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
제213장. 뱀 머리가 되고 보니, 용꼬리 되는 것이 두려워졌다.
원매는 항복한 병사와 장정들 중에서 젊고 튼튼한 정예병 2만을 추려서 자신의 부대로 편입시켰다. 그후 15만의 장정들이 남았는데, 이중에서 나이 들고 눈치 빠른 자 1만을 선발하여 풍족한 식량을 나눠주고는 먼저 익주로 돌려보냈다.
-유비는 대패했고, 죽었다. 기冀에 항복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들은 이런 소문을 각고을마다 퍼트릴 것을 주문 받고는 기쁜 표정으로 출발했다. 농사지을 시기에 유비에게 강제로 끌려온 마당에 충성심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더군다나 원매가 곡식을 주는 등 편의를 봐주자 금새 마음을 돌렸다.
1만의 선발대가 출발한 후, 원매는 이전/주포와 보병 2만, 진도/호거아와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1만의 선발대를 보낸 효과는 탁월했다. 익주남부의 토박이인 이들이 일제히 떠들어 대자, 백성들의 마음이 순식간에 돌아선 것이다.
특별한 전투도 없이 현령이 문을 열고 항복했다.
제일 먼저 장가군을 통과했는데, 이곳은 주포가 공을 들여 다스렸던 곳이기에 특별한 저항없이 항복했다. 1만의 선발대와 주포의 합작으로 장가군을 수월하게 얻은 것이다.
"이거야 식은 죽 먹기구만."
"이렇게 압도적으로 유리한데, 당연히 그래야지요. 앞으로도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북쪽에서 이도독(이통)이 밀고 내려오고 있습니다. 항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지."
원매는 이전의 말에 수긍했다. 그는 곧바로 주포를 호출했다.
"주장군. 장가군 태수로 임명할 테니, 이곳을 다스리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포는 급히 엎드렸다. 자신이 소망했던 일이 이뤄지자, 눈물마저 글썽였고 목소리가 떨렸다. 항장출신이었고, 사실 유비와의 전투에서도 크게 공을 세우지 못했기에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더욱 감격스러웠는지도 몰랐다.
"일어서게. 이 사람아. 자네가 가장 힘든 임무였어. 처음에 정앙기병돌격을 받아서 고전하면서 무너지지 않고 버텼잖아. 덕분에 반격을 할 수 있었어. 그러니 자네 공이 크지. 장가군을 잘 다스려주게."
원매는 주포의 마음을 짐작한듯 격려했다. 주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크게 절을 올리며 다시 한번 충성을 맹세했다.
"주장군. 태자전하께서는 그대가 유비에게 항복하기 전에 장가군을 잘 다스렸던 것을 알기 때문에 다시 맡기시는 것입니다."
이전이 원매의 말에 살을 붙이며, 주포를 안심시켰다. 주포는 조금 밝아진 얼굴로 일어섰다. 원매는 주포와 장가군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이곳에서 지냈다.
이튿날.
원매는 주포에게 장가군을 맡기고, 곧바로 진군을 재촉했다. 빨리 익주 남부를 안정시키고, 익주 북부 촉군에서 버티고 있는 유장을 제압해야 했다. 강동의 주유라는 거물이 남아있는데 언제까지 익주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익주군 미현.
이곳은 장가군에서 익주군으로 들어서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미현 역시 원매가 보낸 선발대에 의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미현현령 서간이 단단하게 단속을 했지만, 원매가 선발대 말고도 나이 많은 장정들을 추가로 계속 투입하자, 발칵 뒤집어졌다.
'어쩐다? 겨우 2천의 병사로 원매군을 어찌 막는단 말인가? 더군다나 원매항병이 억지소문을 퍼트리면서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최악의 상황이로구나.'
서간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급히 죽간을 작성하여 원매에게 보냈다. 원매는 죽간받아 보고는 실소를 머금었다.
"요런 약아빠진 놈을 보았나? 자리를 보장해 주어야 항복하겠다 이거지?"
"현령을 보장해 달라는 거니까 귀엽게 봐주십시오."
"처음부터 보장해 줄 생각이었어. 이거 묘한 놈들이야. 주포도 그렇고 실리에 밝구만."
"저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실리를 추구하는 자들은 처음 봅니다."
