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2nd. 새로 꿰는 단추 (2)
“살펴 가십시오.”
“흥.”
박태진이 병실을 나서는 장수연에게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장수연은 대답도 하지 않고 짜증스럽게 콧방귀를 뀌고는 휙 나와 버렸다.
이성민에게 바락바락 욕을 퍼붓고 싶던 것도 간신히 참고 나온 마당에 별 볼일 없는 이 씨 집안의 고용인 따위가 건네는 인사를 받아줄 자비 따윈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타 문이 닫힌 순간, 혼자 있는 것을 확인한 장수연이 입술을 깨물며 독살스럽게 중얼거렸다.
“건방진 새끼···.”
처음부터 끝까지 맘에 드는 게 하나 없었다.
제 스스로 주제를 알고 있는 것처럼 이성민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수석으로 입학했고, 빨아먹을 집안까지 빵빵한 제법 쓸 만한 호구다. 이런 최고급 노예는 구하기 힘들다.
“사고가 나면서 머리도 다쳤나, 갑자기 왜 저래?”
장수연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이맛살을 구겼다.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좀 더 알아봐야겠어. 이건 왜 이렇게 안 닫혀.”
장수연은 이빨을 깨물며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부술 듯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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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연이 휭하니 사라진 뒤.
장하연과 박태진은 병실의 복도에서 서로 마주보고 섰다. 장하연은 성민이가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슬쩍 병실의 문을 닫았다.
“죄송해요, 선배님. 수연이 대신 사과할게요.”
장하연이 핸드백을 잡은 두 손을 앞에 두고 고개를 숙이자 박태진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가씨. 일개 고용인일 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하.”
장하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껄껄 웃는 박태진을 보며 미소를 띠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선배님. 그런데··· 성민이가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저런 애가 아니었는데···.”
말끝을 흐리던 장하연이 본론이라는 듯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다시는 안 타는 거죠? 스포츠카.”
“아가씨도 아시잖습니까? 회장님께서 스포츠카 싫어하시는 거. 지금까지는 사장님과 사모님을 잃은 도련님이 안쓰러워 놔두셨지만 사고까지 난 이상 끝입니다. 도련님이 고집을 피워도 좌시하지 않으실 겁니다.”
박태진의 말을 듣고서야 장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개운하지가 않았다.
“오늘 보니까 저, 아직도 먼 거 같아요.”
“무슨 말씀입니까, 아가씨?”
“성민이, 늘 역사책 끼고 살던 애였잖아요. 그런 애가 경영학과 갈 거라고 해서 놀랐었는데··· 오늘에야 그 이유를 알았네요.”
장하연은 이성민의 서울대 경영학과 입학을 단순한 변덕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장손이라는 굴레, 기대라는 목줄을 끊어내지 못하고 경영학과에 갔다는 사실은 오늘에야 알았다.
장하연은 그런 이성민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자신이 아버지 장호건의 기대를 못 이겨 예술을 포기하고 경영학과에 간 것처럼 말이다.
“어쩔 수 없지요. 70년 가까이 되는 해동그룹 장손이기도 하지만 전주 이 가의 종친이기도 하니까요.”
“아··· 그랬죠.”
그때서야 장하연은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더 떠올랐다.
전주 이 씨면서도 재계에 뛰어들어 볕드는 땅과 그늘진 땅 양쪽에서 막대한 부를 일군 해동그룹.
장사치가 됐어도 가문을, 그룹을 이어갈 장손이니 이대수라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지막이 탄성을 흘리는 장하연을 보며 박태진은 담담한 목소리를 이어갔다.
“회장님께서 도련님이 스포츠카 모는 걸 봐주신 건 당신 뜻을 받들면서 본인의 꿈을 포기한 도련님에 대한 보상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돌아가신 사장님 내외분들과 타고 다니던 차를 몰겠다고 하니 어떤 할아버지가 반대하겠습니까?”
박태진의 말을 듣고서야 장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이대수에게 미안해졌다. 자신이 이성민을 좋아한들 피로 이어진 조손지간의 깊은 정보다 더하겠는가.
“성민이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그 애가 다치는 게 싫어서 말렸는데 제 생각이 짧았어요.”
