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제 130장. 또 한 명의 책사.
한수가 기병 1만 4천을 이끌고 성도로 들어서자, 유장이 직접 나와 그를 맞이했다. 비록 성공영에게 모진 소리를 하긴 했지만, 한수의 합류는 유장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어서 오시게. 참으로 위풍당당하군!”
“처음 뵙겠습니다. 한수라고 합니다. 앞으로 지근거리에서 모시면서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고마우이. 지금 병력이 다인가?”
“보병이 2만 정도 되는데 서량에서 백성들 10만을 데리고 오고 있습니다.”
“그렇군. 든든하네.”
“병력배치에 대해서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그리 말해주니 내가 마음이 편하군. 건위군 남군에 7천, 광한군 재동에 7천을 배치하는 것은 어떤가? 자네는 이곳 성도에서 그들을 지휘하고 말이야. 건위군 남부 산악지대에는 이민족들이 많이 살아서 아주 골치 아파. 자네의 강한 군대라면 충분히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광한군 재동은 한중군에서 원매가 치고 내려올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니 꼭 필요한 곳이네.”
“명심하겠습니다.”
한수를 군례를 올리며 이를 갈았지만, 명령을 거부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군대를 남과 북으로 쪼개 놓았으니 당분간은 힘들 것이다. 어차피 처음부터 각오한 것이었기에 순순히 명을 따를 수 있었다.
그는 염행에게 7천을 주어 건위군 남군으로, 성공영에게 7천을 주어 광한군 재동으로 보냈다. 유장은 한수의 발 빠른 일 처리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거부하면 어쩌나 내심 조바심을 냈고, 적당한 선에서 양보할 준비도 해두었었다.
‘내가 너무 예민했나?’
유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한수를 다독인 후, 종사관을 시켜 거처를 알려주었다. 유장은 비관을 되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유비는 아직 소식이 없는가?”
“주군을 형님으로 모셔야 하니, 한지역의 맹주인 유비로서도 쉽지 않을 결정일 것입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지요.”
“늦으면 손해는 제 놈이 보는 것이지.”
유장은 콧방귀를 뀌며 치소로 향했다. 이번 가을에 유비가 설령 동맹을 맺지 않더라도 군대를 움직여 볼 심산이었다. 원매의 세력이 너무 빨리 커졌기 때문에 요즘 들어 불안감에 잠을 설치곤 했다.
구강군 수춘성.
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는 요즘 참으로 답답한 심정이었다. 어쩌다가 멀고 먼 수춘성까지 내려왔는지, 조조에게 제대로 말도 못 꺼내는 자신을 보고 있노라면 속으로 울화가 터지곤 했다. 최근 들어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조조보다는 원소였다. 이미 원소가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오른다는 이야기는 이곳 수춘성까지 퍼져 있었다.
“이보시오. 정별가(정욱).”
“예. 폐하.”
“기주의 원소가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다는 소문이 파다하오. 사실이오?”
“아직 건국하지 않았으니 뭐라 확답을 드리지는 못합니다. 다만, 이미 주요 호족들과 제후들은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눈치입니다. 지금 원가는 중원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나머지 제후들의 힘을 합친 것보다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신감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한에서 사세삼공을 했거늘, 어찌 그런 배은망덕한 마음을 먹는단 말이오? 그걸 원소가 주도하고 있단 말입니까?”
“소신이 듣기로는 원소의 아들인 원매가 주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연주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원매의 강력한 토벌에 힘 한번 쓰지 못하고 격파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다른 호족들은 감히 나서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형국입니다.”
휴우-
헌제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대에서 한고조(유방)가 이룬 대업을 끝낸다고 생각하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던 것이다.
“죽어서 구천에 가면 어찌 선황들을 뵐꼬?”
탄식하던 헌제는 결국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정욱은 그런 모습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 사실 헌제에 대한 충성심은 오래전에 사라진 상태였고, 지금은 연민의 감정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정욱은 자신의 치소로 돌아가다가 조조와 마주쳤다. 조조는 강하군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가,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려놓고는 다시 수춘성으로 올라온 상황이었다.
