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제186장. 거성 떨어지다.
조조가 매우 흔들리며 불안해진 수춘성은 전풍이 다녀간 이후에도 보름 정도 굳건히 버티었다. 원매도 전풍의 의견을 받아들어 비난을 자제하고 포위망만 유지한 채 차분히 항복할 때를 기다려 주었다.
조조치소.
조조를 비롯한 모든 신하들이 모인 가운데 엄숙한 분위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누구라도 소릴 지르고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들만큼 소름끼치는 침묵이었다.
"가져와!"
나지막한 명령이 침묵을 찢고 조조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신하들은 심할 정도로 흔들리는 모습을 연출했다. 내관이 공포에 젖은 눈으로 조심스럽게 찻상을 들고 들어왔다. 모든 눈이 그를 향했고, 오랜 시간이 지난간 것과 같은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찻잔과 차를 담은 다기를 내려 놓았다.
탁- 탁-
작은 소리였지만,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실내는 조용했다.
"따라."
또다시 조조의 낮은 명령이 내려졌고, 내관이 차를 따르기 위해 다기에 손에 대었을 때였다.
"네 이놈! 손은 떼지 못하겠느냐?"
하후연이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자, 내관은 급히 손을 다기에서 떼고 엎드려 벌벌 떨었다.
"묘재(하후연)야. 뭐 하는 짓이냐?"
"주군!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왜 굳이 이렇게 하셔야 합니까?"
"내가 몇 번을 말했잖아. 이게 최선이라고."
"하지만, 저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조조는 하후연이 억지를 쓴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 없이 피식 웃고는 내관에게 차를 따를 것을 재촉했다. 내관은 두려운 눈으로 조조와 하후연을 번갈아 보다가 손을 뻗었다.
"죽고 싶은 것이냐?"
살기 넘치는 하후연의 압박에 내관이 다시 급히 엎드렸다. 조조는 눈을 들어 하후연을 바라 보았다.
"묘재야. 이제 그만 이 형을 놓아 주거라. 이것이 모두를 위한 일이야."
"아만(조조의 아명)형. 살 수 있는 길이 있소. 왜 미련하게 이러는 것이오?"
"이 놈아. 이 자리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이 자리에 앉으려면 목숨 정도는 가볍게 내놓을 수 있어야 해. 그래야 모두가 살 수 있는 것이다."
"난 모르겠소. 난 모르겠소."
"너는 아둔하지 않으니 모른척 하겠지. 설령 모른다하더라도 알 날이 있을 것이다."
조조는 직접 다기를 들어 차를 가득 따랐다. 옅은 갈색의 찻물은 그가 항상 애용하는 최상급의 차를 의미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그간 고생했던 순간들이 영상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가 떨리는 손을 들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주군! 아니됩니다!"
"주군!"
신하들이 일제히 오열을 하며 조조를 만류했다. 조조도 순간적으로 눈빛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신하들의 극적인 만류를 뿌리치고 벌컥 찻물을 들이켰다. 넘길 때의 시원한 느낌과는 달리 뱃속에 다다르자 뜨거운 열기가 솟구쳤다.
"헉!"
표현 못 할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탁자를 불끈 쥐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강인한 의지로 고통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잘 들어. 누누이 이야기 했지만, 이게 최선이야. 천하를 갖다 바친 한신도 역적의 오명을 쓰고 죽었어. 내가 어찌 살길 바라겠는가? 모두 내 뜻을 따라서 대의를 따르고 부를 누리게."
그의 눈길이 신하들을 한 명, 한 명 훑었다. 모두가 눈물 젖은 눈을 들어 조조를 쳐다 보았다. 조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인사를 했다.
"봉효! 네 놈은 슬프지 않은 것이냐? 어찌 눈물을 보이지 않는 것이야?"
"주군께서 내리신 명령을 수행해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울지 않겠습니다."
"그래. 내 아들을 잘 부탁한다. 한 명이라도 살아 남아 제사가 끊기지 않으면 좋겠어."
"모두 살리겠습니다."
