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제219장. 동한東漢.
강동 말릉성.
조조가 멸망하면서 중원이 기冀의 품으로 들어갔고, 한漢은 길었던 여정을 여기서 끝냈다. 한漢이 없어졌지만, 아직도 추종하는 세력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들은 중원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했지만, 원매가 가혹하게 토벌하면서 더는 중원에 발을 붙이기 힘들었고 이에 많은 지식인들과 호족들이 강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특히 조조의 부하중 지방관리였거나, 수춘성 함락당시 그곳에 없었던 인재들이 대거 강동을 택했다. 종요, 순연을 필두로 하여 화흠, 한호, 전만, 유엽등이었다. 원매진영으로 왔더라도 충분히 대접받을 거물들이었지만, 그들은 끝내 원매를 버리고 장강을 건넜다.
주유는 그들을 모두 끌어 안았다. 주유가 조조에게 밀렸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신하의 질적차이가 컸다. 장소, 장굉, 엄준, 우번등이 뛰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순욱, 곽가, 정욱, 종요, 진군에 비하면 아무래도 경험이나 능력에서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항상 이런 부분을 아쉬워하던 차에, 스스로 이들이 귀부해오자 주유는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종요, 순연, 화흠, 유엽에게 별가를 내렸고, 한호에게는 내정부분을 맡겼다. 전위아들 전만은 장수로 임명하는 등 그들을 끌어안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주군. 지금 저 역적 원소는 아들 원매를 익주로 보냈고, 그곳에서는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워낙 전력의 차가 큰 만큼 머지 않아 원매가 승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강동이 익주에서 멀었기에 아직 원매의 승전소식이 이곳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주유는 순연의 진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리 짐작했소. 하여 수군훈련을 강화시키면서 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소이다."
"물론 잘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지금은 군사력뿐만 아니라 대의명분을 앞세워야 합니다. 기는 황제의 명으로 전쟁을 할 텐데, 주군께서 한의 거기장군의 명분으로 싸울 수는 없습니다. 이미 원매 역적놈에 의해서 한이 무너졌고요."
주유는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계속 말씀해 보시오."
"영제의 삼녀이신 만년공주가 계십니다. 그분의 아들인 유형이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매우 총명합니다. 마침 이곳 강동에 계시니 차기 황제로 모셔야 합니다. 그후, 주군께서 승상에 올라 황제를 보위하게 된다면 한의 정통성을 다시 잇게 되니, 결코 기에게 대의명분에서 밀리지 않게 됩니다."
이들은 주유에게 조조의 역할을 대신해 달라고 권면하고 있었다. 주유는 실망하여 말이 없었다. 손책을 제치고 강동, 교주를 차지했다. 이제는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생판 얼굴도 모르는 어린애를 데려다가 황제로 앉혀놓고 굽신거리고 싶지 않았다. 주유의 뜨뜻미지근한 표정에 종요가 진언을 올렸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어서 명을 내리시어 모셔와야 합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주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 종요와 순연은 아쉬운 표정으로 주유치소를 물러났다. 곧바로 종요의 치소로 자리를 옮긴 그들은 차를 마시며 대책을 강구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니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주군의 인품과 그의 가문내력을 믿고 이리 권했는데, 아무래도 마음 속에 다른 생각을 품고 계신듯 합니다."
"으음-"
종요는 순연이 말한 다른 생각이 무엇인지를 깨닫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낮게 탄식을 터트렸다.
"모두가 도둑놈 천지로구나."
순연이 급히 종요의 입을 막고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다행이 목소리가 작았기에 들은 이가 없는 듯했다.
"말씀을 가려서 하셔야지요. 종별가의 한마디에 강동으로 피신해 온 모든 이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종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생각해 볼 때, 주군께서 비록 다른 생각을 하셨더라도 결코 우리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할 것입니다. 전투에서 대의명분은 매우 중요하니까요. 지금 그것을 얻는 방법을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여 한을 다시 살리는 길 뿐입니다.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면 많은 이들이 떨어져 나갈 것이니 절대 못할 것입니다."
순연이 힘주어 말하자 종요도 동의했다.
