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제 127장. 황실의 종친.
성공영이 다녀간 후에 유비의 사신인 손건이 유장을 방문했다. 이번에도 안내역은 비관이 맞았는데,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예를 표했다.
“유장군께서는 어쩐 일로 그대를 보내셨습니까?”
손건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직구처럼 들어오는 비관의 질문에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희 주군께서는 유목사(유장)와 같은 황실의 종친이니 좋은 관계를 맺으면 어떨까 하는 주군의 명을 받들어 왔습니다.”
“아- 동맹을 맺으러 오셨군요. 그럼 들어가시지요. 아마 주군께서는 같은 종친이니 좋아하시겠군요.”
비관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지만, 그의 눈빛은 조금 얕잡아보는 기색이었다. 손건은 그런 비관이 불편했지만, 잘 모르는 상황에서 분란을 만들기 싫어 조용히 그를 따라 치소로 들어섰다.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예를 표한 손건에게 유장의 질문이 날아왔다.
“유장군께서 황실의 종친이시라고?”
“중산정왕의 후예이시니 당연히 황실의 종친이라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푸하하하하-”
유장은 듣는 손건이 난감할 정도로 박장대소를 터트리더니, 거짓말같이 웃음을 그치며 입을 열었다.
“중산정왕의 아들만 100명이 넘어. 그리고 그때로부터 100년은 지났고. 그러면 자손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거 너무 억지가 심하군.”
“억지가 아닙니다. 분명히 중산정왕의 후예가 맞습니다. 설마 저의 주군께서 거짓말을 하신다 의심하는 것입니까?”
“의심한다고는 안 했어. 감히 황실의 족보를 가지고 사기치기는 힘들 테니, 그건 아니겠지. 다만, 그 정도의 혈통이라면 방계중의 방계인데 당당하게 황실의 종친 어쩌고 하니 가소롭다 이거야. 나로 말하면 효경황제의 후손이지. 하지만, 나도 낮 뜨거워서 황실의 종친이라는 표현을 안 써.”
손건은 일단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인정했다. 싸우러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예상과는 너무 다른 유장의 풍모에 당황스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주군과 관련된 일이라 제가 이렇다 저렇다 할 일이 못됩니다. 제가 실수를 한게 있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십시오.”
“사신의 기본 자세는 되어 있군. 그런데 왜 왔는가?”
“예. 주군께서는 유목사와 동맹을 맺고 싶어 하십니다. 원매의 세력이 워낙 강성하다 보니 지금 힘을 합하여 대비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큰 곤혹을 치르실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형주 유목사를 왜 공격하셨는가?”
“공격이 아닙니다. 그분과는 의제로 지내셨는데, 장사의 유호, 유반이 형주목 유종에게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쳤을 뿐입니다.”
“그렇군.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해. 나도 형주 유목사처럼 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야. 그때 가서 내 목에 칼을 들이대고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어쩌는가?”
“말도 안 되는 억측이십니다. 지금도 주군께서는 전 유목사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의제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욕먹을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은혜를 원수로 갚는 파렴치한이 아닙니다.”
“그럼 이렇게 하지. 나이는 내가 좀 어리지만, 이런 동맹관계에서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지. 누가 더 힘이 센가? 이런 게 제일 중요한 법이지. 돌아가서 내 입장을 전달하고, 나를 형님으로 모시라고 하게. 그러면 받아들이지.”
손건은 모욕적인 유장의 언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뭔가 반발을 하려 하자, 유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네놈의 생각은 듣고 싶지 않으니까, 가서 전달이나 똑바로 해. 어서 가봐.”
유장의 냉정한 축객령에 손건이 힘없이 물러났다. 유장은 그의 뒷모습을 노려 보다가 비관을 불렀다.
“이거 완전히 맹탕 같은 데, 자네가 볼 때는 어때?”
“나름대로 할말 다하고, 분노도 참을 줄 아니, 저 정도면 괜찮은 인재입니다. 그런데, 굳이 유비와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습니까?”
“언제까지 이 촌구석에서 쳐 박혀 있을 수는 없잖아. 유비와의 동맹을 계기로 해서 세상과 부딪혀봐야지. 지겨워죽겠는데, 요새는 뭔가 새로운 게 생기는 활력이 돋는구먼.”
유장은 따분한 듯 기지개를 켰다. 그간은 부친과는 다르게 살고 싶어 조용히 익주에 머무르며 백성을 돌보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만, 슬슬 그것도 지겨워졌다. 마음속 깊숙이 억눌러 놓았던 야망이란 놈이 빗장을 풀고 서서히 밖으로 기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서량 한수치소.
성공영으로부터 결과를 보고받은 한수는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아니 유장이 그 정도였단 말인가? 내가 알기로 분명히 어수룩했던 걸로 기억나는데?”
“외부에 알려진 인상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직접 만나보니 대단한 야망가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에 만나보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습니다.”
“빌어먹을! 처음부터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는구먼.”
“주군. 어찌하시겠습니까? 굶어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원매에게 항복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건 그래. 휴-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심정이로군. 익주로 가면 고생길이 훤히 열리겠어.”
“그래도 그곳에서 신임을 받고, 기회를 기다리다 보면 분명히 기회가 올 것입니다.”
한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수가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두려울 것 없이 인생을 살았는데, 삶에 대한 두려움이 솟구쳤다.
“저 쳐죽일 원매새끼를 만난 후로는 되는 일이 없구만.”