이전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예의를 따지는 중원과는 문화가 달랐던 것이다. 원매가 서간의 청을 들어준다는 약속을 하자, 그는 곧바로 항복했다. 원매는 적절히 그를 위로하고는 곧바로 곡창현 유비치소로 향했다.
지금까지의 성이 대부분 작았다면, 곡창성은 규모가 매우 컸다. 역시 유비의 치소다웠다. 원매가 성을 포위했을 무렵, 이통이 이끄는 보병 5만, 기병 1만이 도착했다.
"태자전하. 승전을 감축드립니다."
"고맙네. 이도독 고생 많았소. 마맹기(마초)도 오랜만이군. 문장군(문추)도 고생했어."
원매는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보자 일일이 악수를 하며 그들을 격려했다. 이통이 쑥쓰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더 빨리 올 수 있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길이 험하여 오다가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늦어졌습니다."
"이도독이 그런 실수를 다하는구만. 인간미가 있어."
책망이라기 보다는 가벼운 일침이었다.
"다음부터는 좀 더 신중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공을 세우겠다는 마음이 앞섰던 것 같습니다."
"그런다고 그렇게 기가 죽을 필요 없네. 마맹기! 자네 대단한 공을 세웠더군. 서량에 이어 익주에서도 마맹기하면 벌벌 떤다면서?"
원매가 마초의 자인 맹기로 호칭하면서 친근하게 물었다.
"태자전하를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응? 자네 좀 변했군. 겸손할 줄도 알고 말이야."
"하하- 그렇습니까? 표시가 많이 납니까?"
"많이 나지. 난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사실 서부어사에게 매일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글을 배우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포기했었는데, 기초부터 공부하니 할만합니다."
"좋은 생각이야. 열심히 배우게."
원매는 시선을 문추에게 돌렸다. 강직하고 엄격한 모습 그대로였다.
"문장군도 고생했소."
"별말씀을요.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조금만 더 고생하시게. 내가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섭섭하지 않게 해주겠네."
장수중에서는 원로에 가까웠고, 원소가 아꼈던 문추였다. 어쩌면 그는 이통의 부장으로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가 이통에게 그다지 밀리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원매가 선수를 친 것이다.
문추는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저는 태자전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 할 뿐입니다."
"고맙네. 조금만 참으시게."
원매는 문추를 다시 격려하고는 장수들을 이끌고 지휘소로 들어섰다. 종사관이 차를 내왔고, 장수들은 그것을 마시며 공을 떠들어댔다. 순식간에 떠들썩해지며 분위기는 환해졌다. 원매도 그 이야기에 끼어들며 계속 떠들도록 부추겼다.
원매는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눈치 보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자는 속을 알기 어려웠다.
"자- 이 정도면 회포는 푼 것 같고, 저 곡창성을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주저하지 말고 의견을 말해 보게."
"지금 곡창성을 지키는 장수는 방통인데, 겨우 5천으로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항복을 권유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방통이라? 유비를 잡을 때 보이지 않아 의아했더니, 의외로 여기에 남아 있었군."
이전의 진언에 원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제갈량을 데려오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제갈량이라면 방통을 쉽게 설득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공성전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움을 갖고 빨리 항복할 것입니다."
문추가 추가 진언을 올렸다.
"당연히 그래야지. 방통이 순순히 항복했으면 좋겠군. 정말 좋은 인재인데."
원매가 입맛을 다시자, 이통이 진언을 올렸다.
"항복할 것입니다. 제가 익주에 있으면서 첩보를 확인했고, 또 이곳으로 오면서 현령들과 백성들을 통해서 확인했는데 방통은 자애로운 인물이라 합니다. 이번 전투도 끝까지 반대하여 결국 이곳에 남은 것입니다. 평화를 원하는 자이니 항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랬으면 좋겠어. 제발 그랬으면."
이통의 진언을 듣고도 원매의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역사상으로 보더라도 방통은 기회를 원했고, 충의지사다운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달랐다. 방통이 사실상 유비세력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일인자로 올라선 그가 혹시라도 다른 맘을 품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좋아. 오늘은 늦었으니 식사를 하고 쉬도록 하지. 내일 아침에 전령을 보내고, 모든 병사들을 동원하여 공성전 장비를 제작하게! 항병들도 작업에 투입해. 전투가 끝난 후에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낸다고 약속하고."
