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제221장. 때로는 굴러들어 온 복을 걷어차야 한다.
외교를 책임지고 있는 봉기는 한충을 보고는 입이 귀에 걸렸다. 중원 끝자락인 요동에 처박혀 있어서 매우 골치 아픈 공손도가 스스로 머리를 조아린 것이다.
"참으로 현명한 결정을 하셨소이다. 내가 태자전하께 잘 말씀드려서 마무리를 짓겠소이다."
"고맙습니다. 공손태수께서는 절대 다른 마음이 없으니 여러가지를 참작해주시길 바랍니다."
"물론이오. 먼저 고개를 숙였는데, 모질게 대한다면 예의가 아니지요. 태자전하께서는 절대 그럴 분이 아닙니다."
봉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는 한충을 격려했다. 그리고 그에게 쉴 곳을 마련해주었다. 이제 원매에게 허락만 받으면 끝나는 것이다.
'절대 폐하께 먼저 보고하지 말라고 하셨지? 태자전하께서는 무슨 복안이 계신 걸까?'
원매에게 받은 연통을 생각하며 봉기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이렇게 굴어들어 온 복을 걷어 차겠는가? 아마 지나치게 많은 것을 양보할까 봐 그래신 것이겠지.'
봉기는 결정을 내리자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밖으로 나와 산책을 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랬다. 저녁이 되어서 원매는 경기병을 이끌고 돌아왔다. 고람과 사마구는 예를 올리고 물러났고, 곧 조운이 달려와서 경호대장임무를 수행했다.
원매는 한충을 바로 부르지 않고, 봉기를 먼저 만났다.
"태자전하의 홍복이십니다. 공손도가 제발로 항복해왔습니다."
봉기는 환해진 얼굴로 설명을 하다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원매를 보고는 섬뜩하여 입을 닫았다.
"태자전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혹시 거짓으로 항복하는 것은 아니오? 이상하지 않소. 이제까지 요동에서 스스로 대왕을 칭하며 온갖 허세를 부리던 인간이 갑자기 순해져서 항복하다니요? 이런 부분까지 면밀히 따져 보셔야지요."
"태자전하. 공손도는 태자전하께서 허락하시면 군대부터 줄이고, 기의 감독관이 그곳에 상주하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했습니다. 즉 뛰어난 장수가 군대를 이끌고 그곳에 주둔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믿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좀 더 알아보시오. 나는 믿음이 가지 않소이다. 이것은 반드시 내가 결정해서 폐하께 보고할 테니, 그리 아시고 더 추궁해 보시오."
원매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소로 들어갔다. 봉기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스스로 납작 엎드려서 항복을 청하는데, 오히려 의심해서 내치려는 원매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가자, 원매가 슬쩍 고개를 돌려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봉태사. 미안하지만, 공손도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반드시 독립세력을 유지해야 하오. 반드시! 나는 통일해 놓고, 시궁창같은 현실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소이다!'
원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건 그렇고. 이 싸가지 없는 공손도 녀석은 왜 갑자기 항복을 하고 난리야. 그냥 요동에서 왕노릇이나 하면서 지낼 일이지. 죽일 놈 같으니라고.'
봉기는 치소로 돌아오자, 한충이 서성이다가 그를 급히 반겼다. 봉기는 겸연쩍은 얼굴로 한충의 눈을 피했다. 한충이 눈치채고는 슬며시 입을 열었다.
"봉태사. 잘 안됐습니까?"
"아- 그것이. 나 참. 이걸 어찌 말해야 하나?"
봉기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태자전하께서는 혹시나 공손태수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소이다."
"다른 마음이라니요? 그래서 기의 장수와 군대를 양평에 주둔시킨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군대도 감축시키고요. 이것은 공손태수의 확실한 의지입니다. 거짓이라면 어찌 기의 군대를 양평에 주둔시키겠습니까?"
"허어- 참나."
