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2nd. 새로 꿰는 단추 (1)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뜬 내게 이질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구닥다리 적갈색 소파.
촌스러운 벽지와 전등.
이 올드한 인테리어의 방 안에서 난 지금 침대에 누워있었다. 환자복을 입고 다리에 깁스를 감은 채!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쨍, 찻잔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 도련님?”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나는 입이 쩍 벌어졌다.
“···형?”
내 눈에 들어온 남자는 박태진, 그것도 수십 년은 젊어진 박태진이었다.
‘이게 뭐지 설마··?’
깨어난 날 보고 놀라 도자기 컵이 깨졌는데도 환희가 넘치는 그의 얼굴을 보니 울컥해 달려가 안고 싶었다. 몸을 일으키는데 온 몸이 찢어질 듯 아프다.
붕대가 둘러진 내 몸을 보니 데자뷰처럼 스쳐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스물두 살 겨울에 터졌던 교통사고.
장용재의 초대를 받아 용인의 스피드로드에서 철없이 스포츠카를 몰다가 브레이크 결함으로 사고를 당했었다.
이 사건이 내가 장하연과 썸만 타다 깨진 단초였다.
이후로도 난 레이싱이라도 하지 말라는 장하연의 간곡한 부탁에도 자동차와 레이싱 모두를 포기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그녀의 절교 선언.
나나 장하연이나 서로의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돌아선 것이었다.
“흐흐흐흐···.”
순식간에 영화필름마냥 스쳐지나간 기억에 헛웃음만 나왔다.
“도,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박태진은 한참동안 헛웃음을 흘리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중 고개를 흔들고 크게 소리쳤다.
“간호사! 간호사!”
그렇게 난 얼빠진 표정으로 복도를 달리는 박태진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몇 시간이 지나서야 이 상황을 조금씩 받아들인 나는 모든 사람을 물린 뒤 혼자 남은 방에서 달력을 바라봤다.
‘1993년 1월 3일이라···.’
내가 사고를 당한 날은 1992년 12월 24일 저녁, 달력에 표시된 날짜가 진짜 오늘이라면······내가 깨어난 날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럼··· 과거로 돌아왔다는 건가?
무엇보다 지옥이라기에는 박태진이 날 걱정하는 얼굴이 너무나 다정했다.
이런 내용은 나도 전생에서 본 적이 있었다. 요새 트렌드라며 젊은 직원들이 스마트폰으로 소설을 보곤 했으니까.
슬쩍 들여다봤던 그 재벌 소설의 내용을 보곤 기가 차서 웃기만 했는데 내가 바로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될 줄이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1993년 새해 벽두라니?
이 시절은 내가 장하연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와 틀어지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할아버지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못한 채 막연한 감으로만 금융실명제에 대비해야 한다고 외쳤다.
할아버지는 내 주장을 철없는 소리로 치부했고 그 대가는 나도 알 수 없는 규모의 돈을 은행에 뺏긴 걸로 끝났다.
이때부터 나는 할아버지의 시대가 끝났다고 여겼고, 아버지의 친구였던 장호건 회장의 신성그룹으로 들어가고 싶어졌다.
어릴 적에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뒤부터 날 자식처럼 아껴줘서 마음이 기울기도 했지만 그 대가는 신성그룹의 노예 23년이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번 삶의 내 목표는 사랑, 그리고 복수였다.
앞으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다. 내 가족, 내 연인, 내 울타리에 들어올 사람들까지.
그와 동시에 나와 내 사람들을 해치는 놈들은 누가 됐든 짓밟아 뭉개고 그놈들이 가진 모든 걸 빼앗을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 집안은 이 나라보다 오래된 해동그룹, 규모는 알 수 없어도 이 나라 최대의 사채조직과 축적된 인맥이 있다. 냉철하게 판단하고 은밀하게 움직이면 사랑과 복수 모두를 쟁취할 수 있다.
허나 우리 집안의 불문율과 얽힌 사채조직 내부 사정, 잘 나가는 놈을 가만 놔두지 않는 정재계의 생리와 국민정서, 무엇보다 내 사랑 장하연까지 생각하면 마냥 돈 싸움으로 밀어붙일 수도 없다. 왜냐고?
돈만 있다고 먹을 수 있는 재벌그룹이 아니라서 그렇다.
