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제209장. 눈물. 고뇌. 준비.
204년 5월(건신建新 4년)
(한이 망하고 201년 기가 건국되어 건신을 연호로 정했기에 건신으로 표기함.)
본격적인 농사철이 시작되는 시기였지만, 익주의 주요 들판은 휑했다. 젊은 장정들은 도망치거나 병사로 차출되었고, 노인과 부녀자만 남았기에 많은 농토가 그대로 방치되었다.
곡창현 방통치소.
방통은 유비의 분노를 사서 옥에 갇혔지만, 열흘도 안되서 풀려났다. 인재부족이 심각한 유비진영에서 방통은 대체불가의 인재였다. 방통과 함께 중요한 업무를 분담하던 곽도가 배신하면서 오롯이 방통에게 모든 업무가 몰리는 양상이었다.
'공명(제갈량)은 나를 주군께 추천할 때 이런 상황을 예측했을까?'
방통은 잠시 제갈량을 떠올리자 우울해졌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기에서도 잘 나간다고 들었다. 단 한번의 선택으로 서로의 위치는 이제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이런 저런 상상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게 다 내 운명인 게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자조했지만, 우울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도대체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배가 가라앉는데, 내가 할 일이 없구나. 그저 밑에서부터 차 올라오는 물을 보며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방통은 엎드려 눈물을 쏟았다. 능력 좋고 머리 좋다고 자부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바보같은 인생이었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살았단 말인가? 참으로 허망하구나.'
이때 성밖에서는 요란하게 군대를 점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통도 정신을 차리고 지켜봤다. 15만이라는 엄청난 군대가 집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곧 이곳을 떠날 것이다. 쌀등 군수지원물자를 수송하는 장정들만 10만이 새로 착출되었다.
새로운 장수들이 유비의 명을 받아 출발했다. 행렬은 길게 이어졌다. 아마도 모두가 출발하는데만 하루가 걸릴 것이다.
방통은 곡창현에 남아 익주남부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책사로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비는 형남 공격에 강한 반대의사를 표명한 방통을 데려갈 수 없었다. 방통은 성루에 올라 유비에게 절을 올렸다.
'주군께서 잘못되신다면 저도 뒤를 따르겠나이다.'
유비군이 출병했다는 소식은 곽가가 깔아 놓은 첩보망에 걸려 들었다. 그들이 모은 첩보는 재빠르게 임원성으로 모아졌다.
곽가치소.
곽가는 예리한 눈으로 첩보를 모으고 분석했다. 반짝이는 예리한 눈은 작은 단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빼곡하게 머릿속에 저장했다. 엄청난 양의 첩보가 머릿속에 쌓이자 그것은 몇 개의 정보를 만들어냈다.
'됐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곽가는 곧바로 원매치소로 향했다.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는 곽가를 보고는 원매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온 것이다.
"태자전하. 드디어 유비가 군을 움직였습니다."
"그래? 어디로 올 것으로 예측하는가?"
"그전에 지원군이 왔던 주수를 따라 임원성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됩니다."
"역시 멀리 우회하는 것은 피했군."
"병력이 많은 데다가, 그것을 지원하는 장정 또한 엄청나니 족히 20만이 넘을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최단거리를 선택했습니다. 이번에는 그전처럼 계곡에서 매복, 기습을 통하여 그들을 물리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워낙에 대군이고 그것에 대비를 할 테니까요. 결국은 임원성공방전을 벌이면서 야전에서 결판을 내야 합니다. 우리가 기병이 우세하니 충분히 가능합니다."
곽가의 계책을 듣고 원매의 얼굴에 고뇌가 드러났다.
"뭔가 걸리는 게 있으십니까?"
"아냐. 자네의 계책이 우수해. 우리가 기병이 우세하고, 정예보병이 10만이니 야전을 벌이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어. 다만."
원매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그는 짧게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곽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루만 더 생각해보세. 하루만 더."
"알겠습니다. 시간이 충분하니 그리하겠습니다."