봉기도 말문이 막혔다. 그가 생각할 때, 공손도의 항복의지는 확실했다. 군사감축이라는 확고한 제안보다 더 분명한 항복의사는 없었다.
한충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봉기에게 매달렸다. 그는 이렇게 매달려서 항복을 받아달라고 애걸할 줄은 몰랐다.
"그럼 태자전하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제가 직접 공손태수의 진심을 전하겠습니다."
봉기는 불타오르는 한충의 의지를 보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봉기의 주선에 의해 한충은 원매에게 말할 기회를 얻었다.
"태자전하. 이것은 공손태수가 기를 따르겠다고 맹세한 죽간입니다."
원매는 이미 죽간 내용을 봉기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다시 떨떠름한 눈을 들어 확인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건 굴러들어 온 복이란 것을. 다만, 공손도가 항복하면 안되니 그것이 문제였다. 그는 거칠게 죽간을 말아 탁자 위에 내려 놓고는 입을 열었다.
"이걸 가지고 어떻게 믿는가? 군대를 주둔시킨다고 했지만, 자네들이 음식에 독이라도 타서 내 병사들이 죽기라도 하면 어쩔거야? 보다 확실한 의지를 보여봐."
"예?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그리고 확실한 의지라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요?"
"그걸 왜 내게 물어. 요동으로 돌아가서 공손태수와 의논해 봐. 어서 가봐. 분명히 말하지만, 조금의 이상한 점이라도 있으면 절대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어."
원매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치소로 들어갔다. 한충은 황당한 얼굴로 서 있다가, 물러났다. 봉기는 착잡한 얼굴로 한충을 배웅하고는 원매를 찾았다. 하지만, 원매는 봉기와의 면담을 거부했다.
이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승상 가후까지 나서서 공손도의 항복을 받아들일 것을 진언했지만, 원매는 요지부동이었다.
'공손도는 믿을 수 없다!'
원매는 이렇게 말하며 모두의 진언을 거부했다.
한충은 배를 타고 요동으로 향했다.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양평에 도착하자, 곧바로 공손도를 찾았다. 공손도는 초조한 얼굴이었다.
"어찌 되었어?"
"저...... 그것이 태자전하께서 거부하셨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자네가 혹시 말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확실하게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정도면 내가 기를 따르겠다는 확실한 의사를 표시한 셈이잖아?"
"더 확실한 의지를 보여 달랍니다."
"그게 뭐야? 뭘 더 보여줘?"
한충도 말이 없었다. 설마 땅이라도 통째로 들어바치고, 공손도는 새로 중원의 어디 작은 땅을 받아 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항복하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들은 한숨을 내쉬며 이것저것 다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리저리 조건을 맞추고는 한충은 다시 업성으로 향했다.
한달만에 다시 방문하는 셈이었다.
11월이라 그런지 매우 추웠다. 그는 곧바로 봉기를 찾았다. 봉기는 한충으로부터 공손도의 새로운 제안을 받아들었지만, 좀처럼 좋은 대답을 줄 수 없었다. 원매의 의지가 너무나도 확고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태자전하를 뵙시다. 미안하지만, 나도 뭐라 말씀을 못 드리겠소."
봉기가 앞장 섰고, 한충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따랐다.
원매는 공손도의 친필이 적힌 죽간을 꼼꼼하게 읽고는 화난 얼굴로 죽간을 집어 던졌다. 분명한 외교 결례였다. 한충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봉기는 난감한 상황에 고개를 돌렸다.
"뭐하자는 거야? 확실하게 의사를 표현하라고 했잖아!"
"태자전하. 이 정도면 확실한 의사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토 절반을 기에 넘기고, 병사는 치안을 유지하는 수준인 1만으로 떨어뜨릴 계획입니다. 또한, 치소인 양평 인근에 기의 병력 2만까지 주둔을 허락했습니다. 군량까지 모두 지원하고요. 그리고 장자 공손강을 업성에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더 하란 말씀입니까?"