중세 왕족과 귀족만큼 핏줄과 혼맥을 따지는 재벌 오너들, 그런 그들을 왕처럼 떠받드는 임직원들, 외부 세력인 기관투자자나 다른 재벌들을 생각하면 만만한 일이 아니다.
신성그룹을 해동그룹에 합병시키든 지분을 틀어쥐든 장하연을 제외한 신성그룹 장 씨 것들을 쫓아내려면 그놈들을 자격 없는 놈들로 만드는 건 기본이다.
내 사람이 될 신성그룹의 임직원들도 사로잡고, 외부 세력들이 개입하는 것도 막아야 신성그룹을 집어삼킬 수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신성그룹 장호건의 사위는 되어야 한다.
데릴사위는 아니라도 장호건의 사위, 장하연의 남편이라는 타이틀이 있어야 해동그룹으로 신성그룹을 잡아먹어도 모든 변수를 잠재울 테니까.
물론.
미래 정보를 죄다 알고 있는 나라면 10년 안에도 신성그룹을 내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 그런데도 왜 힘들게 돌아서 가려고 하냐고?
‘흔한 재벌 소설처럼 쉽게 복수하는 걸로는 직성이 안 풀려. 내가 당했던 세월만큼 그 자식들도 피가 말라봐야하지 않겠어? 능지처참처럼.’
10여 년 뒤의 첩보영화에서 남자들의 쩍벌을 접게 만들 매즈 미켈슨 형님이 출연할 또 다른 킬러 영화에 나오는, 손톱깎기로 팔뚝 밑살을 깎는 장면만큼이나 잔인한 능. 지. 처. 참(凌遲處斬).
그 능지처참은 형 집행자가 얼마나 오래 사형수의 숨을 붙여놓으며 산 채로 회를 떠내냐에 따라 그 기량을 평가받는다.
내가 자초한 결과였지만 내 심신이 고목나무처럼 말라죽어가던 세월만큼 장 씨 것들도 똑같은 시간에 걸쳐서 고통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놈들이 가진 모든 걸 빼앗고, 그놈들이 이룬 모든 걸 무너뜨리겠어.’
그놈들의 미래 사업을 먼저 하든 그놈들의 회사를 집어삼키든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그렇게 그 빌어먹을 장 씨 것들이 열등감, 분노, 슬픔, 무력감··· 그 모든 것들이 담긴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그 늪에 먹히는 꼴까지 감상해줘야 내 묵은 원한이 말끔히 풀릴 것 같았다.
그렇게 이 말도 안 되는 상황를 곱씹으며 더 말도 안 될 계획의 뼈대를 잡던 중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민아!”
당연히 박태진일 거라고 생각한 나는 이어지는 목소리에 눈이 커지고 귀를 의심했다.
귀에 익은, 정겨운 목소리.
내가 아는 이 목소리의 주인은 단 한 명뿐이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단 한번만이라도 더 듣고 싶었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장하연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28년 전과 똑같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다르지 않은 모습 그대로!
“자, 장···.”
말을 더듬으면서도 손을 뻗는 와중에도 장하연은 내가 앉은 병상으로 뛰어왔다.
짝!
“크흐으!”
장하연의 매운 손맛 한 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너 레이싱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왜 말을 안 들어!”
장하연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소리치면서도 날 노려보며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소리부터 지르며 짜증을 냈었지만 지금은 내 심장이 견딜 수 없이 아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싶었지만 나는 지금 온몸이 부서진 놈이다. 그저 미안한 마음만 담은 눈과 표정으로 바라보는 게 전부였지만 장하연은 여전히 씩씩거리며 날 다그쳤다.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 하다못해 전문 레이서라도 태우고 달리라고! 말했어, 안 했어? 어! 왜 말을 안 들어!”
그녀는 손이 부서져라 내 팔뚝을 후려쳤다. 날 걱정하는 이 여자의 마음을 왜 외면했을까.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젊은 날의 같잖은 자존심 때문에 장하연의 간곡한 목소리를 무시했으니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내가 할 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미···.”
그 말과 함께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내려고 할 때 문이 열렸다.
“야, 장하연!”
머릿속이 찌릿해질 만큼 혈압을 올리는 앙칼진 목소리. 그 날카로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리플레이 한 번 빌어먹게 딱딱 맞아떨어지는군, 젠장.
