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제215장. 팽팽한 대립.
성도 유장치소.
어지러이 나뒹구는 술병들을 피하여 비관은 조심스럽게 유장에게 다가갔다.
덥수룩한 수염. 까칠한 피부. 툭 튀어나온 광대뼈.
치소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자는 놀랍게도 유장이었다.
호기롭게 중원 출사표를 던지며 한수까지 끌어 안았던 그였지만, 이제는 익주도 거의 다 빼앗기고 촉군 하나 남아 겨우 맹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군. 속은 어떠십니까?"
"응? 왔는가?"
그는 괜찮다고 손을 흔들다가 이물질이 묻어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옷에 슥슥- 문질러서 닦았다.
"한잔 할 텐가?"
"예. 주신다면 받겠습니다."
쪼르륵-
비관은 조심스럽게 받아 입에 털어 넣었다. 마음이 심란해서인지 술이 매우 썼다.
"쓰지? 흐흐흐-"
유장을 술병을 입에 대고는 다시 벌컥 벌컥 마셨다.
"후아- 내가 말이야. 요새 많은 생각을 했어. 왜 이렇게 됐을까? 하고 말이야. 처음에는 너무 늦게 중원으로 나섰기 때문인가? 이렇게 생각했지. 왜냐하면 그때 벌써 원가가 중원의 최고세력으로 우뚝 서 있을 때니까 늦긴 했거든. 그래서 왜 빨리 시작했지 못했나? 하고 자책했어."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바보같지. 지나간 과거에 한탄이나 하고."
"그렇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무슨 생각이 드는 줄 알아. 그냥 내가 못나서 진거야. 사실 눈치보지 않고 과감하게 형주로 치고 들어가서 주도권을 잡았어야 했어. 그걸 못하고 정치를 한답시고 눈치만 보다가 망한거야. 내가 바보인거지."
스스로를 자책하는 유장을 보며 비관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생각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렇게 위로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유비가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익주남부도 원매의 손아귀로 넘어갔고요."
"햐- 원매 그 자식 기가 막힌 놈이네. 번갯불에 콩 구워 먹을 놈이야. 그럼 이제 그놈의 칼끝이 이곳으로 향한다 이거지?"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빌어먹을! 겨우 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것도 이제는 끝이로구나."
유장은 탄식을 터트리더니 바닥에서 벌떡 일어서서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매만졌고, 옷을 다듬자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예전처럼 일신에서 위엄이 넘쳐 흘렀다.
"어찌했으면 좋겠어? 솔직한 자네 생각을 말해봐."
"더 버티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지척인 광도현에 원매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익주 남부에서 원매가 직접 정예군을 이끌고 올라올 텐데, 이들과 야전을 벌인다면 기병에서 절대 열세이기 때문에 이길 수 없습니다. 또한, 수성전을 한다면 시간을 벌겠지만, 장기전으로 갔을 때 결국 무너지게 됩니다."
"성도의 식량으로 얼마나 버티겠는가?"
"백성들을 모두 내보낸다면 2만의 병사가 남게 되는데, 그리된다면 1년 정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럼 원매가 1년이든 2년이든 포위하고 버티면 항복해야 한다. 이거네?"
비관은 침묵으로 유장의 말에 긍정표시했다.
"그런데 말이야. 조조도 유비도 죽었어. 원매 그 자식이 그 정도로 잔인한 놈인데, 나도 죽일거 아냐? 땅 바치고 목숨까지 바치면 얼마나 억울해. 뭔가 보상을 받아야지."
노골적인 표현에 비관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폈다.
"제가 협상을 해보겠습니다. 지루한 협상이 될 수도 있고, 빠르게 끝이 날 수도 있습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일단 해봐. 나도 호락호락하게 물러나지 않아."
"예. 주군."
비관은 어두운 표정으로 치소를 물러나왔다. 궁지로 몰렸는데, 유장은 많은 것을 챙기려 하고 있다. 순탄치 않은 협상이 될 것임은 자명했다. 어두운 표정으로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걷는 비관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비별가 근심이 많아 보입니다."
"장별가셨구만."
비관이 발길을 멈추고 돌아보자, 장송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비관이 훈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 눈에도 내가 그리 보였는가?"