"네놈의 태도가 마음에 안들어!"
원매가 화를 버럭내자, 한충은 급히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이걸로 안 돼! 영토를 모두 포기하고, 공손씨는 한 명도 예외 없이 대군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산다. 어떤 특혜도 없을 것이니 그리 알아!"
대군이라면 온통 사막과 초원이고, 이민족의 침입이 잦은 최악의 땅이었다. 한충이 기가막혀 다시 물었다.
"공손태수를 대군태수로 임명하는 것입니까?"
"태수는 무슨. 그냥 거기 땅을 조금 줄 테니 쥐 죽은 듯이 살아.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치야."
한충이 급히 엎드려 눈물을 쏟았다.
"태자전하. 너무 가혹한 처사입니다. 저희는 선의로 귀부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을 빼앗는 경우는 없습니다. 부디 선처를 베풀어 주십시오."
"돌아가! 내가 할 말은 다했어."
조금의 틈도 주지않는 원매에게 한충이 힘없이 물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토벌하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강동공략준비에도 바빠. 그런 허접한 곳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 그냥 요동에서 쥐죽은듯이 살아. 알겠어?"
한충은 예를 올리고는 물러났다. 봉기가 한마디 거들려고 했지만, 원매가 단호하게 거부했다.
한충은 돌아가는 배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이번 일은 생각할 수록 괴이했다. 그가 들은 원매의 성정은 합리적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 겪어보니 어거지도 이런 어거지가 없었다.
'도대체 어쩌란 거야? 가만, 요동에서 쥐죽은듯이 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그는 곰곰히 생각했지만, 원매의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려웠다. 다만, 원매가 당분간은 요동을 공략할 뜻이 없음이 분명했다.
그렇게 스스로 품에 안겨오는 요동을 원매는 발로 찼다.
원매가 공손도의 귀부를 거부한 것은 원소의 귀에 까지 들어갔다. 그는 봉기를 불러 일의 전모를 파악하고는 의아함을 떨치지 못했다.
'매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처리했을까?'
그는 원매방식이 납득되지 않았지만, 그를 부르지 않았다. 어차피 몇 년후면 원매가 기를 다스려야 할 텐데, 자신이 자꾸 그의 일에 관여하여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또한, 공손도에 관한 일은 원매에게 위임하지 않았던가?
원소는 그저 쓴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원매는 치소에서 간단하게 반주를 하고 있었다.
"태자전하. 많이 괴롭습니까?"
제갈량이 술을 따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매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한잔 반으라며 잔을 건넸다. 제갈량은 공손히 술을 받고는 입에 털어 넣었다. 말없이 술 몇 순배가 돈 후에, 원매가 입을 열었다.
"자네도 내가 바보짓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글쎄요. 태자전하만의 말 못 할 사정이 있으셨겠지요. 다만, 드러난 성과로만 본다면 현명하지 못 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라도 이해해주니 고맙군."
제갈량은 은근히 그 사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길 기대했지만, 원매는 그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일 배우는 것은 어때? 힘들지 않아?"
"할만 합니다. 천재중의 천재 이 제갈량이 이 정도에 힘들겠습니까?"
제갈량이 다소 과장되게 대답했지만, 원매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마음도 무거웠으리라.
"중달(사마의)은 잘 하고 있는가?"
"한참 혼이 나고 있지요. 두상서(두기)의 요구를 맞추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상당히 영특한 친구라서 빠르게 적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승부욕도 강하고 좀 우려스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 자를 호조에 계속 두는 것이 좀 불안합니다."
"걱정말아. 내게 복안이 있어."
원매의 입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사마의를 다룰 자신이 있었다. 역사상의 조예는 멍청하게 당했을지 몰라도, 그는 다를 것이라 확신했다. 그는 술을 한잔 들이켰다.
'공손도가 이쯤에서 내 뜻을 알고 얌전히 있었으면 좋겠는데.'
원매는 제갈량과 국정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