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제178장. 나부터 살아야겠다.
합비성. 태사자치소.
"크흑-"
쾅! 태사자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얄싸하게 만들어졌던 탁자는 태사자의 주먹질에 그대로 반토막이 났다. 그는 부서진 탁자를 내던지고는 침상에 털썩 앉았다.
"이꼴을 하고 어찌 주군(주유)을 뵙는단 말인가? 단 한번의 전투에서 모든 것을 잃다니. 이런 치욕스런 패배가 어디 있단 말인가?"
태사자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그가 크게 자책하고 있을 때, 능조와 하제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어인 일이시오?"
태사자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들에게 자리를 가리켰다. 능조와 하제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선임인 능조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태사장군.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태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요? 병사들을 재편하고, 도주해 오는 그들을 합류시켜서 다시 전투준비를 해야지요. 이런 치욕을 받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소이까?"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능조는 난감한지 헛기침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지금 이 성에 있는 병사가 1만 7천쯤됩니다. 그 중에 우리 병사들은 겨우 9천입니다. 무려 2만 1천이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설령 며칠을 기다려 병력이 보충된다 하더라도 결코 2만 5천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저들이 성을 포위하면 어쩌겠습니까?"
태사자는 그제야 능조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무섭게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요? 설마 상황이 일시 불리하다고 도주라도 하잔 말이오?"
"전략상후퇴입니다."
"그게 도주야!"
태사자가 거칠게 윽박질렀지만, 하제와 능조는 놀라지 않았다. 이번에는 하제가 나섰다.
"만약 저들이 성을 포위하고 수성전으로 간다면 성안의 군량을 볼 때, 기껏해야 두 달입니다. 그 다음은 죽거나 항복해야 합니다. 저야 없다고 치더라도 주군께 큰 손실이 아니지만, 만에 하나 태사장군이 주군 곁에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실망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누굴 믿고 강동을 지켜나가겠습니까?"
태사자는 움찔했다. 주유가 강동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주유는 처음부터 자신을 강력하게 지지한 태사자에게 무한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휴- 이 사람들아. 어찌 그걸 내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이런 치욕을 당하고 어찌.......?"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조조는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원매는 조조를 무너뜨리고 수군을 정비하여 반드시 강동으로 창끝을 돌릴 것입니다. 그 때는 한 명의 장수, 한 명의 병사가 아쉽습니다. 개인의 감정은 잠시 접어 두고, 대의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제는 이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태사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무장의 자존심상 도저히 후퇴한다는 것을 받아 들일 수 없었지만, 하제와 능조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모두 죽기라도 한다면 주유가 큰 타격을 받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치소안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에 태사자가 결심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대들의 의견이 옳소. 내 한 목숨 잃는 것이야 어찌 큰일이겠냐마는 감히 주군께 근심을 끼쳐드리고 불충을 할 수는 없소이다. 내일 아침에 정식으로 장료, 만총에게 통보하고 떠납시다. 그러니 그대들은 돌아가서 준비해주시오."
"어차피 네 개의 성문중에 두 개는 우리가 지키고 있으니, 그대로 떠나시지요. 저들이 후퇴하지 못 하도록 붙잡을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알아서 하겠소. 그러니 아침에 떠날 준비를 하시오."
단호하게 말을 자르자, 능조와 하제는 움찔하고는 일어서서 군례를 올리고 밖으로 나섰다. 태사자는 누웠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새운 태사자는 새벽녘에 만총을 찾았다. 지휘소에서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밤새 고민하던 만총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태사자를 맞이했다.
"태사장군. 아침 일찍 어인 일이십니까?"
"그동안 수고했소. 우리는 오늘 부로 강동으로 돌아가겠소."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돌아가다니요?"
"후퇴하겠다 이 말입니다. 그럼."
태사자가 할 말을 하고 등을 돌리자, 만총이 악을 쓰며 그를 잡았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한 번 패배했지만, 끝난 것은 아닙니다. 태사장군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시지요."
"놓으시오!"
완강하게 뿌리치자,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만총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소란스러워지자 선잠을 자고 있던 장료가 지휘소로 들어섰다. 만총은 급히 장료에게 달려가 그간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태사자를 말려줄 것을 요청했다.
"태사장군. 이렇게 떠나야 하겠소이까? 저놈들에게 당한 치욕을 되갚아 주지도 않고 비겁하게 물러날 심산입니까?"
장료의 도발에 태사자는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의 단호한 의지를 확인한 장료는 더는 붙잡지 않았다. 만류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만총은 장료와 달리 포기하지 않았다. 태사자와 그의 병력이 빠져나간다면 더는 전투를 치를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총의 명령에 호위병들이 태사자를 막아서자, 태사자의 입에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만장군. 이대로 나를 놓아 주시오. 내가 생사를 같이 했던 이들을 죽이고 가야겠소?"
"이곳에 남아서 도와 주십시오! 며칠만 있으면 흩어졌던 병사들이 모일 테고, 그러면 다시 승부를 걸 수 있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했소. 원망하지 마시오."
태사자는 낮게 말하며 대도를 뽑아들었다.
"비켜라! 막는 놈은 모조리 도륙을 낼 것이다!"
"모두 물러서!"
장료의 명령에 호위병들이 길을 열었다. 태사자가 성큼성큼 움직이자, 장료가 그의 등에 대고 간절하게 소리쳤다.
"중간에 마음이 바뀌시면 돌아와서 도와주시오!"
태사자는 멈칫했다가 그대로 지휘소를 빠져나왔다. 그길로 태사자와 능조, 하제는 9천의 병력을 데리고 유수구로 이동하여, 배를 타고 강동으로 향했다.
여강군 성덕현.
