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1st. 백년손님의 인생 (2)
“고마워, 여보. 앞으로는 정말 잘할게. 사랑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인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끄고 썩은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잘할 일은 없다.
오늘부로 그 개 같은 신성그룹 장씨 집안에서 나올 거니까.
이 길로 곧장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이 나라를 뜨면 죽을 때까지 화려한 백수로 살 거다.
이 지긋지긋한 땅에 대한 미련을 털어내던 중 스마트폰 벨소리가 울렸다.
“휴우-.”
발신자 이름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그 지긋지긋한 신성 가 사람들 중에서도 내가 절대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의 전화이기 때문이었다.
“네, 이성민입···.”
[그만 화 풀어, 성민아. 수연이가 그러는 거 하루이틀도 아니잖아?]
날 타이르는 부드러운 목소리.
장수연의 언니 장하연이었다.
어떻게 우리 두 사람 일을 안지 몰라도 그녀의 말을 듣고 생각을 고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나, 23년간 개처럼 일했어. 친가에 등 돌리고, 외가에서 손가락질 받아도 장인어른을 아버지처럼 모셨다고. 그런데도 공은 처남들이 다 가져갔어. 몰라?”
목에 핏대를 세우며 화내는 나에게 장하연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호건은 내가 장수연과 결혼한 뒤에 언제 그랬냐는 듯 날 아끼던 태도를 싹 바꾸고 개처럼 부려먹었다. 장수연도 장수연이지만 아버지처럼 따르던 장호건의 뒤바뀐 태도는 생지옥 그 자체였다.
[알아.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어떡하려고?]
“이젠 끝났어. 더 이상 못해먹겠다고.”
남들이 보면 나잇값 하라고 손가락질하겠지만 난 정말 지쳤다. 사위라지만 오너 가문 사람인데도 다른 임원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일했건만 이딴 대접이 고작이었다.
[······.]
내 귓가에는 저 멀리에 있는 그녀의 숨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 마당에 망설일 것도 없으니 지금껏 이해할 수 없던 거나 물어봐야겠다.
“당신, 왜 아직도 시집 안 가?”
[응?]
“누가 당신을 쉰하고도 두 살이라고 볼까? 머리도 좋잖아? 그런 사람이 왜 고려호텔하고 결혼했다는 소리나 듣고 살아?”
여배우와 함께 있어도 꿇리지 않는 미모, 나보다 두 해 먼저 서울대 경영학과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
장호건의 혼외자식이라는 것만 빼면 어지간한 집안에서 탐낼만했지만 그녀는 나와 헤어진 뒤부터 혼기를 놓치기 전까지 자신에게 들어온 애프터를 야멸차게 거절했다.
덕분에 쉰이 넘은 지금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고 고려호텔만 돌보며 살아왔고 언론에서는 그녀가 일에 미쳤다, 고려호텔과 결혼했다는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그런 철의 여인 아니랄까봐 내게 건네는 말은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농담하지 마. 바람 쐬고 빨리 돌아와. 장수연 기다리겠다. 걔, 너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타이른답시고 하는 말이 이따위라니··· 수십 년 전에 이별통보를 받았을 때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는데,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한테도 내가 신성의 사냥개야? 장수연 애완견이냐고?”
[서, 성민아···.]
이렇게 된 거, 막장까지 가야겠다. 23년째 꾹꾹 눌러왔던 거, 오늘 아니면 언제 터뜨릴까? 앞으로 못 볼 사람인데.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내가 왜 장수연하고 결혼한 줄 알아?”
[신성그룹 회장실 차지하겠다고 그런 거잖아?]
“그랬지. 신성그룹 회장실 쓰고, 본관 로비에 내 흉상 만들겠다고 당신 버리고 장수연하고 결혼했지. 그런데,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었어.”
어렸을 때부터 깨지기 전까지 친남매처럼 지내왔던 장하연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당신 가슴에 대못 박으려고.”
[뭐?]