곽가는 예를 표하고는 물러났다. 원매는 성을 거닐면서 고민에 빠졌다. 사실 이곳에 내려 올 때는 육손의 화공을 생각했다. 주수의 계곡이 서에서 동으로 길게 뻗어 있고, 양쪽의 산이 험했기에 적을 계곡 안에서 불태워 죽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지형정찰을 하면서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상황이 닥치면 유비군은 전멸이 될 것이라고 예측되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야전을 하여 대승을 하더라도 많은 수의 병사들이 도주하여 목숨을 구했다. 도주하는 병사가 적어도 1/3은 되었기 때문이었다. 20만이 넘는 병사와 장정들이 불 속에서 죽는다고 생각하자, 소름이 끼쳤다.
'어찌한다? 유비를 재기불가능하게 물리칠 방도가 나왔는데, 쉽게 결정을 내리기 어렵구나. 이제는 살인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이런 부분은 어렵구나. 옛날 진의 백기가 장평대전에서 수십만을 생매장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에 못지 않은 대참사가 벌어지겠어.'
원매의 고민은 길어졌다. 밤이 되도록 결정이 되지 않자, 결국 곽가를 찾았다.
"어서 오십시오. 태자전하."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
"괜찮습니다. 저도 계책을 고민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 이리로 앉으시지요."
원매가 곽가가 안내하는 상석에 앉았다. 그는 곽가가 조심스럽게 찻물을 따라 바치자,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보게. 곽봉효."
"예. 태자전하."
"화공을 생각해보았는가?"
"화공말입니까?"
원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곽가는 짧은 시간에 상황을 파악하여 전투결과를 예측하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마도 생각을 못 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배제했던 것 같았다.
"저..... 태자전하. 너무 가혹한 처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계곡 안에 두 개현이 있습니다. 화공을 진행하면 유비군 뿐만 아니라 수 만 백성의 목숨까지 앗아가게 됩니다."
"자네는 몰랐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생각을 하지 않았군."
"예. 너무 잔혹하니까요. 만약 우리가 불리하고 그 방법밖에 없었다면 저는 화공을 적극적으로 고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충분히 야전을 통해서 저들을 꺽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 생각은 접었습니다."
원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육손이 생각한 것을 곽가가 놓칠 리가 없었다.
"화공에 반대라 이거지?"
"예. 반대입니다. 하지만, 태자전하께서 명령하시면 따르겠습니다."
곽가는 눈을 반짝이며 원매의 명령을 기다렸다. 원매가 탁자를 두드리며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사실 이곳에 내려올 때부터 화공을 생각했어. 그거라면 유비를 재기불능으로 몰 수 있고, 익주 남부를 손 쉽게 점령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너무 많은 장병들이 희생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솔직히 망설여지는군."
원매가 흔들리자, 곽가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전하 아무리 난세라고 하나 지나친 살생은 죄악입니다. 대부분 전투를 치르면 죽는 병사는 절반을 넘는 경우가 드뭅니다. 도망가고, 항복하기 때문이지요. 또한 백성들은 미리 도망치니 어쨌든 목숨을 구합니다. 하지만, 화공은 다릅니다. 모든 것을 불태울 것입니다. 그리고 불길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도 알 수 없습니다."
"알겠네. 그리 무서운 표정까지 지으며 설명할 것 없어. 자네 뜻대로 하지."
"감사합니다. 태자전하."
원매는 개운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는 손을 흔들고는 치소를 나섰다.
다음날.
모든 장수들이 모인 가운데, 원매가 상좌를 차지했고, 곽가가 계책을 설명했다.
"유비가 병사 15만, 군수지원을 돕는 장정 10만등 약 25만을 동원했습니다. 그들은 주수계곡을 타고 이동할 것으로 예측되는데, 워낙 대규모의 군대라 매복/기습을 통한 전투보다는 임원성 근처의 벌판에서 야전을 벌여 물리치는 것이 효과적이라 판단됩니다."
장수들은 곽가의 말에 수긍했다. 반론을 제기하는 장수가 없자, 그 다음으로 넘어갔다.