방덕과 조운은 기병을 이끌고 돌아간 상황이었고, 위연은 이곳에 남아서 항병을 재교육하고 부대를 재편성하고 있었다. 또한, 항병들을 이용해서 전장정리를 하였다. 낮은 언덕위에 올라 전체적으로 감독하는 위연에게 선임교위가 달려와 한쪽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장군. 전투가용병력은 아군 1만 8천, 항병 2만 1천입니다. 항병들은 지시에 순응하고 있으며, 재교육 또한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현재 전장정리는 ....... "
선임교위의 보고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위연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1만 2천이 죽거나 전투불능이 되었다니. 이래 가지고 어찌 전하를 뵌단 말인가?'
3만중 1만 2천이나 전투불능이 된 상황을 위연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지난 전투는 극악의 조건이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아니, 포위된 형국까지 고려하면 선방했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자존심이 강한 위연이 결과에 쉽게 수긍하지 못할 뿐이었다.
보고가 끝나자 위연은 선임교위를 위로하고는 전장정리와 항병재교육, 재편성등을 철저하게 시행할 것을 지시했다. 그는 마음이 답답해지자, 일어서서 주변을 거닐었다. 아직도 죽은 사람에게서 나는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빌어먹을 냄새는 언제나 짜증이 났다.
수춘성 원매치소.
"잘했어! 정말 고생했어!"
원매는 조운과 방덕으로부터 전투결과를 보고 받고는 격하게 그들을 칭찬했다. 겉으로 표현은 안했지만, 내심 병력을 적게 보내서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조바심이 일기도 했었다.
그의 조바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렇게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자 그 기쁨은 배가 되었다. 장수들에게 술을 하사하고, 병사들에게도 술과 고기가 내려졌다. 방덕이 병사들에게 돌아갔지만, 조운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원매곁으로 돌아왔다.
"조자룡! 자네도 고생했으니 술한잔하고 오늘은 좀 쉬게!"
"전투가 끝나면 쉬겠습니다. 사실 전하의 곁을 떠나 전장으로 향하면서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이렇게 전하 뒤에서 호위를 하게 되니 안정됩니다."
"이봐! 이봐! 내가 자네보다 강하다고!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보이지 않는 칼은 막기 어려운 법입니다. 자만하지 마십시오."
원매는 솔직한 조운이 좋았다. 이런 자는 거짓이 없다. 하지만, 조금은 재미가 있으면 어떨까? 하지만,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조자룡! 자네는 내가 명령을 내리면 복명하지?"
"물론입니다. 하명하십시오. 전하!"
"오늘 쉬어! 가봐!"
"예?"
"쉬라고. 이게 자네에게 내리는 명령일세. 잠을 자든 술을 먹든 상관하지 않겠네. 만약 일을 하다 걸리면 절대 용서치 않겠어! 알겠는가?"
조운은 망설이다가 군례를 올리고는 물러났다.
"좀 쉴 줄도 알아야지. 일중독이야."
원매가 고개를 흔들자, 가만히 있던 전풍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원매는 뜨끔했다.
"무슨 의미요?"
"조장군을 나무라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하야 말로 일중독이 아니십니까?"
"그런가? 전태부는 어떠시오?"
"저도 일중독입니다. 전하 주변에는 대부분 그런 사람들입니다.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을 닮는 법이니까요. 흐흐흐흐."
"이거야 원.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군."
"칭찬입니다. 다만, 전하께서도 일을 조절하셔야 합니다. 전하께서 늦게까지 안 주무시며 일하고, 술도 안 먹고, 너무 반듯하게 생활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게 나쁜 것은 아닌데, 아랫사람들은 더 노력해야 하는 상황이라 죽을 맛입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지금 조조와의 전투중인데, 딴 생각을 할 수는 없지 않소이까?"
"당연하지요. 제 말은 조조를 정복하면 업성으로 돌아가서 장수와 병사들에게 정비시간을 주시고, 전하께서도 휴식을 취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 힘을 회복한 후에 주유와 유비를 공격하여 정복하면 됩니다. 사실 그동안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죽어라 달려왔습니다. 제 눈에는 모두 지쳐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원매는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간 고생하며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의 과정이 눈 앞에 선하게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쉴 새 없이 달려온 나날이었다. 차기 황제까지 예약된 현재의 상황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전태부. 충고 고맙소. 내 그대의 뜻대로 조조와의 전투가 끝나면 휴식을 갖겠소."
"감사합니다. 전하."
고개를 숙인 전풍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전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잘 수용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응? 놀라운 능력이란 말은 좀 그런데."
"놀라운 능력이 맞습니다. 높은 위치에 올라가면 사람들이 변합니다. 특히 고집이 세지고, 신하들의 옳은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간신들의 달콤한 말에 현혹되어 나라를 망치기도 합니다."
"내가 바보는 아니니까. 난 말이오. 욕심이 많은 사람이오. 기冀를 주도적으로 세운 것도 나요. 또한,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소. 하지만, 멍청하지는 않소. 역사에서 반복되는 바보짓거리를 해서 후세에 욕먹고 싶지 않소이다. 이것이 솔직한 내 마음이오."
"그 마음 변치마셔야 합니다. 올바른 심성을 가진 영특한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하며 나라를 이끌어 나간다면 요순시대의 태평성대가 올 것입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소. 모든 것을 내 손으로 이루겠다는 생각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제도를 정착시키고 싶소이다. 지금 중원에서 혜택을 누리면서 사람답게 사는 사람은 100명중 2~3명일 것이오. 나는 최소 100명중 30명까지는 늘리고 싶소이다."
"재원은 한정되어 있는 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전풍은 호족들이 모든 것을 쥐고 있는 이 상황에서 원매의 생각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두고 봅시다."
원매는 입을 닫았다. 개혁정책은 전격적으로 시행되어야 했기에, 전풍에게도 함부로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