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제 128장. 승상 말고 배우 어때?
“대충 그대의 뜻을 알았으니, 치소로 갑시다. 직접 주군께 말씀 드려 보시오.”
비관이 좀 불편한 표정으로 훽-하고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제갈량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급히 비관의 뒤를 따랐다.
“우장군께서 호의를 베푸셨는데, 왜 화를 내십니까?”
“지금 항복을 타진해놓고, 호의라고 말하시는가? 자네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그 순간 목이 날아갈 수가 있어!”
제갈량은 힉- 하고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목을 움츠리고 조용히 비관을 따라 나섰다. 비관은 한참 걷다가 뒤를 슬쩍 보니, 기가 팍 죽은 채 어깨를 늘어뜨린 제갈량이 따라오는 게 보였다.
‘아니. 원매는 왜 저런 덜 떨어진 놈을 보낸 거야?’
비관이 치소에 도착하자, 유장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그간의 상황을 전달했다. 제갈량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어버버하며 예를 표했다.
“유···유목사. 강···녕하셨습니까?”
“네놈에게 그 따위 인사는 듣기 싫다. 뭐라? 항복하라고?”
제갈량은 납작 엎드렸다.
“살려주십시오. 우장군이 시켜서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우장군이 시켜서 그랬다? 그러면 우장군이 잘못했다. 이 말인가?”
“네. 네. 그렇습지요. 네. 네.”
얼떨떨한 제갈량을 보고는 유장이 실소를 날렸다. 유장은 상대를 한심한 듯 바라보며 다그쳤다.
“순유, 가후등 뛰어난 자들이 많은데, 왜 하필 자네가 왔는가? 외교가 애들 장난인가? 진정 우장군은 그리 생각하시는가?”
“그건 아니옵고, 배워보라고 보내셨습니다. 주군께서 말씀하시길 제가 장차 승상재목이라면서 여러 가지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외교를 배우기 위해 왔습니다.”
“뭐? 승상재목? 말도 제대로 못하는 어수룩한 놈이 무슨 승상이야? 이런 놈이랑 말을 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군. 여봐라- 저놈을 당장 내쫓아라!”
“자···잠시만. 저 이대로 돌아가면 주군께서 경을 치실 것입니다.”
유장은 손짓으로 병사들을 물렸다. 왜 이런 덜 떨어진 놈과 시간을 낭비하는지 모르겠는데, 특유의 궁금증때문에라도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다.
“잠시 기다려주지. 또 할말이 있어?”
“저- 유목사께서는 첩이 몇 명이나 되십니까?”
“둘. 우장군은 몇인가?”
“우장군은 첩이 없습니다. 본처가 얼마나 성정이 독한지 ···”
제갈량은 중얼중얼 떠들다가 다시 되물었다.
“익주에 미인이 많다고 하는데, 둘밖에 얻지 못하셨습니까?”
유장은 제갈량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눈을 반짝였다. 원매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는데, 제갈량이 주절주절 잘도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한장군이 오면 중앙에 배치할 것입니까?”
“그건 내 마음이야. 자네가 알 바는 아니지 않는가? 그럼 우장군은 기병을 어찌 배치하고 있는가?”
“기병은 총 5만인데, 연주에 7천, 회하에 5천, ··· ”
제갈량은 미주알고주알 자세하게 군 배치를 설명했다. 제갈량이 반대급부로 술술 기밀인 부분까지 다 털어 놓았기 때문에 유장은 형식적으로라도 제갈량의 질문에 답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벌써 시간이 이리 되었나? 자네 오늘 하루 여기서 쉬었다가 내일 나랑 이야기 좀 더하세.”
“휴- 다행입니다. 유목사께서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이제는 돌아가서 주군께 혼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갈량은 순박한 표정을 지으며 치소를 빠져나갔다. 유장은 예리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비관을 불렀다.
“어찌 생각해?”
“좀 기묘합니다. 군부대배치나 관리현황은 큰 기밀인데, 그걸 술술 다 털어 놓았으니까요.”
“한심하긴. 저놈한테 당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
“당했다니요?”
