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
제216장. 마음을 열고 협상에 임하다.
"저놈이 어디다 대고 협박이야? 죽일 놈 같으니라고."
원매는 비관을 대놓고 힐난했다. 그가 지휘소를 나간 지 얼마 안되었기에 들릴 수도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태자전하. 너무 강하게 나가는 것 아닙니까? 조조, 유비, 방통과 협상할 때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당연하지. 협상은 사람에 따라 틀려지는거야. 유장처럼 욕심많고 무지막지한 놈에게는 더 무지막지하게 대해야 해. 그래야 통한다고."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고생하게. 계속 첩보를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보를 만들어서 보고해."
"예. 태자전하."
"참, 장수 고패는 곡주로 보냈는가?"
"문도독을 보좌하여 보병을 이끌 장수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예. 어제 보냈습니다."
"알겠네. 수고했어."
서서가 물러나자, 기다렸다는듯이 법정이 들어왔다. 법정이 반짝이는 눈을 들어 인사를 올렸다.
[법정(28)] 지력:94, 정치력:80, 통솔력:78
역시 좋다. 다만, 대인관계가 극단적이고 재물욕심이 많은 것이 흠이었다.
"태자전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법정, 효직이라 합니다."
법정은 원매를 보자 마자 엎드려 절하며 인사를 올렸다. 원매는 법정을 일으켰다.
"듣던대로 아주 영특하게 생겼어. 그래 촉군 북쪽의 현령들을 설득하러 다녀왔다고?"
"그렇습니다. 다행히 성과가 있었습니다. 비현현령을 설득했습니다. 그는 태자전하를 따를 것입니다."
"좋은 일이야. 비현이면 어떤 가치가 있는가?"
"촉군은 풍요로운 평야가 있는 남동쪽과 산지가 있는 북서쪽으로 구분되는데, 비현은 평야의 북쪽에 위치하여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즉 비현이 태자전하의 손에 넘어 옴으로서 유장은 북서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잃어 버린 셈이 됩니다."
"자네 정말 큰일을 했군. 유장의 힘이 절반으로 줄었어. 어서 빨리 이곳을 마무리짓고 돌아갔으면 좋겠군."
"오다가 서부어사에게 들었는데, 비관이 다녀갔다고 했는데, 혹시 항복을 타진하러 온 것은 아닙니까?"
"맞아. 하지만, 항복한다는 놈들이 무슨 욕심이 그리 많은지. 나원 참. 글쎄 익주자사를 달라지 않는가? 그것도 10년 보장으로. 기가 차서 내가 호통을 쳐서 돌려보냈지."
"잘하셨습니다. 원래 정신을 못 차리는 놈들에게는 몽둥이가 약입니다."
"그럼 그곳으로 군대를 보내야겠군."
"지금 성도를 포위하고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유장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으로 만족하시면 됩니다."
"좋아. 나는 공성전에 충실하지. 그 전에 항복했으면 좋겠는데."
"유장이 욕심은 많지만, 겁이 많은 자입니다. 익주에서 왕노릇하다보니 진짜로 왕인줄 알고 그동안 착각을 하며 센 척했던 겁니다. 조만간 항복할 겁니다."
"알겠네. 그런 말을 해주니 고맙군. 고생했으니 잠시 쉬고, 이곳에 머물면서 내게 익주에 대해서 많은 조언을 해주게."
"예. 태자전하. 옷을 갈아입고, 잠시 쉬었다가 오겠습니다."
법정이 물러나자, 원매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이 무식한 유장아. 계책을 낼 수 있는 인재인 법정, 장송을 몰라보다니. 쯧쯧-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성도 유장치소.
유장은 비관으로부터 원매의 제안사항을 전해 듣고는 얼굴이 하얘졌다. 비관은 물건을 집어 던지고 화를 내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자 당황스러웠다. 말없이 꿍하던 유장이 입을 열었다.
"조금의 여지도 없던가?"
"예. 아주 단호했습니다. 아주 건방진 놈이었습니다."
"아니 협상을 어찌했길래 원매가 그리 화를 낸거야? 제대로 협상한 거 맞아? 응?"
