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제 132장. 유劉-유劉-관關-장張
200년 건안 5년. 11월.
다사다난했던 건안 5년도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원소/원매가 중원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가운데, 남쪽의 주유/조조/유비, 서쪽의 유장이 버티는 형국이었다.
유비는 오랫동안 버티면서 고민했지만, 유장과의 동맹 이외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유비와 유장은 협의를 거쳐 경계지대인 익주 파군 부릉현에서 만나기로 최종협의했다.
무릉군과 파군의 경계지대는 산악지대로 매우 험했는데, 부릉현까지는 장강의 물줄기가 이어져 있어 유장은 이동하는데, 큰 불편이 없었고, 유비는 말을 타고 험한 산을 넘어야 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11월인데 날씨가 왜 이리 후덥지근하단 말이냐? 도대체 이 형남의 날씨는 죽어도 적응이 되질 않는구나.”
관우는 이번 익주행이 매우 못마땅한 듯 처음부터 계속 불평이었다. 관우는 평소 성격이 불같았던지라 한번 화가 나면 좀처럼 참지를 못했다.
“형님. 좀 참으시오. 큰형님도 좋아서 가는 것은 아니잖소. 그리고 열심히 걸으니 땀도 나고 그런 거고, 이곳이 따뜻하긴 하지만 후덥지근한 날씨는 아니오.”
“야! 이 자식아- 짜증 나서 한 말 가지고 꼬투리 잡을래?”
관우는 울화통이 터지는 듯 곁에 있던 나무를 발로 찼다. 나무가 부르르 떨리며 잎사귀가 우수수 떨어졌다.
“저놈의 성질머리하고는.”
장비가 말을 말자는 식으로 입을 닫았다. 누구 하나 대꾸하지 않자, 관우는 결국 입을 닫았고 불편한 산행은 무거운 침묵 속에 지속 되었다.
3일을 꼬박 산을 넘고 나서야 부릉현에 당도했다. 현의 치소에 도착하니, 유장의 신하들이 길게 도열하여 유비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행사의 책임을 맡은 비관이라고 합니다. 주군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공이시구려. 반갑소이다. 유비라고 합니다.”
유비는 비관을 따라 이동하면서 관리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었다. 맨 끝에는 유장이 의자에 거만히 앉아 그것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 유비는 유장을 보자 환한 웃음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이를 악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비라고 합니다.”
“반갑네. 유장 일세. 비관을 통해서 이야긴 들었어. 나를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짧은 말에 유비는 분통이 터졌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참았다.
“그렇습니다. 동맹을 맺어도 위치는 확실히 정해야 하니까요. 유목사께서 더 큰 세력을 가지고 계시고, 인성도 훌륭하시니 제가 기쁜 마음을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런가? 잘 생각하셨네. 그런데 내가 듣자 하니, 자네는 유표를 형님으로 모시면서 대소신하들이 모두 보는 자리에서 큰절을 올렸다고 하더군.”
관우가 발끈하려 하자, 유비가 눈짓으로 제지했다. 장비 또한 관우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유비는 다시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원하시면 해드려야지요. 동생이 형한테 절을 올리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형님! 절받으십시오.”
유비는 유장의 도발에도 밝은 미소를 지으며 옷을 단정하게 고쳤다. 크게 절을 올린 후, 큰 소리로 맹세했다.
“이 유비는 오늘부로 익주목 유장을 형님으로 모실 것이며, 어떤 경우에도 형제의 의리를 다하고 배신을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유장이 훨씬 밝아진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나 유비에게로 다가왔다. 이후, 비관이 술을 내밀자, 같이 나누어 마셨다.
“든든한 아우가 생겼구만. 앞으로 원매 따위는 걱정마시게. 이 우형과 아우가 힘을 합한다면 저들의 공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일세. 아우의 큰 결단을 익주와 형주의 백성들이 크게 환영할걸세.”
유장은 유비를 일으켜 세우고는 그의 팔을 잡고 위로 높이 들어 올리고는 환호하는 신하들에게 답례했다. 그들의 뜨거운 환호와 박수는 한참을 이어졌다. 유장의 수하들은 진심으로 형제동맹을 축하했고, 관우를 비롯한 유비의 신하들은 대체로 박수를 치며 동참했지만, 그들의 속은 매우 쓰라렸다.