“내 차 죄다 버리라고 한 당신이 싫었어. 부모님 유품이었던 거, 당신은 알았잖아? 내가 당신이었다면 내가 차 몰다가 병원 신세 졌어도 자동차 팔라고 안 했어. 차라리 할아버지한테 맡기라고 했을 걸?”
내가 물려받은 자동차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하는 보물이었다. 그 자동차 때문에 교통사고로 몇 달간 병원에 입원했어도 나와 보낸 시간을 생각했다면 자동차를 남에게 팔라는 소리는 절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날 이후로 우리 둘은 틈이 생겼고, 그 틈을 파고들어온 장수연과 사귀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나저러나 모든 게 끝났다. 돈도, 권력도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내가 가장 사랑하던 여자의 마음에 대못을 박았잖나.
그래도 그런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이젠 다 끝난 일이야. 그러니까 너도 궁상 떨지 말고 좋은 남자 잡아. 나 같은 놈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장하연은 장호건에게서 냉대당하고 장수연에게서 무시당하던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곤 했었다. 나에 대한 동정과 연민 때문에 지금껏 혼자 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바보 같은 사람. 차라리 결혼이나 했으면 실컷 원망하고 살았을 텐데 결혼도 안 하고 매일 같은 집에서 마주하는 바람에 이런 소리까지 나와 버렸다.
[성민아, 나는···.]
“됐어.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하기엔 구질구질해. 그만 하자.”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던져놓고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무슨 말이 더 하고 싶은지 전화를 끊은 이후에도 전화벨이 계속 울렸지만 받을 수 없었다. 나 따위 쓰레기, 그녀의 인생에서 꺼져줘야 그녀가 자유로워질 테니.
“허망하네요, 형님. 나한테 남은 게 뭘까요?”
한숨을 내쉬며 한탄한 내게 박태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살아 있잖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이유는 충분해.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그의 말대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은 재산과 이 좋은 머리로 돈을 불리고 신성그룹의 목에 비수를 박아 넣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도로를 바라보니 ‘김포공항’이 적힌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네 글자가 흐트러진 정신을 잡아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쾅!
뒤를 따라오던 승합차가 갑자기 속도를 내더니 내 롤스로이스를 들이받았다. 몸에 전해진 충격은 보통 승합차로 절대 줄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 이유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끄으으···.”
차가 워낙 크고 튼튼한 데다 안전벨트를 맨 덕분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나는 말도 못하고 신음만 간신히 입 밖으로 흘릴 뿐이었다.
‘박태진은?’
흐릿한 눈으로 운전석을 보려는 찰나, 문 열리는 소리가 들었다. 구조인가 싶어 옆을 바라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양복을 입은 놈들이었다.
“크흐흐···. 목숨은 붙어있군. 사모님이 좋아하시겠어.”
날 보며 음침하게 웃던 남자가 손에 쥔 시커먼 걸 내게 들이댔다. 저건?
“끄으으!”
스파크 튀는 소리와 함께 의식이 점차 흐려졌다. 자유는 내게 파랑새였단 말인가. 젠장.
***
짝!
“야! 일어나! 이성민!”
뺨이 화끈해지면서 정신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구속감이 온몸에 퍼지고 몸에 힘이 없었다. 기절한 사이에 밧줄로 묶이고 마취제까지 주사당한 건가.
“으으으···.”
침음성을 흘리며 눈을 뜬 나는 두 남자에게 팔 한 짝씩 들린 채 어둡게 썬팅된 차에서 박태진과 함께 끌려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거대한 물류창고 같았다. 차에서 내려진 나는 천장에 매달린 채 환하게 켜진 조명 불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인천창고야, 이성민. 원래는 해동물산 창고였던 거 알지?”
이 목소리는··· 설마?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자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장수연이 경호원들을 뒤에 두고 걸어 나왔다.
“장수연?”
“어쭈? 이젠 내 이름도 함부로 부르네?”
장수연이 고갯짓을 하자 나와 박태진을 둘러싸고 있던 남자들이 주먹질과 발길질을 퍼부었다.
