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제153장. 양평관을 얻다.
파재가 보낸 전령이 원매에게 도착했을 때, 정탁도 성도에 도착해 비관과 함께 보고를 하고 있었다.
“뭐. 황금 5관? 아니 이 새끼가 나한테 맡겨놓았나?”
유장이 분통을 터트리며 탁자를 탕-하고 치자, 정탁이 움찔했다. 유장은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고 다시 입을 열어 분통을 터트렸다.
“그래서 자네는 그걸 해준다고 넙죽 약조하고 왔단 말인가?”
정탁은 상황이 여의치 않자, 재빨리 비관에게 눈짓을 하며 구원 요청했다. 비관이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주군. 만약 양평관 성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병사가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이서란 놈이 과하게 요구하는 것은 맞지만, 나중에 한중을 얻고, 장안을 얻을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때는 병사 한 명이 아쉬울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황금으로 병사들의 목숨을 샀다고 생각하십시오. 여기 정별가도 황당했겠지만, 그런 의도에서 수락했을 것입니다.”
“에이- 생각할수록 울화통이 터지는구먼. 황금 5관이라니. 허 참.”
유장은 답답한 듯 인상을 쓰더니 마지못해 승낙했다. 그 후, 주요장수들을 치소로 불러들였다. 본격적인 북벌을 준비하려는 조치였다. 고패, 냉포, 오의, 방희, 오반, 한수가 참석했다. 유장이 손짓을 하자, 비관이 앞으로 나와 보고를 시작했다. 장수들은 비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 작전은 번개처럼 빠르게 시행되어야 합니다. 한중군만 점령된다면 그곳을 발판으로 하여 장안까지 노려볼 수 있습니다.”
방희가 오연하게 의견을 밝혔다.
“계책은 좋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이서가 거짓을 말한다면 어찌할 것이오? 양평관까지는 잔도라서 저놈들이 숨어 있다가 역습이라도 한다면 끔찍한 결과가 나올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셨소?”
“정별가(정탁)가 협상을 한 후, 며칠을 그곳에 머물면서 살폈는데, 상부에 보고하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차분히 살핀 연후에 내린 결정입니다.”
“그런가? 정별가가 그리했다면 믿음이 가는군.”
평소에 영특하다고 생각했던 정탁이었던지라 방희는 바로 수긍했다. 다른 장수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보였지만, 오직 한 사람 한수는 조금 불안한 표정이었다. 비관은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이번 전투에는 보병 10만, 기병 1만을 동원할 예정입니다. 한장군께서 기병을 이끌고 선봉에 서셨으면 합니다. 그 뒤를 여기에 계신 장군들께서 10만의 보병을 이끌고 따를 것입니다. 방어는 형주와 장강으로 연결되는 구어현에 엄안, 파군의 치소인 강주에 장임, 건위군 한안에 뇌동, 성도에 등현을 두어 단단히 지킬 것이니 후방은 염려를 놓아도 됩니다.”
유장이 거만하게 둘러보다 한수와 눈이 맞았다.
“한장군. 어디 불편하신가?”
“아닙니다. 갑자기 전투가 진행되니 조금 당황스러워서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선봉을 서는 데 문제없겠지?”
“명을 따르겠습니다.”
유장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한수와 유비의 관계를 알진 못했지만, 요즘 그의 행동이 뭔가 석연치 않았기에 선봉으로 내세워 그의 본심을 알려고 했다.
그날부로 유장은 군대를 일으켰다. 대장을 방희로 삼아서 출병시켰다. 뿌연 먼지구름을 만들며 진군하는 군대의 뒷모습을 보면서 유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방희라면 믿을 수 있겠지?”
“지략이 뛰어난 장수입니다. 그리고 오의가 보좌할 테고, 고패, 냉포, 오반은 무예가 뛰어난 장수이니 괜찮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지략과 무력이 뛰어난 자들로 잘 구성되었습니다. 솔직히 한중은 양평관을 넘는 것이 문제지, 그것만 넘는다면 점령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유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희가 한중을 점령하고, 가능하면 장안까지 진출할 것이다. 그렇다면 유장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 되고, 원매도 뒤통수가 뜨끔할 것이다. 유장은 기분이 좋은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휴우-”
한수는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 생각과는 정반대로 상황이 전개되면서 완전히 꼬였다.
