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제141장. 고민苦悶, 탄식呑食.
곽독은 심각한 표정으로 병사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는 다시 병사들을 돌려보낸 후, 무거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결국, 예상했던 대로 조조가 우회 기동하여 후방을 기습하는구나. 군량과 건초를 버려야 하다니 속이 쓰리구나. 이곳에 절반, 수현성에 절반이 있으니 앞으로 주군께서 보름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2만이 넘는 병력이고, 기병도 수천이 된다는 말에 곽독은 이를 악물었다. 군수지원을 담당하는 병사들이 대부분이고, 겨우 1만으로 조조군을 대적할 수 없었다. 곽독은 조금 망설이다가 군량과 건초를 겹겹으로 배치했다. 마치 여러 겹의 성벽을 쌓은 것처럼 배치했다.
곧 저 멀리서 뿌연 먼지구름이 일기 시작했다. 조조군이었다. 곽독은 이를 악물었다.
“퇴각한다! 수현성으로 퇴각한다!”
곽독이 정예병사들을 이끌고 조조군을 막아섰고, 나머지 군수지원을 담당하던 병사들은 수현성으로 도주를 개시했다. 군량을 여러 겹으로 쌓아 장애물을 만들어 놓았다지만, 많은 병사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저놈들에게 승리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병사들과 군량을 희생해야 하니 피눈물이 나는구나.’
곽독의 명령에 1천의 병사들이 창을 쥐고 백병전에 대비했고, 1천의 궁수들이 활 쏠 준비를 하였다.
“기다려라!”
멈칫하던 곽독의 손이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신호로 1천의 화살이 일제히 발사되었다. 선두에서 치고 들어오는 조순의 5천 기병에게 쏟아붓는 화살이었다. 애초 기병을 활로 제압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최선을 다해 공격하고 도망쳐야 했기에 계속해서 화살을 발사했다.
군량과 수레, 건초의 일차 저지선이 힘없이 무너지자, 곽독은 결국 후퇴명령을 내렸다.
“수현성으로 도주한다!”
후퇴가 아닌 도주였다. 곽독이 호위기병에 둘러싸여 도주하였고, 그 뒤를 미칠 듯이 병사들이 뛰어서 도주했다. 뒤를 따라 잡히는 병사들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면서 뱉어내는 비명은 곽독의 애간장을 끊었다.
겨우 수현성으로 쫓겨 들어왔을 때, 2천의 정예병 중 살아남은 자는 겨우 5백이 안 되었다. 1천 5백은 죽거나 행방불명된 것이다.
병사들은 살았다는 안도감에 울음을 터트렸고, 곽독은 그런 그들을 다독이며 달랬다.
장료는 좀 찜찜한 표정으로 수현성을 지켜보고 있었다. 1만으로 성을 둘러싸고, 1만으로 군량과 건초를 모으게 하였다. 잠시 후 곽독군을 뒤쫓아 도살하던 조순이 기병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장장군. 이거 너무 싱겁지 않소이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분명히 저놈들이 기습을 당해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주한 것은 맞는데, 뭔지 마음 한쪽이 찜찜하오이다.”
“작전이 수월하게 진행되었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겠지요. 일꾼이나 지원병들은 바로 도망쳤고, 나머지 병사들도 대항하다가 줄행랑을 놓았소. 내가 뒤를 쫓아가서 대부분 죽여버렸소. 만약 저놈들이 우리가 올 것을 알았다면 성안에서 숨어있지 않았겠소?”
장료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정황상으로는 조순의 이야기가 맞았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조순도 항상 책을 가까이했던 지략이 뛰어난 장수인지라, 장료의 걱정을 눈치챘다.
“그럼. 이리 합시다. 군량과 건초를 모조리 태워버리고, 돌아갑시다. 공성전을 한다면 시간만 많이 잡아먹고, 공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오. 주군께서는 이 정도 성과면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조장군. 만약 이것이 처음부터 의도한 함정이었다면, 저들이 어찌 나오리라 생각하시오?”
“글쎄요. 누구를 노리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만약, 나나 장장군을 노린다면 돌아가는 길에 매복을 심을 확률이 높고, 주군을 노린다면 우리가 없는 틈을 타서 총공격에 나서겠지요.”