욱-
검붉은 피가 코와 입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치소안이 아수라장이 되며 신하들이 조조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조조는 손에 묻은 피를 보며 낮지만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처음만큼 고통스럽지 않았다. 신경이 마비된 것일까? 그는 신하들을 둘러보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더는 나오지 않았다. 입을 몇 번 열려고 하던 그는 눈을 뜬 채로 숨이 끊어졌다.
"주군. 크흑-"
치소안은 울음소리와 분노로 가득했다.
옆방에서는 조조의 부인과 아들들이 숨죽여 눈물을 삼켰다. 아버지가 죽었지만, 앞으로 나서질 못했다. 조조가 죽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하며 자신의 죽음을 절대 보지 못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오열하는 가운데, 순욱과 곽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곽가는 성문으로 향했고, 순욱은 자신의 치소로 향했다.
"문을 열어라!"
곽가의 명령에 성문을 지키던 하급장교는 쭈뼛거렸다.
"이놈! 내가 좨주 곽가다. 네놈이 감히 내 명령을 무시하는 것이더냐?"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급장교가 병사들에게 명을 내려 성문을 열자, 곽가는 등에 흰색 깃발을 꼿고 말에 올라 원매군영으로 내달렸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못난 놈! 주군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우선이거늘. 어찌 이리 바보같이 눈물을 쏟는단 말이더냐?"
곽가는 자신을 탓하며 계속해서 말에 채찍질을 가했다.
"멈춰라!"
경계병은 방책에 기대에 창을 앞으로 겨누며 소리쳤다. 곽가는 서서히 말을 멈춰 세우고는 흰 깃발을 들어 올렸다. 하급장교가 급히 나왔다.
"누구시오?"
"좨주를 맡고 있는 곽가이외다. 전하를 만나러 왔소이다."
"대장군(조조)의 명을 받고 온 것이오?"
"그렇소. 시간이 없으니 속히 안내해 주시오."
하급장교는 급히 전령을 원매에게 보내고는 곽가를 이끌고 속도를 줄여 원매에게로 향했다. 원칙대로라면 원매의 명령이 있은 후에야 곽가가 군영으로 들어올 수 있었지만, 수춘성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기에 신속한 보고와 더불어 사신이 나올 경우 즉시 데려오라는 명령을 하달받았기 때문이었다.
곽가는 원매에게로 향하며 이를 악물었다. 자꾸 눈물이 나고 약해지려는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며 마음을 다 잡았다. 이각(30분)정도 이동하자, 당당한 체구를 지닌 장수가 정예기병을 이끌고 나타났다. 섬뜩함이 느껴질 정도로 그들에게서는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대가 곽가요?"
"그렇소. 좨주를 맡고 있는 곽가입니다."
"나는 호위대를 맡고 있는 조운입니다. 따라 오시오."
조운은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곧바로 등을 돌렸다. 하급장교는 다시 본연의 위치로 돌아갔고, 곽가는 거친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여 원매에게로 향했다.
한참을 달려 말의 속도가 느려졌고, 드디어 멈췄다.
"내리시오."
조운이 말에서 내렸고, 곽가도 따라 내렸다. 조금 걸으니 낯익은 모습이 드러났다. 원매였다. 곽가는 깊숙히 허리를 숙이며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좨주를 맡고 있는 곽가가 전하를 뵙습니다."
"곽봉효. 이번이 세 번째야. 그전에는 네 놈의 목을 비틀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는데, 별다른 감흥이 생기지 않는 것을 보니 세월이 약이긴 약이야. 어쩐 일로 왔는가?"
"전하께 항복을 청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조대(대장군 조조)를 다시 볼 수 있겠군."
원매는 조조를 다시 볼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살려두면 매우 위험한 정적이란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조조에 대한 인간적인 호감이었다. 곽가는 호감을 드러내는 원매를 보고는 땅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쏟으며 아룄다.
"주군을 ........ 더는 볼 수 없습니다."
"볼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이성적으로는 조조가 죽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감정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기에 이렇게 되물은 것이다.