“아닙니다, 아가씨. 도련님도 아가씨 마음을 이해한 것 같으니 저로서도 다행일 뿐입니다. 다만···.”
박태진은 표정을 굳히고 말끝을 이었다.
“앞으로 더 지켜봐야겠지만 도련님이 바뀐 것 같으니 아가씨도 도련님을 다르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다르게 봐주라니요?”
눈을 깜빡거리는 장하연에게 박태진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동생이 아닌 남자로 도련님을 봐주시길 바랍니다. 무례인 줄 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박태진이 정중히 허리를 숙이는 걸 보고 장하연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러지 마세요, 선배님. 지금 해주신 말씀, 새겨둘게요.”
그 말을 듣고서야 박태진은 허리를 반듯하게 세웠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리고··· 보는 만큼 정도 드는 법입니다.”
“보는 만큼 정 든다···.”
나지막이 자신의 말을 곱씹는 장하연을 보며 박태진이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도련님도 마찬가지겠지만 아가씨께서 도련님을 새롭게 보시겠다면 새로운 정을 쌓으셔야 할 겁니다.”
장하연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지금껏 이성민을 동생으로만 바라보며 대했던 자신의 태도를 고쳐야 더 깊은 관계를 맺을 거란 메시지가 아닌가?
장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태진을 바라봤다. 대학 선배이기 전에 인생 선배인 그에게서 들은 조언 덕분인지 그녀의 얼굴은 병실에 들어올 때와 달리 밝아져 있었다.
“고마워요, 선배님.”
“아닙니다, 아가씨. 짧은 생각이나마 받아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살펴 가십시오.”
장하연은 박태진의 배웅을 받고는 올 때와 달리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
병원을 나서기 전 장하연은 고개를 돌려 새삼스레 누굴 만나고 왔나 떠올렸다.
선배의 말을 들어서 그런가, 그곳에는 보살펴야 할 동생이 아닌 눈빛이 시린 남자가 있는 것 같았다.
***
침대에 비스듬하게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이 열리며 박태진이 들어왔다.
“둘 다 갔어요?”
“예, 도련님. 수연 아가씨는 바쁜 일이 있으신지 금세 병원을 나가셨습니다.”
콧방귀도 안 나올 만큼 장수연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나를 지들 남매의 노예로 삼으려고 왔다가 일이 틀어졌으니 다른 수를 써서 나를 꾀려 들겠지.
백날 노력해봐라. 23년간 인이 배길 만큼 당했는데 훌러덩 넘어갈까보냐.
지금쯤 골이 터져라 고민하고 있을 장수연 때문에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는 박태진에게 물었다.
“하연 누나는요?”
“하연 아가씨는 밖에서 저와 도련님 이야기를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장하연과 박태진은 나와는 상관없이 이미 두터운 친분이 있었다. 같은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의 됨됨이를 알아보고 가까이 지낸 친구가 아닌가. 그런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듣고 싶었다.
“뭐라고 말하던가요?”
“도련님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병실 밖에서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제야 내 마음을 헤아려주고 미안해하기까지 했다니···.
박태진은 사춘기 소년처럼 상기된 나를 바라봤다. 날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흐뭇함이 가득했지만···.
“철이 든 것 같기도 하고, 안 든 것 같기도 하고···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하하.”
“형도 참···.”
쑥스러워서 뒷머리를 쓰다듬었지만 박태진이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내 마음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23년 동안 못 봤던 저 푸근한 미소를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럼에도 난 그에게서 확인할 게 있었다.
“형.”
드물게 내가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자 박태진이 살짝 긴장하며 입을 열었다.
“예, 도련님.”
“혹시··· 우리 둘이 인천 창고 간 적 있어요?”
조심스럽게 물어봤지만 박태진은 그저 눈만 깜빡거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련님? 인천창고라뇨?”
“그, 있잖아요. 피떡 될 때까지 두들겨 맞고는···.”
머쓱해하며 전에 있던 일들을 얘기하더니 진지하게 듣고 있던 박태진이 갑자기 인상을 썼다. 호, 혹시 형도 나와 같은?
“사고 후유증이 아직 남아 있는 거 아닙니까?”
박태진이 급하게 간호사를 호출하려 했다.
“아니에요. 됐어요. 됐어!”