***
장수연은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장하연을 노려보며 병실로 들어왔다. 어쩜 이렇게 다 맞아떨어질까?
예전이라면 대놓고 나한테 화내는 장하연을 혼내는 장수연에게 마음이 기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여편네가 내게 했던 짓을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꺼지라고, 아니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계산을 마친 나는 분노를 누르며 장수연이 하는 꼬라지를 지켜봤다. 지금은 속여야 할 때니까.
“괜찮아, 성민아? 얼마나 걱정했는데?”
“피곤하네. 잠이 덜 깼나봐.”
무미건조한 대답에 장수연의 눈꼬리가 잠시 올라가려다 말았다.
저 여편네와 한 이불 덮은 세월이 23년이다. 게다가 이 시절의 장수연이라면 50까지 살다 돌아온 나 이성민에겐 밥이다.
“누나가 애써 위로해 주는데 반응이 그게 뭐야? 누나, 맘에 안 들어?”
“아니, 방금 일어났더니 정신이 없네. 이해하지?”
장수연은 내가 반응이 밋밋하자 타겟을 바꿔 장하연 쪽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장하연, 네가 뭔데 성민이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얘가 아직도 애야? 니가 얘 마누라라도 돼?”
장하연은 핏줄이 불거진 주먹을 꼭 쥐고 장수연을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일이 터질 듯했다.
과거에는 저 모습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는데, 이제와 보니 장 씨 가문에서 의지할 데 하나 없는 그녀가 의지한 것이 나뿐이었던가 싶다.
“그만!”
병실이 울리게 소리치자 장수연과 장하연이 크게 뜬 눈으로 날 바라봤다.
“둘 다 뭐하는 짓이야? 여기 싸우자고 왔어? 아픈 사람 앞에 두고 뭐하는 짓이야!”
생각지도 못한 호통소리에 두 사람 모두 얼어붙었고, 어린애(?)들에게 호통을 친 나도 민망함을 숨기고 둘을 노려봤다.
껍데기가 스물셋이면 뭐하나. 정신이 오십인 건 속이지 못했다. 아무튼 주도권은 내게 넘어왔으니 시작해볼까?
방법이야 이미 마련되어있다. 지난 20여 년간 뼈저리게, 속이 썩어 문드러지게 되뇌고 되뇌던 거였으니까.
그 방법은 장하연에게 확신을, 장수연에게 혼란을 줄 것이다. 소꿉놀이 하던 어린 시절부터 장호건과 함께 우리 집을 드나들었던 장하연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방법이니까.
한 번도 우리 집에 안 오고 아버지와 내가 장호건의 집에 가서 식사할 때 밥상머리에서나 간간이 봐왔던 장수연은 절대 헤아리지 못할 방법이니까.
적당히 시간을 끈 나는 박태진을 불렀다.
“형.”
“네, 도련님.”
“스포츠카, 할아버지한테 팔게요.”
박태진, 장하연, 장수연 모두 크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성민아 정말이야?”
“이성민 너, 무슨··· 뜻이야?!”
내 생각대로였다.
먼저 물어본 장하연과 뒤이어 물어본 장수연의 뉘앙스부터가 완전히 갈라진 걸 보니 대성공이었다.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다시 한 번 말했다.
“말 그대로야. 지하 차고에 있는 스포츠카, 전부 할아버지한테 팔 거야. 나중에 할아버지 허락 받으면 탈 수 있겠지.”
해동그룹의 2대 총수이자 ‘재계의 기인’이라 불리는, 나의 할아버지 이대수. 그를 잘 알고 있는 장하연이라면 내 말을 정확히 이해했을 것이다.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장하연은 좋아서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잡으려 했고, 장수연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자 더더욱 내 선택에 확신이 들었다.
“무슨 뜻이냐니까? 너, 스포츠카 없으면 죽을 것처럼 살았잖아?”
뭔가 일이 이상하게 꼬이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장수연이 다그치듯이 물었지만 승기를 잡은 장하연의 태도는 이전과는 딴판이었다.
“수연이 너, 몰랐구나? 성민이 할아버지, 이대수 회장님께서 자동차 싫어하는 거?”
“뭐?”