“나는 원매가 두 가지를 다 노린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면 분명히 막아설 것입니다. 지연만 시키더라도 저들은 큰 이득을 얻을 테니까요. 그렇게 시간을 벌면서 주군을 강하게 압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략에 걸렸다는 얘기인데, 어찌하면 좋겠소? 흠- 이렇게 하면 어떻소? 우리가 북쪽에 있고, 이제 저들이 남쪽에 있으니 화공을 쓴다면 저들도 막아서기 어려울 것이오.”
“저들이 불을 놓으면서 우리가 지나쳐온 샛길도 반 정도는 불에 탄 상황이오.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겠지만, 매복군을 몰아낼 정도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또 화공에 대비하여 미리 불을 질러놓고, 그다음에 매복한다면 의미가 없겠지요.”
조순은 생각에 잠겼다. 장료의 말이 분명히 일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계속 버틸 수는 없고, 임무를 완수하면 돌아가야 한다.
“장장군. 이리 합시다. 장군께서 군량과 건초를 모아 불을 지르시오. 이게 우리의 목적이니 빨리 시행하시오. 그동안 내가 기병들을 보내서 적의 유무를 확인하겠소. 만약 저들이 막아선다면 돌아오고, 없으면 빠르게 그길로 돌아갑시다.”
“만약에 막아선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서쪽의 면수를 따라 돌아가야지요. 빠르게 행군해도 6일은 걸릴 것입니다.”
“휴- 어쩔 수 없지요. 그리 합시다.”
장료는 군사들을 불러모아 군량과 건초를 모으고 불태우기 시작했고, 조순은 기병을 이끌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장료가 군량을 태우는 거대한 연기는 매우 크게 솟았고, 원매와 조조군영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피어오르는 연기에 백병전을 시작하지 않고 양측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원매군영.
서서가 급히 원매를 찾았다.
“전하! 장료가 함정에 빠진 것 같습니다. 저 정도의 연기라면 수많은 군량을 태우는 것이 분명합니다. 군량을 태웠다면 다시 돌아갈 테니, 매복하여 타격을 입히는 것이 어떻습니까?”
“좋아. 장수에게 1만을 주어 길을 막으라고 하게. 격멸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시간만 끌어도 된다고 해. 그 사이에 조조를 박살 내 버릴 테니까.”
“예. 전하!”
서서가 곧바로 밖으로 나가서 명령을 전달했고, 후방에 있던 장수는 급히 1만을 차출 하여 서쪽의 골짜기로 이동했다.
조조군영.
“주군. 감축드립니다. 장료/조순이 성공했습니다. 이제 군량이 불탔으니 저들은 결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넉넉잡고 10 일만 버틴다면 결국 군량 부족으로 물러날 것입니다.”
조조는 오랜만에 훈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후방기습이 성공한 것이다. 실패했다면 저렇게 거대한 연기가 피어오를 리가 없었다.
“원매가 지금 당황했겠어. 흐흐흐흐- 어제도 먼저 공격하던 놈이 지금 저렇게 넋을 놓고 있잖아.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려. 단단히 준비하고 있다가 원매가 공격하면 맞대응하라고.”
“예. 주군!”
곽가가 밝은 얼굴로 군례를 올리고는 곧바로 물러났다. 조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한 번의 기회가 오는 것인가? 일단 원매의 공격을 버티다가 장료/관우가 합류한다면 충분히 원매를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잘해야 열흘 정도 버티겠지. 군량도 없는 주제에 얼마나 버티겠는가?’
원매는 장수를 보내놓고는 문추, 위연, 마초, 방덕, 조운을 불러 재차 상황을 확인시켰다.
“지금 후방에서 곽독이 지키던 군량과 건초의 절반이 불에 탔소. 이제 남은 것은 보름치 정도인데, 병사들을 독려하여 그 안에 반드시 조조 연합군을 격파해야 하오. 장수가 그들이 돌아오는 길을 막으러 출병했으니 장료군이 오는 것을 막지는 못해도 지연은 시킬 것이오. 그러니 이제부터는 강하게 밀어붙이시오. 알겠소?”
“예. 전하!”
“위장군! 문장군! 지금 즉시 조조를 공격하시오!”
원매의 명령에 위연과 문추가 군례를 올리고는 지휘소를 빠져나갔다.
“마장군! 방장군! 어제처럼 기병들이 언제든 출병할 수 있도록 말을 잘 관리하고, 준비하시오. 틈이 나면 명령을 내리겠소. 기병이 출병하는 것은 적당히 우세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적을 완전히 격파하기 위함임을 명심하시오.”
