까.
미안한 감정을 숨기며 그녀와 동상이몽을 하던 중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흠흠···.”
“나, 그만 가볼게. 나중에 봐.”
뒤를 돌아본 장하연은 인사를 건넨 뒤 황급히 고개를 푹 숙이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젠장.
“이젠 퇴원해도 될 것 같군요. 뼈도 다 붙었고, 타박상이나 봉합된 상처도 거즌 아물었으니···. 고생했어요, 성민 군.”
“아닙니다, 원장님.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손을 뻗어서 교재와 노트, 심심풀이로 읽던 소설들, 경제잡지 등이 꽂힌 책장을 가리키자 책장을 본 원장이 껄껄 웃었다.
“책도 책이지만 여자친구 분 덕분에 병실에서 차분히 있어서 더 빨리 회복됐을 겁니다, 하하.”
원장은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내게 미안해서인지 훈수를 뒀다.
“여자친구 분한테 잘하세요, 성민 군. 하루도 안 거르고 와서 돌봐주는 사람이면···. 더 말 안 하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원장님.”
말 안 해도 알아서 잘 할 생각이었다. 좋았던 분위기 산통 깬 양반이 누군데?
의사들을 돌려보낸 나는 박태진을 시켜 이태원 집에서 가져온 도멜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아버지가 영국에 특별히 주문해서 선물로 준 이 옷을 입은 건 이유가 있었다.
‘우리 영감님 생각부터 바꿔야지.’
지금의 할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는 건 제정신을 차린 손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캐주얼한 복장, 우유부단한 태도, 핵심을 짚어내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는 설명···. 전생의 이 당시를 돌이켜봐도 그룹을 이끌 후계자로서 실격이니 어찌하리.
지금부터는 달라져야겠다.
난 올해로 창립 67년째인 해동그룹의 장손 이성민이니까.
그래서.
아버지가 선물한 옷을 입고 할아버지를 비롯한 우리 그룹의 어른들을 만날 것이다. 알맹이 못지않게 격식도 중요한 게 기업 아닌가?
복기를 하는 심정으로 비즈니스맨으로서 완전무장을 갖추고 나서야 전화기를 들었다.
“성민입니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냐? 어디 안 좋은 게야?]
“아뇨. 오늘 퇴원해도 된다고 했어요. 자잘한 상처는 통원치료 받으면 되고 후유증은 정기검진 때 체크하면 된다고 했고요.”
[허허, 알았다. 더 할 말이 있느냐?]
웃음소리만 들어도 할아버지가 후련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지금 바로 삼청동 들어갈게요. 괜찮죠?”
[집에 가서 쉬지 않고?]
“오늘 꼭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말할 거라니?]
“연말에 마무리하지 못한 거요.”
이번에는 꼭 바꿔야 했다.
나와 할아버지의 관계를, 우리 집안과 해동의 운명을 바꿀 일이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이어지던 침묵이 깨졌다.
[금융실명제 말이냐?]
“예. 확실히 복기했으니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알았다. 고 실장하고 사장단 부를 테니 제대로 말해야 할 게다.]
바라던 바였다. 해방 이전부터 이어져 온 우리 집안의 숨겨진 부가 걸린 일이니 그룹 핵심인사들이 모두 모이는 건 당연지사 아닌가?
“예, 회장님. 퇴원수속 밟고 출발하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으마.]
수화기를 내려놓은 나는 박태진을 향해 말했다.
“삼청동으로 가요, 형.”
“도, 도련님···.”
“확실히 준비했어요. 걱정 말고 가줘요.”
“알겠습니다.”
병실을 나온 나는 박태진과 함께 독일 세단을 타고 삼청동으로 출발했다. 이번에는 두 번째 단추를 고쳐 멜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