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제193장. 신중하게. 확실히.
곽가는 곽도의 치소에 머물면서, 그의 과중한 업무를 분담해주고 호감을 얻었다. 곽도는 업무가 밀리지 않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짜증을 부리지 않았다. 단, 아침에 무공을 배울 때를 빼곤 말이다.
"형님. 무슨 무술연습을 하는데, 이렇게 심하게 한단 말이오? 더군다나 부도독인 형님께 함부로 몽둥이를 휘두르다니. 그런 놈을 가만 놔뒀소?"
"휴- 말도마라. 내가 진짜 살다 살다 이런 더러운 꼴은 처음 본다. 관우 이 쳐 죽일 놈이 나를 잡아 먹으려고 들들 볶아대는데 견딜 재간이 없다."
곽도는 관우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자 분노가 끓어오르는지 몸을 부르르 떨다가 곽가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봉효(곽가) 네가 옆에 있어주니 한결 낫구나. 덕분에 참고 산다."
"참. 안쓰럽소. 그런데 뭐하러 이런 곳에 남아 계신 것이오?"
"갈 데가 어디 있느냐? 이곳이 마지막이다."
"북쪽의 기冀나 동쪽의 주유는 어떻소?"
곽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넌 알면서 나를 놀리는 것이냐? 원가에서는 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텐데, 어찌 그리로 가겠느냐? 주유가 어찌 보면 현실적인 대안이지만, 그곳에 가면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 여기에 남아 있을 수밖에. 언젠가는 관우 저 인간도 좋아지지 않겠느냐?"
쓸쓸한 표정을 짓는 곽도를 보며 곽가는 당장이라도 곽도를 회유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억지로 참았다. 생각보다 곽도의 충성심이 강했고, 관우의 장악력 또한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곽도는 다시 일을 시작했고, 곽가는 옆에서 도와주었다.
우당탕-
밖이 소란스러워지면서 곽도와 곽가는 동시에 일을 멈췄다.
"비켜라! 도독께서 오시는데 어딜 막느냐?"
호위병은 거슬리는 곽도의 종사관이나 호위병들을 사정없이 내쳤다. 이윽고, 문이 쾅- 하고 열리며 붉은 얼굴에 긴 수염을 한 관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곽도는 곽가 앞에서 이런 치욕을 당하자 전에 없이 강하게 반발했다.
"아무리 도독이라지만, 내가 부도독이고 여긴 내 치소요.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시오!"
"예의? 네 놈이 예의를 지키지 않는데, 뭔 예의를 바래는 것이냐?"
"나는 도독의 일방적인 횡포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그대를 따랐소. 도대체 내가 무슨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오?"
"몰라서 묻느냐? 여기 쥐새끼 한 마리가 들어왔다고 들었다."
곽도는 곽가를 지칭하는 것을 깨닫고는 뜨끔했다. 하지만, 곧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내 사촌동생이 이곳에 문중의 서신을 주려고 왔다가, 내일을 도와주느라 잠시 머무르고 있는 것 뿐이오. 그러니 오해는 하지 마시오?"
"그런가? 어디 얼굴을 내밀어 봐."
곽도가 난처해지자, 곽가가 앞으로 삐죽이 나와 인사를 올렸다.
"관도독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녕하셨습니까?"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네놈은 곽봉효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부도독과는 사촌형제간으로, 문중의 서신을 보내고자 왔다가 잠시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딴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딴 뜻이라니요?"
곽가는 능청스럽게 되물었지만, 속은 바짝 탔다.
"네놈은 항상 술 처먹고 계집질이나 하면서 시간을 축내던 놈이 아니더냐? 너같은 한량이 이곳에 웬일이냐? 조조가 죽었으니 여기서 빌붙어 보려고 온 것이냐?"
"아... 하하... 제 욕 하시는 것은 괜찮은데, 서거하신 주군께 모욕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하...."
곽가는 난감한 표정으로 멍청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자, 관우가 콧방귀를 뀌었다.
"병신같은 놈!"
관우는 곽가에게 욕을 퍼붓고는 곽도를 노려보았다.
"부도독. 이런 쓸모 없는 한량을 어서 돌려보내게. 이런 한심한 놈에게는 술 한잔도 아까워."
관우는 조조를 면전에서 모욕했는데도, 멍청한 웃음이나 지으며 상황을 모면하려는 곽가를 보고는 구역질이 올랐다. 이런 놈이 조조의 책사였다니 참으로 한심할 지경이었다. 곽도가 냉정하게 일갈했다.