축하행사는 그날 종일 이어졌다. 치소 안은 큰 잔치가 치러졌으며, 모두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축하가 오고 갔다. 유장은 큰 소리로 웃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 자리에서 최종승자는 누가 보더라도 유장이었다.
그날 밤.
유비는 쓰린 속을 달래며 처소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유장에게 완전한 믿음을 주기 위해서 그의 신하들과 따로 자리를 갖지 않았고, 부하들에게도 자중할 것을 지속적으로 당부했다.
‘참으로 굴욕적이고 힘든 날이구나. 어찌하여 하늘은 이 유비에게 모진 시련만 주신단 말인가? 원매는 아비의 도움으로 저리 기고만장하거늘, 참으로 하늘이 야속하구나.’
그는 눈물을 한 방울 떨구고는 다시 술잔을 기울였고, 쓸쓸히 잠이 들었다.
환영행사는 3일 동안 계속되었고, 처음에 의심하던 유장의 매서운 시선도 마지막에는 부드럽게 변해있었다. 유비가 온전히 자신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유장의 경계가 무뎌진 마지막 날, 유비의 처소로 은밀하게 누군가가 찾아왔다. 유비는 주위를 재빠르게 확인한 후, 그를 안으로 불러들이고, 문을 닫았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를 보며 유비가 낮게 입을 열었다.
“뉘십니까?”
“저는 한수라고 합니다. 그간 서량에서 생활하다가 이번부터 유목사를 따르고 있습니다.”
“한장군이셨구려. 그런데, 어찌 이렇게 은밀하게 오셨소?”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간 꼼꼼하게 그대를 지켜봤는데, 그대는 결코 유목사의 의제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소.”
잠시동안 유비와 한수는 날카롭게 상대방의 의중을 알아내려 매섭게 시선을 교환했다.
“알 수 없는 말씀만 하시는군요. 무슨 목적으로 오신 겁니까? 설마 실수를 유도하여 유목사에게 아뢰어 이 사람을 곤경에 처하게 할 심산이십니까?”
“그럴 리가요? 마음에 맞는 동지를 찾았기에 이렇게 조심스럽게 찾아뵈었습니다. 유장군께서 저를 보시면 알겠지만, 저 또한 서량에서 크게 세력을 형성했던 사람입니다. 다시말해 나중에 유장군께서 어떤 거사를 치르신다면 제가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유비는 한수의 의도를 짐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한장군께서 어찌 행동하시든 간에, 형님(유장)에 대한 나의 충성심은 절대로 변치 않을 것입니다.”
“역시 천하의 효웅이라 불릴 만하군요. 이 정도까지 말씀을 드렸는데도, 조심스럽게 관망을 하시다니요. 어쨌든 좋습니다. 제 뜻을 전달했으니까요. 다음에 좋은 자리가 만들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내가 유목사에게 그대의 한 말을 보고한다면 그대의 목은 그대로 날아갈 것이오. 어찌 이리 조심성이 없으신 게요!”
“그대를 잘 아니까요. 설마 밀고를 하는 바보짓을 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썩 물러가시오!”
유비는 등을 훽-돌렸다. 한수는 눈을 반짝이고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유비는 한수가 떠나자,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피아를 구분할 수 있겠지. 그때도 한수가 내게 우호적이라면 큰 우군을 얻는 셈이다. 확실치 않으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유비가 등잔불을 끄고 눕자, 밖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그곳을 떠났다. 꽤 오랫동안 머물렀던 듯,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거 혹시나 했는데, 대어를 낚았구나. 유비와 한수가 만난다. 이거지? 흐흐흐- 잘하면 이것들이 내 앞길을 창창하게 열어주겠구나. 한수야- 조심을 해야지. 이 장송을 얕보면 안 된다. 흐흐흐-’
장송마저 자리를 뜨자, 유비가 머무는 객잔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유비는 유장에게 예를 올리고, 일행들을 인솔하여 장사군으로 떠났고, 유장도 누각선을 타고 성도로 출발했다. 장송은 배가 떠나기 전 장사치로 위장한 원매의 첩자에게 비밀리에 죽간을 전했다.
