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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웅 삼국지 - 원소 셋째 아들 천하를 품다-183화 (183/253)

# 183

제183장. 한심한 놈. 멍청한 놈. 못된 놈.

"휴- 아만아- 어찌 네가 이렇게 처참하게 몰락한 것이더냐?"

조조는 자책하며 술을 들이켰다. 전풍이 다녀간 이후로 우울했던 마음이 더욱 울적해졌던 것이다. 어차피 난세가 끝나면 패배한 자들은 역사의 뒷편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 대상이 될 것이 확실해진 지금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본초(원소)가 참으로 부럽구나. 결국은 그가 승자가 되었어."

조조는 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연이어 독한 술을 넘기자 정신은 맑았지만, 몸이 휘청였다.

"묘재(하후연). 이리 와. 자네도 한잔 받아."

"주군. 크흑. 분합니다. 억울합니다."

"한 잔 받아."

하후연이 엎드려 울기만 하자, 조조는 잔을 하후돈에게 돌렸다.

"원양. 자네가 받아. 어서."

"예. 주군."

하후돈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술잔을 공손히 받아 입에 털어 넣었다.

"원양. 자네 생각은 어때? 내가 어찌했으면 좋겠어?"

"글쎄요. 저야 ..... 뭐 .... 주군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하후돈을 보며 조조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후연처럼 머리가 잘 돌아가지도 않고, 용맹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죽으면 그저 시키는 일이나 처리할 줄 아는 하후돈이 어찌 될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 오히려 특출한 능력이 없으니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겠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하후연을 바라보았다. 기습과 돌격에 능한 기병대장. 이것이 세간이 평가하는 하후연이었다. 하지만, 조조를 비롯한 몇 명만이 그의 진가를 알고 있었다. 그의 두뇌는 책사를 해도 충분할만큼 영리하다는 것을. 실제로 자식인 하후패는 지용겸비 무장으로, 하후위, 하후화, 하후혜는 뛰어난 정치가로 명성이 높았다.

"묘재야. 내가 죽더라도 너만큼은 목숨을 부지하게 해주마. 이 형이 해줄게 그것밖에 없어."

하후연은 계속해서 흐느낄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모두 물러가라!"

조조는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러 하후연과 하후돈을 물리쳤다. 우금, 악진, 조인, 조순등 아끼던 장수들이 생각났다. 모두 자신을 따르다가 원매에게 죽음을 당한 무장이었다.

'그러고보니 원매 그놈이 많이도 죽였구나. 빌어먹을 놈같으니라고.'

조조가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밖으로 나오자, 허저가 곧바로 뒤를 따라 붙으며 부축했다.

"중강(허저)이로구나."

"예. 주군. 많이 취하셨습니다. 침소로 드시지요."

"괜찮아."

조조가 휘적거리며 앞장서자, 허저가 몇명의 호위병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조조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중강. 너는 내가 죽더라도 헛된 생각하지 말고 원매를 따르거라. 이제껏 고생만 시키고 부를 챙겨주질 못했어. 원매 그 여우같은 놈이면 너의 청렴함과 무장으로서의 능력을 알아 차리고 중용할 것이다."

"소장은 주군과 생사를 함께 할 것입니다."

허저가 이를 악물며 대답하자, 조조가 피식 웃었다.

"멍청한 놈아. 나 한명 죽으면 되는데, 네가 왜 따라 와. 그냥 눈 딱 감고 충성하면 부를 누릴 텐데."

"소장은 변절자가 되기 싫습니다."

허저의 대답에 조조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앞서 걸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하나같이 이런 놈들 투성이다.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비가 내렸다. 조조의 얼굴에서 물방울이 연신 떨어졌다. 허저가 황급히 비단 손수건을 갖다 바치자, 조조가 급히 뿌리치며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비가 오는 거야. 비가 온다고!"

"네. 비가 오는 군요."

조조의 발걸음은 계속 이어졌고, 진군의 치소 앞에서 멈춰섰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권력보다는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는 청렴한 진군이었다.

"지금이 몇 시인데 퇴청하지 않는 것이야? 여기도 한심한 놈이 있군."

조조는 고개를 흔들고는 계속 걸었다. 그의 표정은 슬퍼 보이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뿌듯해 보이기도 했다. 전혀 다른 표정이 묘하게도 동시에 그의 얼굴에 자리 잡았다.

진군은 조조가 밖에 있음을 종사관으로 부터 듣고는 버선발로 뛰쳐 나왔다.

"주군. 어인 일이십니까? 많이 늦었습니다."

"술 먹고 잠이 안 와 주정하는 중이지. 자네는 늦었는데 왜 퇴청을 안 하는게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다 망했는데 뭔 할 일이 남았어? 배가 침몰하면 얼른 탈출해야지."

"이 배가 집입니다. 작은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가 본들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배와 운명을 함께 하겠습니다."

"뭔 소리야? 옆에 더 큰 배가 있는데, 갈아 타면 돼지. 왜 망망대해로 나가려고 해?"

"주군 많이 약해지셨군요. 제가 주군을 버리고 어딜 가겠습니까? 그런 말씀은 거둬 주십시오."

"함께 걸을 텐가?"

"네. 주군."

조조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며 진군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점차 약해지는 조조를 보며 진군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발걸음은 순욱의 치소 앞에서 멈췄다. 잠시 후, 순욱이 꼿꼿한 걸음으로 나와 조조를 반겼다.

"주군. 어서 오십시오."

"문약! 아니지. 아냐. 문약선생! 어찌 술이나 먹고 취해서 비틀거리는 나를 호통치지 않으시는가?"

"주군의 아픈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더라도 누구도 주군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네는 어찌 하겠는가?"