"계속 그것을 주창합시다. 시간이 없어요. 한의 신하된 자로서 어찌 기가 날뛰는 것을 두고 보란 말이오? 내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그럴 수 없소이다. 절대로!"
"저도 그렇습니다. 모레 있을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시지요. 저쪽의 왕낭, 우번등도 협조적으로 나올 것입니다."
종요는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어떡하든 한을 다시 부활시키고 싶었다. 그게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주유처소.
주유는 거칠게 폭음했다. 그간 냉정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이며 절제된 행동을 했던 그에게는 낯선 모습이었다.
'제대로 급소를 찔렸어!'
주유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많이 마셔 취기가 올랐지만, 정신은 온전했다.
'어쩐다? 저들의 말은 결국 황제를 모시면서 내게 조조의 역할을 바라고 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과연 내게 어떤 이익이 있을까? 그저 어린애 뒷치닥거리나 하다가 끝나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내가 황위에 올라?'
'아니지. 아니야. 그러면 많은 신하들이 내 곁을 떠날거야. 한명이 아쉬운데 그럴 수는 없어. 그럼 어찌한다?'
주유는 고민에 고민을 이어갔지만, 좀처럼 답을 찾지 못했다. 방안을 찾지못해 답답해지자, 그는 술잔을 집어 던졌다. 그만큼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일단 자세를 낮추어 황제를 모시다가 세력이 커지면 그때 가서 ....... 좋아. 대의명분부터 확보한다. 그리고 나중에 실리를 찾는다. 어차피 실권을 내가 쥐고 있으니까. 뛰어난 신하들이 들어온 것은 좋은데, 결국 이런 문제를 야기하는군.'
그는 답답한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서성였다.
'아냐. 그렇게 나쁘게 볼 것만은 없어. 명목상으로 황제를 세워두면 그들의 충성을 이끌어 낼 수 있어. 그래. 원매를 이기지 못하더라도 버텨서 기와 한이 공존할 수만 있다면 ...... '
주유는 결심이 서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비록 국력에서 기에 밀리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장강이라는 천험의 요새를 바탕으로 어떡하든 버텨서 자신의 제국을 이루고 싶은 것이 주유의 솔직한 야망이었다.
주유치소.
오늘은 대신들이 모여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조조의 신하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주유의 신하들과 대립하는 모습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팽팽한 긴장감이 실내를 지배하고 있었다. 여느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지만, 주유는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순연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주군. 역적 원소에 의해 수춘성에 계시던 황제께서 명운을 달리하셨습니다. 조속히 새로운 황제를 모셔서 끊어진 한의 명맥을 다시 이어야 합니다. 주군께서도 한의 신하인데, 어찌 모두 손을 놓고 계십니까?"
종요, 유엽이 강하게 찬성하고 나선 가운데, 우번이 찬동하고 나섰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기의 원소가 황제라니요?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입니다. 마침 강동으로 만년공주의 자제이신 유형이 피신해 왔으니 그를 황제로 모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번까지 나서며 찬성하자, 신하들은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차라리 기에 항복할 마음을 품고 있었던 장소만이 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장소도 소리내어 반대하고 싶었지만, 대부분 찬성을 하는 마당에 반대표명이 쉽지 않았다.
주유는 신하들을 둘러보다 장소와 눈이 마주쳤다.
"장자포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인구나 경제력, 군사력 어느 한 부분에서도 기를 따라잡기 어렵습니다. 과연 한을 부흥시키는 것으로 해결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장자포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겝니까? 지금 역적 원소를 두둔하시는 거요? 역적에 의해 황제께서 비명에 돌아가셨으니, 어서 차기 황제를 옹립하여 한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이는 천명인데, 지금에서 성공여부를 따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때로는 성사여부를 알 수 없더라도 해야하는 일이 있는데, 지금이 그와 같습니다."
이번에는 왕낭이 당당하게 반문했다. 어차피 대의명분으로는 그들의 논리를 반박하기 어려웠던 장소는 짧은 탄식을 터트리며 입을 다물었다. 이미 치소안의 분위기는 넘어간 상태였다.