"더는 봉효에게 신경쓰지 마시오. 조대장군이 서거하시고, 그도 힘들어 하고 있소. 그의 능력이 아까워서 내가 데리고 일을 가르치는 중이오. 도독이 아는 것보다 봉효는 훨씬 뛰어난 인재요."
"좋아. 저런 놈을 데려다 쓰든 말든 신경쓰지 않겠어. 하지만, 이거 하나는 명심해 둬. 감히 내 눈을 피해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알겠는가?"
"말이 심하시오. 허튼 수작이라니? 나도 주군께 충성을 다하고 있소이다."
"흥!"
관우는 그들을 노려보다가 쌩-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곽도는 소리를 지르며 물건을 집어 던졌다.
곽가는 멀찍이 떨어져 그 둘의 상태를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관우와 곽도의 관계는 최악이다. 이건 예상대로인데, 문제는 관우가 관부및 병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곽도가 말만 부도독이지 현재로는 관우를 전혀 견제하지 못하고 있어. 어쩐다? 헛다리를 짚었나? 아냐. 아냐. 분명이 틈이 있을 거야. 시간을 두고 반드시 그 방법을 찾아내고 말 것이다.'
곽가가 생각을 마무리 지을 때, 곽도가 털썩 주저 앉고는 눈물을 흘렸다. 분함의 눈물이었다.
"형님. 괜찮으시오?"
"내가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이런 부끄러운 모습이나 보이고."
"관도독의 위세가 참으로 대단하군요. 제가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면서 형님을 돕겠습니다. 하지만, 관도독을 보니 오래 있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하게. 내가 자네를 잡을 명분이 서질 않는구만."
곽도는 종사관 불러서 방안을 정리하고는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장사에서 곽도를 회유하는 일이 조금 늦어지는 가운데.
업성.
원매치소.
어사대 도어사 강경(강유부친)이 원매를 찾았다.
"어서 오시오. 그리 앉으시오."
"예. 전하. 감사합니다."
강경은 자리에 앉고는 곧바로 죽간을 내밀었다.
"장사로 간 곽부어사로부터는 아직 연락이 없고, 익주에서 전투를 수행중인 부어사 서서가 연통을 보내왔습니다."
원매는 죽간을 펼치고는 꼼꼼하게 읽었다. 그는 내용을 파악하자 죽간을 접어 내려 놓고는 입을 열었다.
"익주의 상황이 묘하게 되었구려."
"묘하기는 하지만, 답답한 상황은 아닙니다. 이도독(이통)이 파군, 건위군에 이어 광한군까지 점령했습니다. 유장이 촉군하나로 버티고 있는데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그간 전투를 치르느라 힘이 빠졌고, 유장-유비가 위 아래서 짓누르는 형국이라 잠시 관망세로 돌아선 것 뿐입니다."
"알겠소. 서두르다 일을 망치지 말고, 천천히 도모하라고 하시오."
"그리 조치하겠습니다."
"곽부어사가 장사로 간 지가 꽤 되었는데, 왜 이리 늦어진다고 생각하시오?"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간의 첩보를 종합해보면 관우가 만만치 않은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신중을 기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곽부어사가 걱정이 되어 그러십니까?"
"걱정이 되는구려. 적지에 홀로 들어갔으니 맘고생이 심할 것이오."
"전하의 이런 마음을 알고 있으니 곽부어사가 반드시 임무를 성취하리라 판단합니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믿어주십시오."
"고맙소."
강경이 보고를 마치고 돌아가자, 원매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소안을 서성거렸다. 호랑이가 토끼를 사냥할 때도 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처럼, 유비/주유에 비해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을 멸망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관우와 곽도의 불화를 이용해서 형남을 점령하고, 유비를 무너뜨리려는 계획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반드시 성공하리라 확신했다.
'그래. 잘 될거야. 내가 흔들리면 어쩌자는 것인가?'
곽가가 형남으로 내려간 지도 한달이 넘었다.
업성에는 어느새 가을이 왔고, 추수를 하느라 인력이 부족하여 병사들을 동원하고 있었다. 풍년은 아니었지만, 도적을 철저히 단속하면서 세수는 충분히 확보되었다.
"휴- 정말 다행이야. 항상 이맘 때가 되면 혹시라도 부족하면 어쩌나 긴장되는군."