“정말 기병이 5만일까? 한수가 1만 4천을 데려오는데. 더군다나 보병은 정예병이 50만이라잖아. 그리고 뭔 똑똑한 놈이 그리 많아. 저놈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 천재야. 처음에는 내가 저놈을 통해서 정보를 얻는 줄 알고 기뻤는데, 지금은 덜컥 겁이 난단 말이야. 원매가 이토록 대단한 놈인가 이런 생각이 들어. 내 말뜻 알겠는가?”
그제야 비관의 얼굴도 경직되었다.
“가봐. 내일 불러서 다시 이야기해보자고. 처음부터 덜 떨어진 놈이 와서 이상해다 했어. 원매가 어떤 놈인데, 그렇게 생각한 내가 한심하군.”
제갈량은 처소를 나오면서 순박한 표정으로 마주치는 대신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은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파악한 유장은 대단한 야망가였다. 여자편력도 없고, 오래 익주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냉정한 표정으로 첩이 둘이라 그랬으니, 세력을 위해 대호족의 딸을 첩으로 들인 것이 분명했다.
한수는 상당히 경계를 하는 중이고, 익주의 물산은 놀라울 정도로 넉넉했다. 유장의 말에서 은연중에 풍요로움이 묻어 나왔고, 제갈량은 놓치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병력의 규모가 10만을 넘는다는 것이다. 휴- 주군의 말씀대로 골치 아파지는구나.’
제갈량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못생긴 추남과 마주쳤다. 잘생기고 풍채가 좋은 제갈량은 순간 눈이 반짝였다. 저 왜소하고 못생긴 놈이 중앙에서 일할 정도면 유장의 인척이거나 머리가 대단히 좋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저는 우장군의 사신으로 이곳을 방문한 제갈량이라고 합니다.”
“별가를 맡고 있는 장송입니다.”
“아- 장별가이셨군요. 익주에 뛰어난 인재가 많은데, 그 중 제일이 장씨 성을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 형님을 말씀하시는 거요?”
“그럴 리가요? 지금 제 앞에 계시지 않습니까?”
제갈량은 선하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언뜻 보이는 방탕한 눈빛은 이자가 어찌 살아가고 있으며, 여기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해줬다.
“제가 술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난 기녀가 있는 기루가 아니라면 가지 않네.”
“물론 그리 가야지요.”
제갈량이 장송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성도에 위치한 춘화루에 들어섰고, 뒤를 쫓던 중년인은 급히 되돌아가 비관에게 모든 상황을 전달했다. 중년인을 물리친 비관은 생각에 잠겼다.
‘정말 희한한 놈이구나. 방탕한 장송과 함께 술을 마시러 춘화루에 갔다? 외교를 하러 온 놈이 기녀를 끼고 술이나 처 마신단 말인가? 아무래도 주군께서 예민하신 것이야. 그 놈은 덜 떨어진 놈이 틀림없어.’
평소에 짤막하고 방탕한 장송을 무시했었기에 장송과 어울리는 제갈량이 한심스러워 보였다.
다음날, 제갈량은 술에 찌들은 얼굴로 유장의 치소로 나왔다.
“자네 어제 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얼굴이 그 모양인가?”
“익주에 이렇게 미인이 많은 줄 몰랐습니다. 주는 대로 받아 먹다 보니 ··· 이렇게 되었습니다.”
“누구랑 마셨는가?”
“그 ··· 누구더라? 아! 별가를 맡고 있는 장송입니다. 술도 잘 마시고, 기루도 잘 알고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제갈량은 신나서 기루에 대한 이야기까지 떠벌리고는 이곳에서 며칠을 더 머물다가 갈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우장군의 인척도 아닐 텐데, 이리 늦게 가도 되는가?”
“저희 외가 쪽이 형주의 대호족이고, 우장군께서 저를 차기 승상감으로 여기시기 때문에 ··· ”
“그만. 됐어! 가봐.”
유장은 귀찮다는 듯 제갈량을 쫓아냈다. 비관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진언을 올렸다.