"지금 즉시 강릉에 있는 보병 5만을 이곳으로 불러들여야 합니다. 그후, 병력을 포진하는 것은 유비군의 포진형태를 보고 결정할 것입니다. 또한, 즉시 익주의 도독 이통에게 전령을 보내어 유비군을 격파하면 즉시 남하하여 익주남부를 얻도록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대규모 전투였지만, 계책은 간결하게 끝이 났다.
"좋아 그리하지. 괜히 계곡 안에서 매복할 필요 없어. 여기서 끝을 내야 해. 그리고 업성으로 연통을 보내서 장비를 불러들여. 괜히 지난번처럼 독단적인 행동을 하면 곤란하니까."
"예. 태자전하."
"모두들 나가서 병사들을 단단히 훈련시켜 전투에 대비하게. 우리 기병이 2만이야. 충분히 저들을 물리칠 수 있어."
"예. 태자전하!"
장수들이 일제히 복명한 후, 치소를 나갔다. 곽가는 곧바로 죽간을 작성하여 원매의 인장을 받은 후, 이통에게 한 통, 견초에게 한 통, 업성으로 한 통을 보냈다.
원매는 병사들을 시켜서 임원성 일대의 벌판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주요 큰 나무는 물론이고, 작은 나무군락마저도 모조리 잘라 버렸다. 수렁을 메꿨고, 길을 평탄하게 넓혔다. 그 지역이 워낙 넓었지만, 주수 계곡에 연한 부분부터 시작하여 10만이 움직이자 며칠 만에 정리가 되었다. 기병활용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방안이었다.
'유비가 죽을 구멍인 줄 알면서도 들어 오는 것을 보니 참으로 실소가 나오는 구나. 그게 인간적인 모습인지는 몰라도 이번 전투로 너는 끝이 날 것이다.'
원매는 생각에 잠기며 벌판을 바라 보았다. 장수들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부분을 정리하고 있었으며, 방덕, 호거아, 진도는 기병을 이끌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주군! 그들이 주수계곡의 중앙지점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곽가는 매우 흥분된 얼굴이었다. 많아서가 아니라, 여기서 모든 것을 끝장낸다는 생각에 흥분한 듯 했다.
"그럼 며칠이나 걸리겠는가?"
"3~4일이면 선발대가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순순히 계곡을 통과시켜 주니까, 저들도 야전을 생각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아마도 매복/기습에 대비하여 확인하고 진군하느라 속도가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보병은 대략적으로 포진시켜! 기병은 후방에 위치 시켰다가 한방에 끝을 내도록 하지. 내 기병은 우측으로 포진시키게. 그리고 저들이 우리를 보고 바로 병력을 포진시킬 거야. 그때 바꿔야 한다면 지체 없이 보고하게. 바로 바꿔줄 테니까. 다시 말하지만, 적의 포진을 보고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세밀하게 계속 조정해야 해. 알겠지?"
"물론입니다. 저- 꼭 태자전하께서 전투에 나서야 합니까?"
곽가의 불만 어린 얼굴을 원매는 외면했다. 업성에서 서류만 정리하다 보니 전장이 그리웠다. 무력이 최고치로 오르자, 넘치는 힘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이번 전투에서 원 없이 힘을 쏟아 붓는다면 당분간은 차분하게 정무에 전념할 것 같았다.
"자네는 나를 이해하기 힘들 거야. 내가 다치지 않도록 최대한 갑옷을 단단히 입도록 하지. 그러니 그 이야기는 그만 두게. 어서 병사들부터 포진시켜!"
"예. 태자전하!"
곽가의 계책대로 병사들이 포진을 시작했다. 주수계곡 입구를 바라 보면서 넓게 반원형 모양으로 포진시켰다. 정면에는 허저, 좌측에는 견초/이전, 우측에는 곽독, 주포가 자리를 잡았다. 보병은 총 8만이 동원되었다.
기병은 정면 후방에 방덕/호거아가 1만 8천, 우측에 원매의 호위대 2천, 좌측에 진도 2천이 자리 잡았다.
보병은 미리부터 자리를 잡기 위해 준비했지만, 기병은 자신의 자리를 확인해 놓고, 주변을 확인만 했다. 워낙 기동성이 좋고, 후방에 위치할 계획이있기에 유비군이 나타나면 그때 배치할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