“뭔 일이야? 표정이 왜 그래?”
조조의 질문에 정욱은 헌제와 나누었던 대화를 요약하여 들려주었다.
“별일도 아니구만. 설마 자네도 황제의 말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지?”
정욱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가라앉는 배를 구분 못 할 만큼 어리석진 않습니다. 이제 한은 기름 떨어진 등잔 같은 운명이지요. 제게는 이제 오로지 주군밖에 없습니다.”
“자네도 그런 듣기 좋은 말을 할 줄 아는군. 하지만, 당분간은 지금의 황제가 버텨줘야 해. 원소가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면 나머지 제후들은 나를 중심으로 뭉쳐야 하고, 그렇다면 황제가 제 역할을 해줘야 하지. 아무튼, 이 일만 생각하면 골치 아파.”
정욱은 화제를 바꾸려 질문을 했다.
“새로 얻은 강하군은 어떻습니까?”
“여강군보다는 못하지만, 괜찮은 곳이야. 일단 그곳은 면수와 강수(장강)를 통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라는 게 마음에 들어. 유비가 무척이나 배가 아팠을 거야. 흐흐흐흐-”
“주군의 홍복이십니다. 지금 주군의 땅이 된 걸 보면 임자는 원래부터 주군이었던 것이지요. 황조, 유비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조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닫자, 정욱이 다시 질문했다.
“원매가 남군과 무릉군 북부를 얻었지 않습니까? 그곳의 허실은 파악해 두었습니까?”
“그건 자네가 파악해서 내게 보고를 해야 하지 않는가?”
조조는 잠깐 힐난을 하고는 조용히 말을 했다.
“남군과 무릉군, 남양군이 형주의 대부분이야. 그곳을 원매가 냉큼 삼켰으니, 형주 전투 최종승자는 그놈이라고 봐야지. 나야 그럭저럭 괜찮고, 유비가 억울하게 됐지. 그리고, 그놈이 뭔 짓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현령, 장수들이 큰 불만 없이 따르고 있어. 반란도 없고, 나나 유비에게로 돌아선 놈들도 없고 말이야. 그것참. 애송이라고 얕봤는데, 역시 만만치 않은 놈이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라고 했습니다. 무조건 주군의 뜻대로 이뤄질 것이니,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시고 일에 매진하십시오. 저는 주군을 믿습니다.”
“일체유심조라. 참으로 고마운 말일세. 그간 다소 의기소침해 있었던 것도 사실이야. 앞으론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하지.”
조조는 정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치소로 향했다.
영천군 허창성.
제갈량은 성 밖으로 나와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여유 있는 표정을 짓던 그가 오늘은 초조함마저 얼굴에 드러나고 있었다. 그만큼 오늘 만날 인물이 매우 중요한 인물임을 뜻했다.
“이 사람이 왜 이리 늦는가? 아무튼, 사람 애간장 태우는 것은 여전하군.”
제갈량이 불만 섞인 어조로 툴툴거리고 있을 때, 멀리서 단단한 체격의 사내가 천천히 말을 몰아 오는 것이 보였다. 제갈량은 한눈에 알아보고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었다.
“원직! 이렇게 늦으시면 어쩌는가? 한참이나 기다렸잖은가?”
“하하하- 그러셨는가? 동생인 자네가 기다려야지, 형인 내가 기다릴까?”
“그럼 지금부터 형님이라고 불러드릴까요?”
“됐네. 이 사람아. 벗인데 나이를 따져 무엇을 하겠는가? 내가 농을 했다고 토라지셨는가?”
“아닐세. 자- 들어가세. 주군께서 기다리고 계시다네.”
“이거야 원. 경을 치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군. 우장군이라면 지금 중원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예끼 이 사람아. 그걸 아는 사람이 이리 늦는단 말인가?”