"저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음울한 표정으로 말하는 순욱을 보며 조조는 마음이 아팠다. 한漢의 충성스런 신하인 그가 기冀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어쩌면 순욱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보게. 유씨가 아니더라도 명군이 나올 수 있지 않은가?"

"그럴 것입니다. 세상에 현자는 많으니까요. 하지만, 제 마음속에는 오로지 유씨의 한漢밖에 없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태어난 것을요. 허허허-"

"다른 놈들도 한심하고 멍청하지만, 문약 자네가 제일 한심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조는 발걸음을 옮겼다. 순욱은 조용히 예를 표했다. 한동안 구부린 허리를 펴지 못하던 그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간 열심히 살았다.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결코 비루하게 연명하지 않을 것이다.'

순욱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조조의 걸음은 곽가의 치소 앞에서 멈췄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치소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곽가가 빨리 달려나와 조조에게 예를 표했다.

"주군. 어쩐 일이십니까? 휴- 술 냄새. 많이 드셨습니까?"

"그래. 많이 먹었다. 이놈아. 허구한 날 술이나 먹고 계집질이나 하던 네놈이 어쩐 일로 늦게까지 퇴청을 하지 않는 것이냐?"

"저도 일 열심히 합니다. 이거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뭘 너무해."

조조는 쌜쭉한 표정으로 곽가를 쳐다보며 질문했다.

"그건 그렇고 넌 어쩔거야?"

"뭘요?"

"알면서 왜 되물어? 어쩔거야?"

"글쎄요. 솔직히 선물이라도 바리바리 싸들고 가서 관직 하나 주십쇼. 이렇게 부탁하고 싶은데, 놀고 먹는다고 소문나서 청탁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낄낄낄낄-

조조가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리더니, 곽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일침을 가했다.

"하긴 술 좋아하고, 계집질 좋아하는 네놈을 내가 아니면 누가 데리고 쓴단 말이냐?"

"계집질이야 주군만 하겠습니까?"

"봉효야- 내가 원매에게 추천서 한 장 써줄까?"

"원매는 술도 잘 안 먹고, 계집질도 안 하는 아주 고리타분한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 인간 밑으로 가면 숨이 막혀 살겠습니까? 저는 주군곁에 있겠습니다."

"네놈도 죽겠다는 것이냐?"

"죽다니요? 살아야지요. 똥바닥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지 않습니까?"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하하- 그렇게 들렸습니까? 주군. 편하게 생각하시고 사십시오. 한漢이면 어떻고 기冀면 어떻습니까? 100년도 못 사는 인생. 계집끼고 술이나 거나하게 먹으면서 살면 되는 것이지요."

"이제껏 한심하고 멍청한 놈들만 봤는데, 여기 못된 놈이 있네. 야 이놈아. 빈말이라도 충성을 하겠겠습니다. 영원히 주군을 따르겠습니다. 해야지. 안 그래?"

"제가 일을 못해서 그렇지 눈치는 빠르지 않습니까? 주군.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어깨 위의 무거운 짐을 내려 놓으시지요. 저와 함께 이 빌어먹을 세상을 탓하며 술 먹고 사시지요. 평생 곁에서 술동무를 해드리겠습니다."

"됐다. 됐어. 모두 물러가!"

조조는 어느새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신하들을 물리쳤다. 허저와 호위병만이 그 뒤에 남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조조가 쓸쓸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주무실까?"

"모르겠습니다. 호위병을 보내서 알아볼까요?"

"아니다. 그냥 가보자."

황제가 머무르는 황궁은 수춘성 안에 작게 꾸며져 있었다. 사실 황궁이라 부르기에도 낯 뜨거울 정도였다. 조조가 나타나자 번을 서던 내관이 깜짝 놀라 급히 달려나왔다.

"대장군을 뵙습니다."

"그래. 폐하께서는 주무시느냐?"

"아직. 침소에 드시지 않았습니다."

"번뇌가 많으신 모양이구나. 뵙자고 청해보거라."

"예. 대장군."

잠시 후, 내관이 나와서 황제가 수락했음을 알렸다. 조조는 허저를 밖에 두고 천천히 대전으로 들어섰다. 말끔하게 꾸며져 있지만, 황제의 치소로서는 부족한게 눈에 밟혔다.

"폐하. 늦었는데 어찌 주무시지 않으십니까?"

"대장군은 어찌 쉬지 않고 예까지 오셨습니까?"

"잠이 오지 않아서요. 답답해서 거닐다 보니 이렇게 폐하를 뵙게 되었습니다. 밖의 사정을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황제는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많은 풍파를 겪었기에 조숙했다. 그나마 조조의 의해 연명하던 한漢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계시군요. 제가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황제는 짧게 탄식을 터트리고는 말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이각을 피해 왔을 때, 도와주었을 때는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하지만, 그때 대장군이 시중과 상서를 죽이고, 나를 도운 양장군(양봉)등도 백파적이라 하여 쫓아났소이다. 그 후에는 말만 황제로 살았지요. 솔직히 많이 원망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 소신의 불충이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아닙니다. 이제는 그나마 누렸던 허울좋은 황제자리도 끝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대가 있을 때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명분마저 원씨들에게 빼앗기게 되었으니 참으로 내 인생이 기구합니다. 죽어서 선황들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모두 알고 계셨군요.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

조조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려 사죄를 청했다. 황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던 조조였지만, 이제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하는 위치에 이르자, 황제가 그저 가엾게 느껴졌던 것이다.

"한漢을 끝까지 지키지는 못하겠지만, 폐하가 천수를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소."

조조는 물끄러미 황제를 보다가 예를 표하고는 물러났다. 처음 보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래. 이렇게 이야기라도 나누고 보니 훨씬 낫군. 욕심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 이제 준비를 해야겠어. 준비를.'

조조는 비틀거리며 침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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