‘내가 유장을 좀 얕보았던 것 같구나. 유비와 몰래 손을 잡은 것을 눈치챈 것일까? 아냐. 그릴 리가 없어. 그랬다면 나를 가만두지 않았겠지. 이놈이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이리 나오는 것이 분명한데. 큰일이로구나. 유비와 뒤를 쳐서 익주를 분할 한다는 계획은 이대로 물 건너간단 말인가?’
한수는 암담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체념한 듯 기병들을 이끌고 조심스럽게 행군했다. 면죽관을 지나 잔도로 들어서면서 더는 잡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길이 매우 위험했기에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파재는 정탁이 다녀간 후로, 면죽관에서 양평관에 이르는 통로에 정찰병을 깊숙이 숨겨두고는 면밀하게 유장의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기다리던 연락이 도착했다.
남정현 장부치소.
장부는 탄식을 터트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치소 안을 서성거렸다. 양평관의 이서에게서 유장군이 올라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남정성을 저놈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단 말인가? 잠시라지만, 아버님께서 피땀으로 일궈놓으신 한중을 넘겨주려니 피눈물이 나는구나. 왜 이런 일이 내게 벌어진단 말인가? 왜?’
장부가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자, 강합이 다가와서 진언을 올렸다. 강합은 장패휘하에서 장안을 지키는 장수였는데, 이번에 원매의 명령으로 파재를 돕기 위해 1만을 이끌고 낙곡도 관문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가 장부를 다시 설득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태수의 마음은 잘 압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내린 명령입니다. 이를 두고 왈가불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행여 나중에라도 책잡히지 마시고, 철수를 서두르십시오.”
단호한 강합의 진언에 장부는 그를 노려보았다.
“나도 압니다. 알아요. 휴-”
“아는 분이 이렇게 우유부단하게 행동하십니까?”
“알겠소.”
장부는 힘없이 대답했다. 그의 입에서 남정성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이제 이곳의 백성들과 장수들은 성고성으로 옮길 것이다. 한중의 평야를 대부분 내주어 유장을 안심시키는 것이 목적이지만, 이를 되찾기 위해서 성고성과 낙곡도 관문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
양평관.
정탁은 먼저 수행원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가 숨어서 조심스럽게 살폈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위병들은 돈을 빼앗고 있었고, 주변의 경계 또한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하고는 성안으로 들어섰다.
정탁이 왔다는 말에 이서가 주변의 사람을 물리치고, 외진 곳으로 이끌었다.
“여기 황금 5관이오.”
볼품없는 묵직한 주머니를 일일이 확인한 이서의 얼굴은 그제야 환해졌다.
“역시 확실하군요. 언제쯤 성문을 열어주면 되겠소이까?”
“내일 새벽이면 선발대가 올 것이니, 그때 열어주시오. 설마, 그때 가서 딴소리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목숨이 몇 개라고 그런 짓을 하겠소이까? 나도 이 지긋지긋한 한중이 싫소이다. 이 돈으로 중원으로 가서 편하게 살 생각이오.”
“유목사를 따르는 것이 아니오?”
“한중은 이제 어찌 되든 내 알 바 아니오. 난 이곳을 떠나겠소. 그러니 맘대로 하시오.”
정탁은 뭔가 어그러진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더는 이서를 만류하지 못했다. 괜히 마음을 바꿔서 성문을 안 열겠다고 하면, 더 큰 일이기 때문이었다. 한중이 싫어서 떠나겠다는데 어떻게 만류하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제가 이곳에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정탁은 이서가 제공하는 숙소에 머물면서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데, 아무리 촉수를 뻗어도 특별한 사항은 감지되지 않았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실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고는 그간 쌓인 피곤을 풀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벌써 어두운 밤이었다. 몇 시간 후면 선발대가 도착한다고 생각하자,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는 급히 일행을 불러서 단단히 경계하라고 지시한 후, 곧바로 이서를 찾았다.