며칠 후. 허창성. 가후치소.
가후에게서 열심히 첩보를 분석하는 일을 배우고 있던 서서는 장송이 보낸 죽간을 펼쳐 읽고는 깜짝 놀랐다. 내용이 매우 놀라웠기 때문이었는데, 그대로 가후에게 보고를 하려고 일어서려다가 다시 앉았다.
‘가만 이건 기회야. 분명히 자넨 어찌 생각하는가? 이리 물어볼 텐데,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갈 수는 없지.’
서서는 손가락을 두드리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간 열심히 죽간을 읽으며 첩보를 파악했고, 가후와의 대화를 통해 나름대로 첩보관을 정립한 상태였기에 얼마 후, 확신에 찬 얼굴로 일어어 서서, 가후에게 향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가후는 서서가 내미는 죽간을 받고 차분하게 읽어내려갔다.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란 것을 눈치챈 가후의 눈은 반짝였다.
“자네 의견을 말해보게. 어찌 생각하시는가?”
“첫째로, 유비와 유장이 형제동맹을 맺었으니 앞으로 골치 아파졌습니다.”
“그거야 예상했던 거고, 앞으로 대책을 강구 해야지. 또?”
“진짜는 두 번째입니다. 유비와 한수가 따로 야심한 밤에 만났다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야망이 큰 유비와 한수가 밀담을 나눴다는 것으로 짐작해 볼 때, 유비가 유장을 배신한다면 한수가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킬 확률이 높습니다.”
가후는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계속해서 그들의 관계를 추적하고, 행동을 염탐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기회를 잡아서 우리가 그 틈을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때 유장과 동맹을 맺어서 한수와 유비를 격멸해도 좋고, 아니면 그 기회를 이용하여 유장을 멸망시키고 그의 땅을 삼분해도 괜찮겠지요.”
“자네는 유장이 만만해 보이는가?”
“만만하지는 않지만, 욕심에 비해서 영특하다는 인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야망이 크고, 땅도 넓고, 장수와 책사도 많으니 분명히 조심해야 할 상대인 것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들어오는 첩보를 계속 분석하다 보면 좋은 계책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하-
가후는 책상을 탕-탕-치며 낭소를 터트렸다. 서서가 갸웃하자, 가후가 웃음을 그치고는 일어서서 서서의 등을 다독이며 격려했다.
“역시. 주군의 안목은 정확하군. 아주 제대로 분석했어. 주군께서 자네를 내게 부탁할 때, 대단한 인재라고 했지만, 솔직히 노력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이 정도면 대단한 재능이야. 한눈에 그렇게 파악하기 힘들어. 유장-유비-한수에 대해서는 자네가 책임지게.”
가후는 다시 낭소를 터트리고는 죽간을 말아쥔 채, 원매에게로 향했다.
원매는 가후로부터 상황을 전달받고는 밝은 표정을 지었다.
“역시 서원직(서서)이야. 이래서 처음부터 그리 얻으려고 했건만, 어찌 그리 잘 도망을 쳤는지. 쯧쯧-”
원매는 혀를 차다 말고 자신을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가후를 발견했다.
“어찌 그런 표정으로 보시오?”
“그거참. 신기해서요. 그때 주군은 기주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남양군의 서서가 이리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어찌 알았습니까?”
“아- 뭘 또 대단한거라고. 내 처가(봉가)가 남양군의 대호족이오. 그러니 잘 알 수 밖에요.”
“남양군이 군중에서 제일 큽니다. 인구도 200만이 넘고요. 더군다나 서서는 호족에도 끼지 못할뿐더러, 죄를 짓고 도망치던 자입니다. 봉가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지만, 서서를 안다는 것은 좀 무리 같습니다.”
가후가 논리정연하게 반박하자, 할 말이 없어진 원매가 최후의 방책을 꺼내 들었다.
“모르는 게 약일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그와 같습니다. 나도 더는 설명이 어려우니 이쯤에서 그만합시다.”
“알겠습니다. 주군.”
가후는 원매의 난처한 표정을 읽어내고는 곧바로 수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