"주군께서는 최소한의 피를 흘리고, 많은 장수들과 신하들을 구제할 것을 요청하시고는 스스로 .......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감히 전하께 부탁드립겠습니다. 주군의 자제를 살려 주시어 제사를 끊지는 말아 주십시오. 제가 밤낮으로 그들을 지키며 헛된 생각을 하지 못 하도록 막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곽가는 연신 머리를 땅에 찧으며 간절한 마음을 전달했다.
전풍이 가까이 다가와 귀엣말로 원매에게 조언했다. 원매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풍이 다시 진언을 올리려고 하자, 원매가 입을 막았다.
"곽좨주 일어나게."
"주군의 자제를 살려주신다고 약속하시기 전까지는 일어서지 않겠습니다."
"일어나. 그래야 말을 하지."
곽가는 원매의 말이 부드러웠기에 조금의 희망을 품으며 부섬부섬 일어섰다. 원매가 곤혹스런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조대와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어.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의 자식들을 모두 살려주고 싶네. 하지만, 그게 안된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거야. 나 혼자만 이 제국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아니니까."
원매가 말을 끊자, 곽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다시 입이 열리면 조조 자식들의 생사가 결정될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원매의 의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원매가 무겁게 명을 내렸다.
"조비, 조창은 자진하라!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초현으로 돌아가서 생업에 종사하라! 더는 말하지 말라. 내 뜻은 바뀌지 않아."
원매가 의지를 확고히 한 것은 곽가는 물론이고 전풍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전풍의 아쉬운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곽가는 급히 예를 표하며 감사를 표했다. 모두 살린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둘의 죽음으로 끝나고, 나머지는 목숨을 보전했으니 다행이었다. 신분이 격하되지도 않았고, 재산도 뺏지 않았으니 원매의 호의가 느껴졌다.
"전하 성으로 돌아가서 이 사실을 전파하고, 신하들을 모두 데려 오겠습니다. 그리고 ...... 수급도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이왕하는거 확실히 해주게. 순문약(순욱)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는 주군보다도 한漢을 따르는 신하였으니까요. 저- 황제는 어찌하실 것입니까?"
"어찌하긴.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을 수 없고,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뜰 수는 없지 않은가? 자네가 처리해주겠는가?"
"그리하겠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잠시 기다리게."
원매는 죽간을 꺼내어 곽가와 약속한 내용을 그대로 적고, 인장을 찍어서 주며, 매서운 눈빛으로 다짐을 받았다.
"확실하게 처리하고, 보고하게. 그렇지 않으면 약속이 뒤집어 질 수 있네."
"물론입니다."
곽가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는 말을 타고 수춘성으로 향했다. 원매가 하늘을 올려다 보며 짧게 탄식을 터트리자 전풍이 가벼운 불만을 터트렸다.
"전하. 너무 관대한 처사였습니다."
"전태부. 이것만큼은 내 뜻대로 하겠소. 조대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부탁했는데, 이 정도는 들어줘야지."
"살려두는 것은 그렇다쳐도, 신분이나 재산을 그대로 두는 것은 위험하지 않습니까?"
"포용하세. 내가 올바른 정치를 하고 내 아들이 그것을 잘 유지한다면 그들도 다른 생각을 못할 것이야. 20년만 무리없이 태평성대가 이뤄진다면 다 잊혀질거야. 그의 자식들도 괜찮은 녀석들은 관리로 등용할 생각이네."
"전하는 참으로 못 당하겠습니다. 벌써 그의 아들을 데려다 쓸 생각을 하십니까?"
전풍이 고개를 흔들자, 원매는 훈훈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10살 남짓이 되었을 조식이나 조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조맹덕. 잘 가시게. 단 한번 만났지만, 나는 그대를 영웅으로 인정하고 있네. 자식들을 살려두어 자네의 제사를 끊지 않겠네. 또한, 조충, 조식은 영특하니 관직의 길도 열어 주겠어. 그들이 바보같은 생각을 품지 않도록 자네가 저승에서라도 돌봐 주시게.'
원매는 치소로 돌아간 후, 홀로 술을 기울이며 조조에 대한 추억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