“악! 악!”
“윽! 으윽!”
“아하하하!”
우리의 비명소리가 커질수록 장수연은 즐거운 듯 웃어댔다.
우리가 피곤죽이 되고나서야 장수연은 손짓으로 경호원들을 멈추게 했다. 경호원들은 우리 둘을 무릎 꿇린 채 양팔을 잡아 올리고 움켜쥔 머리채를 뒤로 당겼다.
“이 창고, 네 덕분에 쉽게 먹었지. 너 죽고 나면 이거 밀어버리고 뭘 세워볼까? 아파트? 빌딩? 호텔? 아하하하!”
장수연이 친 뒤통수에 교통사고다, 몽둥이 찜질이다 정신이 없었지만 그 말에 열불이 터졌다.
인천 물류창고는 증조부님은 물론이고 할아버지가 아끼던 곳이었다. 그 때문에 내 명의로 돌려두고 신성물산에 헐값으로 임대만 주고 있었는데, 조각조각 팔아먹겠다니!
“장수연···!”
잔뜩 맞아 너덜너덜해진 눈조차 제대로 뜨기 힘들었지만 으르렁 거리듯 장수연의 이름을 외쳤다. 장수연은 내 몰골이 마음에 드는지 입꼬리를 올리며 날 내려다봤다.
“그래, 나 장수연이야. 널 사냥개로 부려먹었던 장수연. 내가 네 머리 위에 있던 걸 왜 몰라?”
“뭐?”
“맘만 먹으면 금방 알아낼 수 있어. 교통정보, 통신기록··· 그리고 네 본심까지 전부.”
등골이 서늘해졌다. 스마트폰에 해외 정보부에서나 쓰는 위치추적 방지 시스템까지 깔았을 정도로 조심했는데?!
홧김에 이성이 마비돼서 일을 그르친 내 자신도 멍청했지만 장수연의 입에서 튀어나온 본심이라는 말이 내 심장을 푹 찔렀다.
장수연은 흔들리는 내 눈을 보고는 눈을 치켜뜨고 쫙 펼친 손을 들었다.
짝!
“식당에서 당한 거, 두 배로 갚아줬어. 어때?”
“씨이···발.”
골이 흔들리는 통증에도 눈에 핏발을 세우며 노려보자, 장수연은 가엾다는 얼굴로 살랑거리듯이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어. 우리 집안도 다시 합쳐주고 우리 오빠하고 민재 주머니도 불려주고··· 곧 있으면 보내버릴 우리 영감 주머니도 불려줬구나?”
장수연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이성의 끈이 끊긴 나는 그녀를 당장에라도 씹어 먹을 듯이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이, 이···!”
꽁꽁 묶인 채 잔뜩 얻어터진 몸이 내 말을 안 들었다. 이를 부득부득 갈며 노려보는 와중에도 장수연은 내 눈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왜 너하고 결혼했는지 알아? 우리 가족 사냥개로 쓰려고 결혼한 거였어. 네 약점이 자동차라는 거, 용재 오빠가 알려줘서 더 쉬웠지. 안 그래, 오빠?”
오빠라는 말에 나와 박태진의 시선이 순간 장수연이 바라보는 뒤쪽을 향했다.
“쓸데없는 입방정은.”
장수연이 고개를 돌려 말을 건넨 어둠 속에서 길쭉한 실루엣이 천천히 드러났다. 그 실루엣의 주인공은 장수연의 친오빠이자 신성자동차 사태의 숨겨진 진짜 원흉, 장용재였다.
장용재는 내 턱을 손으로 잡아 올리고 경멸에 찬 눈빛으로 내 눈을 쳐다봤다.
“너무 억울해 하지 마, 매부. 지금껏 신나게 우리 집안 힘 휘둘렀잖아? 가당키나 했을까? 너 따위한테?”
“너 이새끼······.”
“수고했다는 뜻으로 선물을 준비했어.”