"아마 성안의 모든 사람의 눈에 그리 비쳤을 것입니다. 비별가께서 마음고생하신다는 것을 모르면서 어찌 성안의 관리라 하겠습니까?"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치켜세우는가?"
"진정한 주군의 충신이기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시간이 되면 잠시 제 치소로 모셨으면 합니다."
비관은 장송이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고는 장송을 따라 나섰다. 그리 멀지 않았다. 반각(7분)도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장송은 조심스럽게 찻물을 우려내어 따랐다. 감미로운 향이 비관의 코끝을 자극했다.
"좋은 차로군. 영창군에서 가져온 것인가?"
"알고 계셨군요. 이것은 영창군에서도 만족의 특산물입니다. 정말 소량밖에 생산되지 않는 일등급 차입니다. 특히 향이 일품입니다."
"그래. 아주 좋아. 이곳에서 이 귀한 것을 맛볼 줄이야."
비관은 방금 전의 어두운 표정을 날려버리고 진정으로 즐거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한동안 차맛을 음미하던 비관은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 놓았다.
"정말 고맙네. 덕분에 근심걱정이 날아간 것 같아. 참, 할 이야기가 있다 하지 않았는가?"
"사실 차를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구실을 만든 것이고요. 주군께서 요즘 술을 많이 드시는데, 보좌하는 비별가께서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휴- 힘들어. 협상을 해야 할 텐데. 쉽지 않군."
"협상이요?"
비관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장송이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하자, 자신도 모르게 툭 튀어 나왔던 것이다.
비관은 다른 방향으로 말을 돌리며 더는 그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장송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치소를 벗어났다. 허리를 깊숙히 숙였던 장송은 눈을 반짝이며 허리를 폈다.
"어려운 협상이라? 그게 무엇일까?"
그는 여러가지 상황을 꿰맞췄고, 한가지 중요한 정보를 도출했다.
"아마도 유장이 협상을 명령했을 것이고, 많은 것을 요구했겠지. 그 욕심 많은 놈이 순순히 물러나겠는가? 분명해."
그의 명석한 두뇌는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했다. 곧바로 얇은 비단에 작은 글씨로 촘촘히 적고는 옷 속에 집어 넣었다.
"부르셨습니까?"
"장집사. 이것은 서쪽으로 보낼 물건이야."
장집사는 순간 눈을 번뜩였다. 서쪽은 기를 뜻하는 그들만의 은어였다.
"알겠습니다. 정확하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의복을 받아들고는 물러났다. 이후 상인 조직을 통하여 성밖으로 옷이 흘러 나왔고, 이는 광도현에 있던 서서에게 전달되었다. 서서는 재빨리 옷을 훑어 보고는 조심스럽게 칼로 뜯었다.
장송이 작성한 비단천이 나오자 그의 얼굴은 밝아졌다. 그는 글을 다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서서는 빠르게 원매에게로 향했다. 원매는 이미 며칠전에 이곳에 도착한 상태였다.
"서부어사. 얼굴이 밝은 것을 보니 뭔가 있구만."
"예. 성도에서 연통이 왔습니다."
"그럼. 장송이 보낸 것이겠군. 그래 어떤 내용인가?"
"유장이 협상할 의지를 밝혔습니다. 조만간 비관이 이곳을 방문할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이군. 그럼 그들이 바라는 것은 알아냈는가?"
"아무래도 유장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자세한 내막은 파악해내지 못했습니다."
"안타깝군. 아니지. 아니야.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정보를 얻은 셈이야."
"자네가 추론해 보게. 유장이 무엇을 요구할까?"
"유장은 욕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꽤나 과격한 인물이고요. 솔직한 제 마음으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거했으면 좋겠습니다."
원매는 고개를 흔들었다.
"조조, 유비를 빼면 유장은 영웅축에 끼이지 못해. 그냥 성질 더러운 놈 정도에 불과하지."
"익주남부의 소식을 들었다면 익주자사직을 요구할 가능성이 큽니다. 군권을 빼앗은 후, 통치만 맡기는 방식으로 한다면......"
"그건 안 돼!"
원매가 서서의 말을 중간에서 끊고는 단호하게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유장을 죽일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익주자사를 줄 생각도 없어. 적어도 하북으로 끌고갈 생각이야. 그곳에서 태수직을 달라면 주지. 중앙의 관직을 요구하면 줄 수도 있고.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최대치야. 만약 저놈이 욕심을 부려서 협상이 틀어진다면 성을 에워싸고 공성전을 벌이는 수밖에 없어."