비관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토록 당당하던 유장이 궁지에 몰리자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이 주군의 진짜 모습이란 말인가? 예전에 법정이란 놈이 주군이 소심하다고 해서 혼을 내준적이 있거늘. 그놈이 나보다 사람보는 눈이 빼어나단 말인가?'
비관이 눈을 뒤룩뒤룩 굴리다가 시험을 해보기로 했다.
"주군께서 시키신대로 원매에게 강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불같이 화를 내면서 내 목을 베라고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더 이상 저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비관이 언성을 높여 따지듯 물었다. 평소의 그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언사였다. 작심하고 발언은 했지만, 혹시라도 유장 이 미친 놈이 화를 내면 어쩌나 걱정이 들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자네가 열심히 한 건 알아....... 아쉬워서 그러지..... 어쩐다? 하북은 가기 싫은데......"
유장은 혼자 중얼중얼거렸다. 그의 소심한 본 모습에 비관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비관은 배에 힘을 주고 다시 입을 열었다.
"주군. 내일 다시 가서 협상을 해보겠습니다. 익주자사는 힘들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최대한 많은 성과를 얻어내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하네."
비관은 예를 올리고 밖으로 나오면서 찌푸린 얼굴로 하늘을 바라 보았다. 왜 유장이 실패했는지를 확연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성정이었으니 제대로 기회를 못 살린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런 모습이었다면 신하들도 맞췄을 테지만, 거짓 모습을 보였으니 신하들도 갈팡질팡한 것이다. 참으로 아쉬웠다.
"휴- 이제는 항복을 하고 주군께 최대한 챙겨드리는 것만 남았는데, 그게 쉽지 않구나. 하북으로 가야한단 말인가?"
그가 고개를 흔들자, 장송이 다가왔다.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협상이 잘 되지 않았습니까?"
"자네가 어찌 알았는가?"
"어제 성을 은밀히 나갔다 오시는 것을 봤습니다. 비별가께서 원매군영을 방문했다면 협상말고 뭐가 있겠습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장송을 보며, 비관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키 작고 못 생긴 놈. 명문인 장씨가문의 아들이기에 이 자리에 오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이놈이 머리 꼭대기에서 놀고 있었던 것이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무리한 요구를 해서 협상이 틀어진 것은 아닙니까?"
비관은 이내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치고는 냉정하게 장송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어리숙하게 연기하고 있었던 것인가?"
"하하하하- 연기를 한게 아니고, 비별가를 비롯한 모든 관리들이 제 겉모습만 보고 그리 판단한게 아닙니까? 솔직히 저를 알아보려고 조금의 생각이라도 해보셨습니까?"
"그렇군. 내가 실수를 했어.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면 용서하시게."
비관은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장송의 눈속 깊은 곳에서는 질투의 불꽃이 일렁였다. 편협한 성정을 가진 그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대인기질이 비관에게 있었던 것이다.
"휴- 차라리 비별가께서 이곳의 주인이었다면 ........ 천하는 비별가에게 넘어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유연한 허리가 참으로 부럽군요."
고변하면 대역죄가 될 수 있는 말이 장송의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비관은 꼬투리를 잡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좁히더니 낮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네 태자전하와 줄을 대고 있는가?"
역시 비관이었다. 장송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가 다시 표정을 원래대로 돌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비관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랬구만. 그랬어. 그럼 법정도 중간에 소식이 끊어졌던데, 태자전하의 품으로 갔는가?"
장송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비관은 하늘을 보며 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원매가 집요하게 내부에서부터 유장을 무너뜨리고 있었는데, 다 무너지고 나서야 눈치를 챈 것이다.
"그리 놀랄 필요 없어. 어제 협상을 하러 갔는데, 느낌이 이상하더라고. 마치 내 생각을 읽는 것 같았어. 그게 의문이었는데,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의문이 풀어졌네. 그래서 넘겨 짚어 본거야."
"저를 고변하시겠습니까?"
"고변? 후후후후- 이미 다 무너졌는데, 무슨 고변인가? 차 한 잔 주시겠는가? 영창군 특산의 차맛이 그립구만."
"가시지요. 이거 정말 비싸게 주고 산건데, 비별가니 특별히 드리는 겁니다."
"고맙네."