“선물?”
“기대해도 좋아.”
장용재는 웃으며 뒤를 돌아보며 경호원들을 보며 날 향해 고갯짓을 했다.
“신성그룹에게 찍혔으니 사는 게 고통이지 않겠어? 이젠 편하게 해줄게. 박태진과 함께 영원히. 흐흐흐.”
음침하게 웃는 장용재에게 장수연이 빈정거렸다.
“오빠, 장하연도 보내줘야지? 걔, 어떡할 거야?”
“글쎄? 그 나이에도 관리 잘해서 먹어줄 만한데··· 카리브 해 보내서 실종처리하고 팔아버리면 되겠지. 지분은 전부 뺏어버리고. 고승주, 이명진이야 쥐뿔도 없으니 트럭으로 밀어버리면 될 걸?”
“야! 이! 개새끼들아!”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장난감 취급하는 두 연놈들을 보면서 고래고래 악을 썼지만 그게 전부였다. 나뿐만 아니라 박태진은 아까부터 피거품을 게워내며 그르륵거렸다. 나도 몸부림을 쳐봤지만 덩치들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장수연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노려보는 날 내려다보며 깔보듯이 말했다.
“넌 내 장난감이었어. 장하연이 가지지 못하게 하고 싶어서 빼앗은 장난감.”
장수연은 이어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내게 보여줬다. 그것을 확인한 내 두 눈이 커졌다. 내 핸드폰, 거기에는 장하연의 연락처가 화면에 뜨고 있었다.
“장수연-!”
장수연은 내 발악이 우스운지 코웃음을 쳤다. 그와 함께 비웃음을 한껏 머금고 말했다.
“어디··· 장하연이 너한테 뭐라고 떠들었는지 들려줄까? 그년 전화 덕분에 알았거든. 네가 어떡할지 말이야.”
장수연은 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음성 메시지 버튼을 눌렀다.
[성민아, 왜 전화 안 받아? 공항으로 가면 안 돼. 수연이가 사람 보내서 그쪽에서 지키고 있어. 빨리 도망쳐. 빨리···!]
울먹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눈이 축축해지고 코끝이 찡해졌다. 왜 이 지경이 되어서야 이 목소리, 나에 대한 감정이 식지 않은 목소리를 들어야 한단 말인가!
“이게 그년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이유야. 다른 이유도 많지만 말이야.”
장수연은 싸늘한 시선을 내게서 거두고 장용재에게 말했다.
“끝내자.”
“오케이.”
장용재가 눈짓을 하자 옆에 있던 경호원 둘이 라텍스 장갑을 꼈고, 다른 놈들은 나와 박태진을 세워서 무릎을 꿇렸다.
“뭐, 뭐하는 짓이야?”
“뭐하긴? 지긋지긋했던 23년 끝내려는 거지. 후훗.”
장수연은 그 말을 끝으로 또각또각 돌아서려다 마지막으로 날 불렀다.
“여보.”
“······.”
“살려 달라고 좀 매달려봐. 재미없게.”
장수연은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날카롭게 웃더니 창고를 나갔다. 라텍스 장갑을 낀 남자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향해 깊이 숙였던 고개를 들고 박태진에게 걸어갔다.
“원망하지 마라. 나도 시켜서 하는 거니까.”
싸늘하게 말한 그 자식이 박태진의 머리와 턱을 잡았다. 설마?
“형!”
목이 비틀린 채로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박태진을 보고 엉엉 울었다. 저렇게 갈 사람이 아닌데!
통곡도 잠시, 내 피부에 전해지는 라텍스의 감촉에 저절로 눈이 질끈 감겼다. 그와 동시에 바짓가랑이가 축축해졌고, 주변에서 낄낄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게 틀어지기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부질없는 바람이 죽음의 공포를 외면하듯 머릿속으로 되뇌어졌다.
그런 내게 사형 집행을 알리는 목소리만 선명하게, 서늘하게 들렸다.
“굿바이.”
우두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