그제야 서서는 원매의 뜻을 알아차렸다. 유장을 죽일려고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분수도 모르고 날뛴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끝을 볼 생각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문제점은 없는지, 더 좋은 방안은 없는지 연구하여 보고하겠습니다."
"그리하시게. 나는 협상과 별개로 공성전을 준비해야겠어."
서서는 곧바로 군례를 올리고 물러났다. 원매의 명에 따라 12만의 보병들이 일제히 사다리를 만들고, 공성탑/발석거를 조립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기 때문에 만드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성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는 맹달은 원매가 공성전을 준비하자, 곧바로 수성전을 준비했다. 돌을 성벽으로 올렸고, 성벽 밑에는 가마솥에 물을 채워 걸어 놓았다. 또한, 사다리를 밀어 버릴 수 있는 긴 장대를 성벽으로 올렸다.
성도성 안밖으로 긴장감이 팽팽하게 유지되는 가운데.
성문이 열리며 비관이 종사관을 거느린 채 천천히 원매진영으로 향했다. 서서는 예상하고 있던지라 병사들을 보내어 비관을 맞이했다.
"별가를 맡고 있는 비관이라 합니다. 익주자사의 명을 받들어 태자전하를 찾아뵈려고 왔습니다."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태자전하가 바쁜 분이라 제가 이유를 먼저 말씀드려야 만날 수 있습니다."
비관은 서서를 노려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성에서 나왔으면 협상말고 무엇이 있겠습니까?"
"항복입니까?"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비록 익주의 많은 부분을 빼앗겼지만, 아직 촉군이 남았고 성도가 건재합니다."
"그렇군요. 자- 안으로 드시지요."
비관은 지휘소로 들어섰다. 그는 원매를 보자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태자전하. 처음 뵙겠습니다. 별가를 맡고 있는 비관이라고 합니다."
"반갑소. 원매요. 그래 협상을 하러 오셨다고? 어디 원하는 것을 말해 보시오."
"유자사께서는 얼마든지 태자전하의 공격에 버틸 수 있습니다. 하여 쓸데 없는 노력을 그만 두시고 물러나시길 간청드리는 바입니다."
"설마 진짜로 그리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속마음을 말해보게. 이번 것은 예의상 들어준 것으로 하지."
날카롭게 자신을 노려보는 원매를 보고는 비관은 섬뜩함을 느꼈다. 성내의 최고고수인 맹달에게서 조차 이런 무지막지한 기운은 느껴보지 못했다.
"유자사께서는 충분히 버티실 수 있지만,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이 고통받는 것이 매우 안타까워 어느 정도 조건이 맞는다면 귀부(항복)을 고려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본심이구만. 조건은?"
"익주자사를 주십시오. 군권은 요구하지 않을 테니, 최소 10년은 보장해 주십시오."
원매는 서서를 바라보며 '흐흐흐-' 웃었다. 웬지 비웃는 것같아 비관은 기분이 나빴다.
"그건 안 돼. 이제 내 조건을 제시하지. 항복하면 하북으로 간다. 그곳에서 태수를 원하면 태수를 줄 것이고, 중앙관직을 원하면 그것도 주지. 땅도 자손대대로 살아갈 만큼 주겠어. 싫으면 전쟁이야. 전쟁중에도 협상이 있지만, 조건이 축소된다는 것을 명심하게. 성이 함락된다면 그대로 죽음이야."
"협박하시는 것입니까?"
"협박? 나와 유자사는 힘의 차이가 비교할 수 없이 커. 내가 어른이면 유자사는 겨우 5살 꼬마야. 협박이 아니라 걱정되서 타이르는거지. 더는 네 놈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 없으니까 돌아가서 유자사의 생각을 가지고 와. 나는 공성전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공격을 시작하지. 다시 말하지만, 공격이 시작되면 많은 혜택이 사라질거야."
원매의 축객령에 비관은 힘없이 물러났다. 협상이 어려울 줄은 알았지만, 이건 난관도 보통 난관이 아니었다. 원매도 유장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중간에 낀 비관만 죽을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