주유는 다른 신하들의 의견도 일일이 청취했다. 정보나 태사자를 비롯한 무장들은 대의명분을 앞세운 문신들에게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어려워 반대를 표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쩌면 주유가 황제가 되기를 바랬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입밖으로 쏟아내지 않았으니 알기는 어려웠다.
주유는 모두의 의견을 청취하고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신하들이 조용히 그의 입만 바라보고 있을 때, 주유가 의자를 치고 일어나며 결단을 내렸다.
"좋소이다. 내가 그동안 아둔하여 고민이 많았소. 하지만, 대신들의 의견을 듣고보니, 그 뜻이 참으로 옳소이다. 당장 만년공주의 자제분을 모셔서 황제로 추대하겠소이다."
"현명한 결단이십니다."
종요가 주유의 결단을 지지했고, 뒤를 이어 대신들이 그의 결정을 환영했다. 주유가 결단을 내리자 만년공주의 아들인 유형을 황제로 옹립하는 일은 일사분란하게 이어졌다.
말릉성안에 방치되었던 손책의 치소를 개조하여 황궁으로 만들었다. 황궁으로 보기에는 조잡하고 아쉬운 면이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누구도 불만을 꺼내지 않았다.
204년 10월. 건신 4년.
주유는 3개월의 준비끝에 말릉성에 황도를 세웠고, 유형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 국호는 동한東漢이라 칭했으며, 연호는 신흥新興이라 명명했다.
새로운 나라가 건국되자, 곳간을 열어 백성들에게 재물과 곡식을 나누어 주어 황제부터 백성까지 모두 기뻐하였다.
주유는 곧바로 황제의 명으로 승상에 올랐다. 그는 곧바로 승상부를 설치하고, 기존의 대신들을 한漢의 관직으로 대체하여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업성. 황궁. 원매치소.
원매는 가후에게 보고를 받으며 심각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태자전하.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조조를 멸망시키고, 익주로 가셔서 유비와 유장을 물리친 것은 대단한 업적이었습니다. 다만, 주유를 처리하는 것을 뒤로 미뤘는데 이런 황당한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그렇소. 그런데, 이제 와서 거꾸로 되짚어 보니 주유를 너무 얕봤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그런 것도 있지만, 우리가 수군이 약해서 어쩔 수 없던 측면도 있습니다. 적어도 내년까지는 준비해야 그를 상대할 수 있습니다. 주유가 영리하게 처신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도 그렇지. 동한이라? 기가 막히는군. 내가 수춘성에서 황제의 목을 베서 한을 끊은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동한이란 말인가? 황제 유형은 도대체 누구요?"
"전황제(헌제 유협)의 누이 만년공주의 자제 유형이라고 합니다. 이제 겨우 연치가 9세입니다."
"하하- 이것 봐라? 주유 이놈 머리 쓰는 게 보통이 아니네. 9살이면 완전히 꼭두각시 아니겠는가? 그 나이에 무슨 정치를 하겠어."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주유 위에 황제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주유는 이를 통해 대의명분을 얻었지만, 불편한 것이 마음 한쪽에 있을 것입니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을 수록 신경쓸게 많아질 테니까요."
"그래도 황제로 인해 얻는게 많으니 그런 수를 선택했겠지요?"
"물론입니다. 이걸로 인해 강동, 교주는 하나로 뭉쳐질테고, 중원에서 한을 따르는 무리들이 그를 추종할 것입니다. 많은 이득이지요.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만 합니다. 앞으로 중원의 호족들에 대해서 감시를 강화하겠습니다."
"그리하시오. 문제가 있으면 즉각 보고하시오.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놈이 있다면 가만 두지 않겠어. 감히 기가 있는데 한을 부흥시켜? 이 쳐죽일 놈들 같으니라고."
"태자전하. 폐하께는 ....... "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 가승상께서는 업무에 전념해 주시오."
원매는 가후의 말을 끊었다. 원소가 병이 깊어 업무를 보는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사실상 원매가 독대를 통해서 대부분의 업무를 보고하고 처리했다. 물론 원매가 원정을 나간다면 그때는 가후, 전풍등이 나누어 보고하며 일을 처리했다.
한이 동한으로 부활하면서 중원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