원매가 웃으면서 두기가 건네 준 죽간을 내려 놓았다.
"관리들이 혼연일체로 일하고 있습니다. 황충(메뚜기)이나 홍수, 가뭄등 큰 자연재해가 발생하지 않는 한 세수가 부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연재해가 일어난다면 어찌할 것이오? 대비책은 있소이까?"
"홍수나 가뭄에 대비하여 보(저수지)를 설치하고, 수로작업을 병행하고 있지만, 몇 년 해서 성과를 보기 어렵습니다. 조바심을 갖지 마시고 꾸준히 시행하셔야합니다. 황충에 대해서는 딱히 대책이 없습니다."
날아오는 황충을 어찌 막느냐며 씁쓸한 웃음을 짓는 두기를 보며 원매가 의견을 내놓았다.
"되도록이면 숲을 망가트리지 말고, 새를 잡지 말라고 명하시오. 그런다고 완전히 황충이 박멸되지는 않겠지만,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오."
"좋은 생각이십니다. 새들이 황충이나 그것의 유충을 잡아 먹으니 피해가 줄어 들겠군요. 그리 조치하겠습니다."
"그리 하시고. 사마의는 어찌 하고 있소?"
"아주 영특합니다. 제갈량이후 최고의 천재같습니다. 오히려 독하게 일을 파고 들어 처리하는 부분은 제갈량보다 낫습니다. 전체적으로 일을 조율하고, 관리하는 부분은 제갈량이 낫고요. 참으로 우열을 가리기 어렵습니다."
거시적인 부분은 제갈량이, 미시적인 부분은 사마의가 낫다고 두기가 결론을 내리자 원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속내는 달랐다.
'제갈량이 독하게 마음 먹고 일을 파고 들면 사마의가 적수가 되기 어렵지. 적당히 서로 자극이 되어 잘 성장했으면 좋겠는데. 사마의가 제갈량 때문에 좌절하는 일은 없겠지.'
업성에서 제갈량의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이는 원매가 유일했다. 두기가 계속 진언을 올렸다.
"전하. 식용메뚜기등 식용으로 할 수 있는 곤충을 대량생산하고 싶습니다. 소나 돼지, 닭등을 잡아 먹으면 좋겠지만, 농민들은 꿈도 못꿉니다. 그러니 아쉬운대로 식용곤충을 먹는다면 그들의 건강도 좋아지리라 생각합니다."
두기의 말을 듣고 원매는 징그러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쩌할 생각이오? 구체적으로 말해보시오."
"곤충을 그대로 취식하라고 한다면 모두 기함을 할 것입니다. 하여 그것을 잡아 말려서 가루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후, 국을 끓일 때 넣은 것이지요. 손이 많이 가긴 하지만, 충분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알겠소. 그리 조치하시오."
원매는 가을이 되자 두기는 자주 자리를 만들었다. 가을 세수를 통해서 내년 일년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익주 광한군 이통치소.
이통은 파군, 건위군, 광한군을 점령하고는 숨고르기에 돌입해 있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휴식과 훈련을 교대로 시키면서 전력을 최대로 끌어올리기는데 주력했다.
"그것 참. 유비가 익주 남부를 이렇게 빨리 차지하고 압박할 줄이야."
이통은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혀를 찼다. 그는 지도를 보면서 좋은 수가 없을까를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이도독! 천천히 쉬면서 하십시오. 건강을 해칠까 우려됩니다."
"서부어사 오셨는가? 전하께서는 익주점령보고를 손꼽아 기다리실 텐데, 어쩌겠는가? 더 노력해야지."
"그렇긴 합니다만, 너무 서두르시지는 마십시오. 업성에서 이런 연통이 왔습니다."
이통은 죽간을 펼쳐 읽고는 눈을 반짝였다.
"형남을 흔든다?"
"그렇습니다. 형남이 흔들리면 이곳 익주 남부도 흔들릴 것입니다. 그럼 유비/유장의 공조도 흔들릴 테고, 그때 상황을 봐서 약한 곳을 쳐서 무너뜨리면 됩니다."
"그래. 형남이 무너지는 것이 익주점령의 분수령이 되겠어."
이통은 얼굴색이 환해졌다. 돌파구가 필요했는데, 적당한 때에 좋은 작전이 수립된 것이다.
'유비! 유장! 이놈들 조금만 기다리거라! 모조리 격파해주마!'
이통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