“아무래도 주군께서 예민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놈은 입만 열면 허풍입니다. 저런 놈이 승상재목이라니요? 지나가던 개가 웃을 것입니다. 아마도 대호족의 연줄로 우장군 밑에서 일하는 것이고, 이번에 사신으로 온 것도 대호족들의 체면을 봐서 보냈을 것입니다.”
유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것저것 실수를 유도하기 위해 캐물을 때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해댔고, 너무 실수를 많이 했다. 그는 성공영, 손건과 제갈량을 비교하고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며칠을 술을 마시고 함께 놀은 장송은 피곤한지 게슴츠레 눈을 뜨고 생각에 잠겼다.
‘제갈량 참으로 놀라운 자다. 영특하다고 소문난 내가 감히 따를 수 없을 정도로 기가 막힌 두뇌를 가졌다. 내가 여기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지만, 잘만하면 ··· ”
장송은 기분이 좋은지 실실 웃음을 흘렸다. 이제까지의 삶이 무료했다면, 앞으로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갈량은 유장에게 인사를 하고, 배를 타고 출발했다. 그는 뱃길을 광한군 신도현으로 잡았다. 어차피 그리로 가더라도 장강을 통해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꼭 한 명을 만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장사군 유비치소.
손건은 돌아오자마자 유비를 찾았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방통과 함께 손건을 맞이했다. 손건은 곽도가 보이지 않자 의문을 표시했다.
“곽부군사는 어디 출타했습니까?”
“심신이 피곤하다고 휴가를 달라고 해서 한 달을 쉬라고 했어.”
유비가 못마땅한 얼굴로 대답하자, 방통이 얼른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유장외교에 대해서 질문했다.
“익주에 갔던 일은 어찌 되셨습니까?”
“그것이 ··· ”
손건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그간의 일을 부풀리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자세히 듣고 난 후 유비와 방통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정신을 먼저 차린 방통이 먼저 되물었다.
“유장이 그 정도의 인물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야망이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조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입니다. 욕심도 굉장해 보였구요.”
“그럼, 유장을 형님으로 모시라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같은 종친이지만, 엄연히 내가 나이가 많아. 혹시 내 나이를 착각하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유장 본인 입으로 나이는 중요하지 않고, 힘이 더 중요하다면서 자신을 형님으로 모시면 동맹을 맺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개 자식을 보았나?”
유비가 분통을 터트리며 발을 구르자, 방통과 손건은 눈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한참을 성질을 부리던 유비가 방통에게 입을 열었다.
“방군사. 어찌하면 좋겠어? 유장과 동맹이 필요한 것은 맞는데, 나이도 어린 그 놈을 어찌 형님으로 모신단 말인가?”
“주군. 잠시 개인적인 수치스러움은 참으시고, 대의를 생각하십시오. 만약에 이대로 동맹을 하지 못하고 흘러간다면 결국에는 원매에게 각개격파 당할 것입니다. 반드시 소신이 익주를 점령할 계책을 낼 터이니,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에잉-”
유비는 마땅치 않은 듯, 치소 안으로 들어가면서 문을 닫아버렸다. 난감해하는 방통을 손건이 위로했다.
“너무 상심 마시오. 시간을 두고 진언을 올립시다. 주군께서도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만, 감정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오. 냉철한 분이시니 곧 무슨 말씀이 계실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방통은 감사를 표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 날밤. 방통에게 뜻밖에도 관우가 찾아왔다. 그의 붉어진 얼굴은 몹시 화가 난 상태란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방군사. 유장 따위를 형님으로 모시라고 진언했소?”
“예. 그렇습니다. 저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그리 해야 합니다.”
“아니. 유장 그 자식이 나이가 더 어린데, 무슨 형님으로 모신단 말이오? 제정신이오?”
“예. 정신이 아주 맑습니다. 원매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조조나 유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조조는 이미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상황이니, 유장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 화만 내지 마시고 주군을 설득해 주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 멍청한 짓을 나보고 하란 말이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반대요! 아마 익덕도 반대할 것이오!”
관우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돌려 나갔다. 방통은 그런 관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