치소에 도착하자 이서는 단단하게 갑옷을 챙겨입은 상태였고, 주변에는 못 보던 정예호위병들이 있었는데, 그 기세가 사뭇 날카로웠다. 정탁은 속았다는 생각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이··· 이장군. 나를 속인 것이오?”
떨리는 정탁의 목소리와는 별개로 이서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뭔 소리요? 내가 한중을 떠난다고 하지 않았소. 그대의 군대가 오기 전에 떠나려고 이렇게 준비 중이요. 솔직히 나 혼자 도망치면 얼마 못 가 산적들에게 죽임이나 당할 것이오. 그래서 일부 사병을 데리고 갈 것이니, 그대가 남아서 성문을 여시오. 황금은 고맙게 잘 쓰겠소. 흐흐흐-”
이서는 정탁의 어깨를 툭 치고는 일천의 정예병을 이끌고 양평관을 나서 북쪽으로 내달렸다. 정탁은 혼란스러웠지만, 그곳의 늙은 병사들과 사마들은 이서에게 명령을 받았는지 정탁의 명령을 무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병력이 얼마 되느냐?”
“삼천입니다.”
“모두 네놈들처럼 노병이더냐?”
“그렇습니다. 이장군께서 앞으로 정대인을 잘 따르라고 명령을 내리고 가셨습니다.”
“알겠다. 지금 즉시 성문을 열거라!”
“예. 대인.”
사마가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물러가자, 정탁은 헛웃음이 나왔다. 한중의 관문인 양평관이 이렇게 쉽게 손아귀에 들어올 줄이야.
‘이서란 놈도 참 희한한 성격을 가진 놈이로구나. 덕분에 주군께서 한중군을 무난하게 접수하게 되었으니 다행이긴 하지. 덕분에 앞으로 내 출셋길도 열리겠어.’
정탁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성문을 열고 서성이고 있을 때, 한수가 이끄는 기병이 제일 먼저 도착했고, 그 뒤를 이어서 보병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곳을 지키던 노병들은 갑작스러운 유장군의 등장에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새벽부터 오전까지 계속해서 병사들이 밀려 들어왔고, 꽤 큰 양평관이 병사로 가득 찼다. 방희는 양평관에 입성하여 상황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유장에게 전령을 보냈다.
“정별가(정탁). 고생했소. 험한 양평관을 이리 쉽게 얻다니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구려.”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서란 자는 ······.”
방희는 정탁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좀 희한한 놈이로군. 어쨌든 이곳을 넘겨주었으니, 더는 그놈을 신경 쓰지 말게. 이곳 한중군을 설명해봐.”
“예. 장군.”
정탁은 지시봉으로 상황판을 짚어가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하루 거리에 한중군 치소인 남정성이 있고, 평야는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평야가 끝나는 동북쪽 끝자락에 성고성이 있는데, 그곳에 이곳의 치안을 담당하는 파재가 있다고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남정성과 성고성을 함락시키면 한중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 병력은 얼마 정도 있으려나?”
“정확하게는 모릅니다만, 남정성에 1만, 성고성에 2만이 있다고 이서에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상황을 볼 때, 그곳도 그리 대단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방장군께서 공격하시면 곧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흠-”
방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공성전을 그리 만만하게 여기면 안 돼. 수많은 목숨이 날아가는 것이 공성전이야. 파재가 성고성에 있다니, 남정성부터 점령하지. 그 후에, 태수를 생포하면 파재를 설득시킬 묘책이 나올지도 몰라. 장수들을 집합시켜!”
“예. 장군.”
방희의 칼끝같은 명령에 정탁이 군례를 올리며 물러났다. 방희는 주먹을 말아쥐고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동안 그토록 얻으려 해도 끄떡도 안 하던 한중이 이제는 내 손아귀로 들어오는구나. 반드시 파재의 목을 베어 한중을 차지하고 말 것이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