제갈량은 서서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서서는 실제로 제갈량보다 나이가 9살이나 많았다. 하지만, 서로의 능력을 인정했기에, 학문을 심도있게 토론하면서 벗이 될 수 있었다. 서서는 원매의 치소 앞에 이르자 자신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자네같이 대범한 사람도 긴장할 때가 있군.”
“나는 사람이 아니던가?”
제갈량은 서서를 잠시 흘겨보고는 먼저 치소로 들어섰다. 잠시 이야기가 오고갔고, 곧바로 원매는 서서를 호출했다.
[서서(29)] 무력:64, 지력:94, 정치력:80, 통솔력:83
유비의 책사였다가, 조조에게 모친이 잡히자 항복했다. 어사중승까지 오를 정도로 능력이 뛰어났다. 제갈량은 관리들을 교육할 때, 서서의 1/10만 해도 잘못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서서의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동화전)
“반갑네. 내가 원매일세.”
“처음 뵙겠습니다. 서서, 자는 원직이라 합니다.(이 당시 이름은 서복이었고, 후에 서서로 개명했다. 혼란을 피하기위해, 서서라고 처음부터 명명한다.)”
“자- 이리로 앉으시게.”
서서는 원매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아, 종사관이 내주는 차를 받았다. 원매는 차를 마시면서 서서를 관찰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는가? 5년 전부터 계속 찾았는데, 어찌 이제야 나타나는가?”
“죄송합니다. 그 당시 죄를 저지르고 도피 중이었고, 우장군의 진정한 의도를 몰라서 한동안 망설였습니다. 사실 모든 것을 가지신 원가의 핏줄인 우장군께서 저를 필요로 하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믿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 지금이라도 이렇게 와줬으니 됐어. 잘했어. 이제부터는 어디 갈 생각하지 말고, 여기서 일하시게. 제갈량과 함께 여러 가지 일을 배우시게.”
“ 제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이런저런 시험도 해보고, 대화도 나눠보고 그래야 하지 않습니까? 곧바로 채용하신다니 놀랍습니다. 사실 공명(제갈량)의 말을 듣고도 의아했는데, 정말 그렇군요.”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거든. 이제 자네는 내 사람이야. 그리고, 허창성에 임시거처를 마련해 둘 터이니, 자네 모친을 모셔오게. 당장, 그것부터 하시게.”
서서는 자신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원매의 태도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후, 원매로부터 여러 가지 당부사항을 다짐받고 나서야 치소를 나올 수 있었다. 그가 식은땀을 흘리자, 기다리고 있던 제갈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 여러 가지로 놀라는군. 대담한 서원직이 이리 식은땀을 다 흘리고 말일세.”
“내 모친까지 주군께 말씀드리셨는가?”
서서의 얼굴은 어느새 은은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 않았네. 정말이야. 내가 뭐랬는가? 주군은 사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다고 말이야. 자네의 능력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지. 지금 중원의 첩보가 모두 주군께 들어오고 있으니, 자네의 가족을 어찌 모르시겠는가? 몇 년 전부터 자네를 찾으셨다고 들었네.”
“나 같은 사람을 그리 찾으셨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
“잘된 일이야. 자네라면 주군께 큰 도움이 될 것이야. 어설픈 능력을 가진 10명의 관리보다, 자네 한 사람이 훨씬 나아. 아마 주군도 같은 생각일게야.”
“그럼 나는 이곳에서 일을 해야겠군.”
“당연하지. 솔직히 자네는 대의명분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실속을 많이 챙기시지 않는가? 아마 중원을 통 털어도 주군만큼 자네의 실속을 확실하게 챙겨줄 분도 드물걸세.”
“내가 속물인 줄 아는가?”
“내가 말하는 것은 책임지고 일을 맡겨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겉만 번지르르한 관직을 받아 무엇하겠는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어야지. 그런 부분에서는 주군이 최고야. 자넨 복 받은 것이니 어서 모친을 모시고 오게.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걸세.”
서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갈량의 말에 동의하고는 모친을 모셔오기 위해 허창성을 나섰다. 이제 서서를 얻음으로써 원매에게는 또 한 명이 강력한 조력자가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