그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장송의 치소로 향했다. 서로의 흉금을 털어 놓자,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비관은 장송의 해박함과 예리한 직관력에 놀랐고, 장송은 비관의 대인다운 풍모에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앞으로 어찌 했으면 좋겠는가? 그래도 주군이니 마지막은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 않네. 가능하다면 이곳의 모든 관리나, 장병들이 큰 손해를 보지 않고, 일에 매진했으면 좋겠네."
"왜 비별가 자신에 대해서는 말이 없습니까? 챙기고자 한다면 많은 것을 얻을 텐데요."
"그렇게 살기 싫으이."
비관은 차를 홀짝 마시고는 선한 웃음을 지었다.
"바보같지? 후후후- 어쩌겠나? 나는 욕심이 별로 없다네. 위선이 아니라 진짜로 별로 없어. 태어날 때부터 갑부였기에 그런지도 몰라."
"성정이겠지요. 원래 있는 놈들이 더 지독한 법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이제 자네 생각을 말해 보시게. 어찌 하면 좋겠는가?"
"익주는 안 될 것이 분명합니다. 하북이 싫다고 하셨으니, 형주로 유도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나마 익주에 가깝고 날씨도 온화한 지역입니다."
"그래. 그게 좋겠어. 그리고 이곳 관리들을 대부분 보존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가능할까?"
"가능할 것입니다. 대부분 점령지역에서 문제가 되는 일부만 솎아내고 대부분은 그대로 유임시켰습니다. 그건 그렇고, 주군께서 형주로 가신다면, 비별가는 어쩌겠습니까?"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남은 여생을 조용히 보낼 것이네."
빈말이 아닌 진심을 꺼내 놓은 비관을 보며 장송은 감탄했다. 예전부터 비관의 넉넉한 인품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생각 이상으로 넓은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제가 태자전하께 연통을 써드릴 테니 그것을 가지고 다시 한번 가보십시오. 그전보다는 협상이 수월할 것입니다."
"잘 부탁하겠네."
비관은 장송에게 다시 머리를 숙였다. 잠시후, 비관은 장송이 건네준 죽간을 품에 넣고는 유장의 허락을 받아 원매에게로 향했다.
"내 제안을 생각해 보셨는가?"
원매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비관에게 앉을 자리를 권했다. 비관은 공손하게 예를 표하고는 품에서 죽간을 꺼냈다.
"장별가가 이것을 태자전하께 바친다면 협상이 조금 수월해질 것이라 했습니다."
원매는 매우 놀란듯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죽간을 풀지 않고, 비관을 노려보았다.
"설마 장송을 어찌한 것은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면 내 분노를 피하지 못할 것이야."
"절대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제가 도움을 구했고, 장별가가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
원매는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소도를 이용하여 매듭을 풀고는 죽간을 펼쳤다. 꼼꼼하게 읽은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북을 도저히 못 따라오겠다. 이건가?"
"이것 하나만 양보해 주십시오. 익주를 떠나는 것이 매우 두려운가 봅니다."
"형주로 가는 것도 익주를 떠나는 것이야."
"그래도 하북보다는 가깝고, 날씨가 온화하지 않습니까?"
원매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간 유장이 보여준 행동을 본다면 꽤나 호전적이었기 때문에, 가까이에 두고 감시하고 싶었다. 그것을 눈치챈 비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주군의 호전적인 성격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익주에 홀로 자리를 잡고 어린 나이에 일인자가 되고 보니, 편협해지신듯 합니다. 요즘에 보이는 모습은 그런 강한 모습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형주로 간다면 조용히 지내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좋아. 그리하지. 형주 장사군 태수로 임명하겠네. 땅도 주고 평생 먹을 것 걱정없이 살게 해주겠어."
"감사합니다. 그럼 돌아가서 주군께 보고드리겠습니다."
비관이 절을 올리고 돌아가자, 서서가 진언을 올렸다.
"잘 하셨습니다. 법정의 의견과 비관의 말이 일치합니다. 그런 성정이라면 태수로 조용히 살 것입니다. 유비와 조조처럼 바닥에 떨어질 수록 강하게 분발하는 유형이 아니니 한시름 놓아도 될 것입니다."
원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