장수연이 황당한 표정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는 와중에도 장하연은 쉴 새 없이 장수연의 속을 긁었다.
“성민이 차, 명우 아저씨가 자식처럼 돌보던 차인 건 알아?”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니? 그러니까 그걸 왜 갑자기 파냐는 말이야!”
장수연은 지지 않겠다는 듯 앙칼진 목소리로 받아쳤지만 장하연은 여유가 넘쳤다.
“그럼 두 분이 그 차 돌보면서 자동차 사업 같이 하자고 했는데 이대수 회장님이 반대해서 못한 건?”
“뭐?”
예상대로 장수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성민, 너 지금 나 물 먹이려고 한 거야?”
눈에서 독기를 뿜어봤자다. 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장수연에게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말이 좀 심하네. 누난 내가 자동차 몰다가 죽기라도 바라나봐?”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됐고! 우리 할아버지가 나 아껴서 스포츠카 타게 해준 것까지 일일이 설명해줘야 해? 나한테 관심 없었나보네?”
저 여편네가 늘어놓으려는 변명을 끊어버리고 비아냥거리며 몰아붙이니 속이 다 후련했다. 대 신성그룹 장호건 회장의 적녀(嫡女)인 자신에게 돈놀이에 환장한 집안의 애새끼가 면박을 주고 있으니 얼마나 쪽팔릴까?
하지만 새빨개진 장수연의 얼굴을 보니 슬슬 화를 눌러줘야 할 것 같았다.
“아무튼, 하연이 누나 말대로 할아버지가 자동차 싫어하는 거 사실이야. 그래도 나, 할아버지 바람대로 국사든, 서양사든, 동양사든 깨끗이 포기하고 서울대 경영학과 들어갔어. 그것도 문과 수석으로. 그래서 자동차 선물도 받았고.”
전생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별 탈이 없으면 세 명의 사촌동생들은 각자가 좋아하고 원하는 대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들어갈 것이다.
허나 난 장손이자 해동그룹 4세들 중 첫째로서 서울대 상학과 첫 졸업생이었던 할아버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 했다. 장하연이 선배가 아니었다면 스트레스 때문에 새치가 생겼을 것이다.
다시 생각하니 열이 뻗친다. 그간의 개고생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런 내가 자동차 타겠다는데 누나가 할아버지라면 반대하겠어? 안 그래?”
“아··· 그렇지. 오해해서 미안해, 성민아.”
장수연이 마지못해 사과하고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니 열이 제대로 받은 것 같았다.
장호건이 장하연, 장용재처럼 경영학과나 경제학과를 보내겠다고 20년을 갈아넣었는데도 간신히 서울대 의류학과에 들어간 장수연에게 학벌은 히스테리에 가까운 콤플렉스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장수연에게 달콤한 미끼를 던졌다.
“그래도 사고 거하게 쳤으니까 자숙하겠다고 스포츠카 팔겠다는 거야. 넘겨짚지도, 오해하지도 마.”
앞에 있는 장하연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직은 장수연을 적으로 돌리면 안 된다. 지금부터 그녀의 외가인 조국일보가 심부름꾼과 기자를 풀어 날 감시하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거기에 더해 내가 당한 23년만큼은 아니더라도 기만당했을 때의 허탈함과 분노를 저 여편네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만큼은 장수연 코에 코뚜레를 달고 내가 원하는 대로 질질 끌고 가야 한다. 그때쯤이면 지금 내가 하는 말이 희망고문이라는 걸 알아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이런 속뜻까지 지금 장하연에게 알려줄 수는 없지만 장하연이 마음이 걸려서 그녀를 보며 표정으로 눈치를 줬다.
내 얼굴을 보고 장하연도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꼭 다물었다. 할아버지가 자동차를 가져가면 절대 열쇠를 내주지 않을 분이라는 것을, 지금 내가 말한 게 공갈이라는 것을 알 사람이 아닌가?
일도 마무리했고 사인도 주고받았으니 쉬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일어나고 싶으니까.
“미안한데 다들 돌아가 줘.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힘드네. 잘게.”
무뚝뚝하게 말한 나는 그대로 누워서 두 사람에게 등을 돌렸다.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장하연에게 토로할 지난 23년에 대한 미움은.
오늘로 시작이었다.
장수연에게 쏟아낼 지난 23년에 대한 분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