"예. 태자전하."
장수들이 일제히 군례를 올리고는 지휘소를 나섰다. 원매도 밖으로 나와 다시 곡창성을 바라 보았다.
무조건 원매가 이기는 전투였다. 빨리 끝내고 싶었다.
곡창성. 방통치소.
방통은 오랜만에 술을 입에 대었다.
'주군도 서거하셨고, 이제는 곡창성 하나 남았다. 변방의 성에 1~2천씩 병사들이 있을 테지만, 지원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온다하더라도 10만이 넘는 원매군을 어찌 뚫고 들어온단 말인가?'
그는 답답한듯 술을 들이켰다.
탕-
거칠게 상에 술잔을 내리쳤다. 고급 술잔이었기에, 깨지지 않았다.
'네놈이 나보다 낫구나.'
방통은 술잔을 보며 중얼거리다가 다시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마시면 마실 수록 정신은 또렷해졌다. 그는 자신의 앞날이 어찌 될지를 알고 있었다. 항복하여 용꼬리로 살거나, 죽음을 택하는 것이었다.
'힘들기는 해도 사실상 일인자까지 올랐어. 지금은 주군의 자손이 없으니 이곳은 이제 내땅이야. 지난 보름간은 참으로 뿌듯했어. 정말 내 땅, 내 백성이란 생각으로 다스렸어. 하지만, 이제는 끝이군.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야. 꿈에서.'
누구보다 정치적 욕망이 컸던 방통이었다.
'빌어먹을!'
술병을 집어 던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성벽으로 다가가자 병사들이 일제히 군례를 올렸고, 선임교위로 바로 따라 붙었다.
"저희는 끝까지 방군사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그들은 방통이 옥에 갇히면서까지 전쟁을 반대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래서 방통을 충심으로 지키고 싶었다. 방통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성벽에 다다라서 원매군을 지켜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벌판이 원매군 숙영지로 가득 찼다. 밥을 하느라 뿌연 연기가 바닥에 자욱하게 깔렸다. 마치 곡창성을 주변에 안개가 가득찬 느낌이었다.
"많이도 데려왔구나. 이교위."
"예. 방군사."
"자네는 저리 많은 병사들을 보고도 느끼는 것이 없는가? 내게 항복을 권유해야지. 그래야 살아남을 게 아닌가?"
"사실 이곳의 병사들은 대부분 중원출신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지요. 저 또한 그렇고요. 그간 방군사께서 저희들을 위해서 힘을 써주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선택을 하시더라도 끝까지 따른다고 말씀 드린 것입니다."
"자네 혼자 생각인가?"
"아닙니다. 사마(400명 지휘장수), 도백(100명 지휘장수)들의 의견을 청취했습니다. 이견을 드러내는 자들은 없었습니다. 솔직히 항복한다면 목숨을 건지겠지만, 거기서 무슨 취급을 받겠습니까?"
"그래. 그렇겠지. 지금처럼 좋은 대우는 받지 못할 게야."
방통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원매군을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명령을 내렸다.
"오늘 다시 모여서 이야기를 나눠 보게. 나는 자네들 의견에 따르지. 아쉽긴 하지만, 자네들 의견에 따르겠어."
"방군사께서 뜻을 정하시면 저희가 따르면 됩니다. 어찌 저희들이 뜻을 정하고 방군사가 따른단 말입니까?"
"모두 목숨을 걸어야 하니까. 목숨이 중요하다면 항복하는 게 나아. 어서 가서 의견을 취합해서 내일 아침에 보고하게. 최대한 중립적으로 의견을 듣게. 어서 가봐."
방통이 밝은 웃음을 지으며 재촉하자, 선임교위 이량은 머뭇거리다가 물러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방통은 쓴 웃음을 지었다.
'신중한 자니 잘 선택하겠지. 무엇하러 다 죽는단 말인가?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것을. 나도 참 헛살았구나. 겨우 보름간 왕노릇해보니 내 몸과 마음이 그것을 놓치 못하고 있어. 아무것도 없는 빈국의 왕이거늘. 뭐가 이리 미련이 남는단 말인가?'
곡창성은 조용하게 그렇지만 뜨겁게 고민을 하며 밤을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