“명을 따르겠습니다.”
마초, 방덕이 밖으로 나가자, 조운만이 듬직하게 자리를 지켰다.
“조자룡! 자네도 준비해두게. 나도 출병할 거야! 이번에는 끝장을 봐야지.”
“알겠습니다.”
원매의 공격으로 또다시 대규모 혈전이 벌어졌다. 대군이 평원에서 맞붙은 전투는 좀처럼 한쪽으로 밀리지 않았다. 문추와 위연이 독전병까지 동원하며 독려했지만, 조조군은 기습이 성공했다고 믿어서 그런지 기세가 전에 없이 날카로웠다.
오전에 시작된 전투는 그렇게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이다가 저녁이 되면서 끝이 났다. 양측 합해서 수천의 병사들이 애꿎은 목숨을 버렸다.
문추는 이틀 동안 강력하게 밀어붙이고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자,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문장군!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곧 우리가 승세를 잡을 것이오.”
“저들이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했는지, 병사들의 사기가 꽤 높아 보였소. 어떻게 우리가 곧 승기를 잡는다 생각하시오?”
“수적으로 우세하니까요. 지금은 워낙 대규모로 붙는 전투다 보니 수적우세가 없다고 생각이 들지만, 계속 전투를 벌여서 피로가 쌓이면 그때는 확연하게 수적우세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 기병을 투입하면 끝입니다.”
문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지루한 전투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아침이 되면 소모전을 벌이고, 밤이 되면 병력을 재편성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짜증이 났다.
이튿날.
날이 밝자 문추와 위연은 작심한 듯 다시 공격에 나섰다. 오늘은 어제와 조금 달랐다. 통나무 부대를 숨겨놓고, 보병으로 공격하였다. 처음에는 그전과 같은 밀고 밀리는 혈전을 지속하였지만, 약간의 틈이 보이자 뒤에 숨어있던 통나무 부대를 돌격시켰다. 통나무를 들고 돌격하자, 거칠게 조조군을 뚫고 들어갔고, 그 뒤를 정예병이 따르면서 전과가 확대되었다.
“돌격하라! 모조리 죽여라!”
문추는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서 북을 치며 독전을 거듭했다. 곳곳이 뚫리면서 조조군의 대형이 무너졌고, 원매군은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원매는 끝내 기병 돌격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 판단한 것이다.
조조군영.
“이봐. 곽봉효. 저놈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은데, 이상하지 않아? 분명히 후방의 군량이 불탔어. 그럼 뭔가 초조하고 그래야 하는데, 오늘 전투를 보니 우리보다 기세가 더 대단해.”
곽가도 굳은 얼굴이었다.
“사실 지금쯤이면 조순의 기병은 돌아왔어야 합니다. 아니 최소한 전령을 통해서 후방상황이 어떤지를 알려왔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없습니다.”
“그 말은 뭐야? 설마 장료/조순이 당하기라도 했다는 말이야?”
“그건 아닐 것입니다. 둘 다 용맹과 지략을 갖춘 장수니까요. 군량을 태웠으니 분명히 성공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돌아오는 길이 막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쪽의 면수를 따라 크게 우회해야 하는데, 적어도 6~7일은 걸릴 것입니다. 만약에 원매가 그걸 알고, 막아선다면 더 걸릴 것이고요.”
조조는 의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고민에 빠졌다. 이번 상황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매가 노리는 것이 무엇일까? 수많은 군량을 태워가면서까지 얻으려는 게 무엇이냔 말이야?”
“확실한 수적우세를 노린 것 같습니다. 애초에 병력이 3만 정도 우세했는데, 장료/조순을 갈라놓았습니다. 이제는 5만 정도의 차이가 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버티기 힘들어질 것입니다. 만약 관우가 제대로 협조하지 않는다면 더 골치 아파지고요. 문제는 기병입니다. 저들은 2만이 그대로 버티고 있습니다. 한번 밀리면 그때 저들이 일제히 공격할 테고, 그러면 막기 힘듭니다.”
“빌어먹을! 결국, 원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 이 말이군.”
조조의 탄식을 곽가는 침묵으로 인정했다. 그의 마음도 답답했다. 기습작전을 이렇게 역이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순문약(순욱)이었다면 알아차렸을까?’
곽가는 가슴 끝이 시려 왔다. 이대로 가면 결국은 힘에서 밀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