“진짜 괜찮으신 겁니까, 도련님?”
“걱정 마세요. 농담한 거예요.”
“명동 사채시장에서도 그런 일은 드뭅니다. 심적 압박이라면 몰라도 생명을 해치는 일은 극히 일부죠. 더군다나.”
박태진은 굳은 얼굴로 끊었던 말을 이었다.
“명동에 계시는 회장님 휘하 쩐주 분들은 그런 질 낮은 일과는 거리가 먼 분들입니다, 도련님. 그늘진 땅이라도 최소한의 격은 지키고 계시니 오해는 안 하시길 바랍니다.”
“그, 그렇죠? 하하.”
우리 집안 사채조직이 품격 있는 조직(?)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나 혼자서만 돌아온 사실이 씁쓸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질 수 있다.
어긋난 과거를 반복하지 않고 내 주변사람들과 행복하게, 폼 나게 살 수 있다.
더 이상 남의 집 사냥개 노릇을 할 필요도 없었고 회장이 되려고 욕심 낼 필요도 없었다. 회장이라는 왕관은 허울에 불과할 뿐, 그 왕관에 어울리는 영토와 힘을 내 손에 쥐면 그만이다.
지금의 내겐 왕관을 쓰는 게 자충수다.
이 세상에서 할아버지만 아는 우리 집안의 숨겨진 부, 그에 비해 턱없이 왜소한 해동그룹을 생각하면 크기도 전에 다른 그룹들, 혹은 그들과 붙어먹은 정치꾼이나 고위 관료들에게 집중포화를 맞고 사라질 터.
그러니 내가 만들고 내가 쓸 왕관은 아무도 나를, 우리 집안을, 해동그룹을 구속하지 못할 때 써야 한다.
그와 동시에 해야 할 일 두 가지가 있었다.
‘장하연, 이번엔 내 여자로 만든다.’
두 번 다시 놓칠 수 없었다. 처형과 제부가 되고나서야 서로의 소중함을 깨달은 그 바보 같은 과거 따위, 한 번으로 족했다. 그리고···.
‘장 씨 놈들, 지근지근 밟아주마.’
혼외자식이라는 이유로 장호건을 제외한 처가 식구들한테 핍박당했던 장하연과 함께 내가 키울 해동그룹으로 신성그룹을 잡아먹고 처갓집 인간들을 전부 개털로 만들어 발밑에 둘 것이다.
그 모든 걸 이루려면 자동차 문제를 확실히 매듭지어야 했다.
“형.”
“네, 도련님.”
“할아버지한테는 말씀 드렸죠? 저 깨어난 거.”
“예, 도련님. 일정이 끝나는 대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병실에 누워있던 손자보다 일을 먼저 챙기는 할아버지··· 과거의 이 시절에는 밑도 없이 야속했지만 살만큼 살고 돌아와서야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 자동차 처분은 할아버지에게 내가 바뀌었다는 확신을 줄 제스처가 되어야한다.
난 배다른 두 자매 앞에서 말하지 않았던 걸 박태진에게 주문했다.
“자동차 팔겠다고 한 거, 각서로 꾸며주세요. 앞으로 개인적으로 스포츠카 타면 상속까지 포기하겠다고요. 친가, 외가 모두에요.”
“도련님?”
박태진은 놀란 얼굴로 내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 했지만 지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놀랄 거 없어요. 이 지경이 됐는데 또 레이싱 하면 병신이죠.”
노파심에 확인할 게 있었다.
“···그래도 호건이 아저씨 손도 타서 걸리긴 한데··· 사주시겠죠?”
“사주실 겁니다. 장 회장님 손을 탔어도 사장님과 도련님 손길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심려치 마십시오, 하하.”
박태진의 시원시원한 웃음을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할아버지가 막내아들처럼 키운 사람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다행이네요. 이 사실은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면 안 돼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알겠습니다, 도련님.”
자리에서 일어난 박태진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병실을 나갔다.
혼자 있는 것을 확인한 그제야 긴장이 모두 풀려 침대에 널브러졌다. 말도 안 되는 일의 연속이라 아직까지도 꿈을 꾸는 것 같지만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나는 되돌아 온 것이다.
어떤 신의 장난으로 이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기회를 절대로 허투루 쓰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