한수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분통을 터트렸다. 한수와 성공영은 실랑이를 거듭하다 결국 유장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는, 병사들에게 익주로의 이주명령을 내렸다.
한수가 한양군, 농서군의 백성들을 윽박질러 익주로 이동한다는 소식은 무위군에 있던 마등에게 알려졌다. 사실 한양군, 농서군이라 봐야 인구가 겨우 30만도 되지 않았기에 한수가 난리를 친다면 그곳은 초토화 될 가능성이 높았다.
“햐- 한수 이 무식한 놈이 결국 사단을 내는구나.”
한수에 관한 일은 원매가 중요하게 처리했기에 마등은 마철을 불러 죽간을 작성한 후, 전령을 보냈다. 마철은 서량에서 장안-남양을 거쳐 강릉성에 도착했을 때, 무릉군에서 돌아온 원매를 만날 수 있었다.
“아니 자네는 마장군의 자제인 마철 아니신가? 장군께서는 건강하시고?”
“소장을 알아주시니 영광입니다. 부친께서는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이렇게 찾아 뵌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수에 대한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마철은 급히 말을 하고는 죽간을 꺼내 바쳤다. 원매는 급히 죽간을 펴서 읽고 또 읽었다.
“마철. 남쪽으로 내려가면 임원성이 나오는데, 그곳에 자네 형인 마초가 있네. 온 김에 보고 가게. 내가 그 동안 생각을 해보고 죽간을 작성해 줄 터이니, 그걸 가지고 마장군께 가져다 주면 될 것이야.”
“배려에 감사 드립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마철은 깊숙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치소를 물러나 곧바로 남쪽으로 내달렸다. 마철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원매는 고민에 빠졌다. 서량도 문제였지만, 한수가 유장에게 가담한다니 그쪽도 상당히 골치 아팠던 것이다.
원매는 고민을 하다가 양양성에 머물고 있는 제갈량을 불러 내렸다. 양양에서 강릉까지는 평지였고 가로막는 큰 강도 없었기에 5일만에 제갈량은 강릉에 도착했다.
전령이 가는데 2일, 제갈량이 내려오는데 3일 걸렸으니 힘들었을 법도 한데, 제갈량의 눈은 초롱초롱했다. 역시 젊음이란 좋은 것이다.
“주군 찾으셨습니까?”
“오느라 고생하셨네. 순치중과 의논을 하려고 했는데, 관직개편을 맡겨놓아서 너무 바쁠 것 같아서 자네를 불렀네. 전령으로부터 대략적인 상황은 전해 들었겠지?”
“물론입니다. 제 생각에는 굳이 한수와 마찰을 빚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익주로 가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고, 나중에 빈 땅을 마등에게 모조리 점령하라고 하십시오. 지금 중원에 떠돌아 다니는 백성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땅을 무상으로 나눠주고, 이주시키면 됩니다. 척박한 곳이기는 하지만, 이민족들만 잘 막아주면 꽤 살만한 땅입니다.”
“그래. 그건 나와 생각이 같군. 사실 자네를 부른 것은 유장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야. 무릉군 유태수(유망지)에게 들었는데, 유장이 대단한 야망가라는 이야기를 들었어.”
“아직 익주에 대해서는 풍문으로 들은 것이 다입니다. 그래서 유장에 대해서는 따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자네 유장에게 한번 다녀오게. 내가 조조, 유비, 주유는 대략적인 인성이나 어떤 방식인지도 알겠어. 하지만 유장은 전혀 아는 게 없어. 그러니 대비도 할 수 없고, 참으로 갑갑하군.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이리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은가?”
“저를 선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드시 주군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낱낱이 파악해서 오겠습니다.”
“고맙네. 사실 유장이 야망가라면 우리 쪽 대신들을 알고 있을 거야. 그렇다면 경계를 할 테고, 힘들어 지겠지. 그래도 자네라면 절대 모를 거야. 그러니 신중하게 파악해보게. 솔직히 느낌이 좋지 않아.”
제갈량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눈을 반짝였다.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3일이면 성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한수가 오기 전에 제가 도착할 것입니다. 한수와 연계된 상황과 익주의 세력, 유장의 능력등을 최대한 파악해 오겠습니다. 그들도 제가 어리고 잘 모르니 대처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좋아. 한번에 알아들으니 내가 편하군. 잘 좀 부탁하네. 갑자기 유장이 이렇게 튀어나올 줄은 진정 몰랐어.”
“오늘 중으로 출발하겠습니다.”
제갈량은 원매에게 인사를 하고는 주가 3척을 이끌고 익주로 향했고, 마철은 그가 익주로 떠난 후, 원매의 명령이 담긴 죽간을 받아들고 서량으로 떠났다. 장강이 험했지만, 이곳에 익숙한 수군이었기에 제갈량은 별 문제없이 3일만에 성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 흥미로워지는군. 한수, 유비에 이어 원매까지 사신을 보낸다? 한수, 유비는 상황을 알았는데, 원매는 왜 보내는 것일까? 그것참.’
비관은 원매로부터 사신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곧바로 성도와 연결된 포구로 향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희멀건 애송이 한 명이 자신에게 예를 표하는 것을 보고는 당황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우장군의 명을 받고 온 제갈량이라고 합니다.”
“비관이오. 그런데 상당히 젊은데, 직책이 어찌되시오?”
“군량을 맡아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막 배우는 중이라 종사관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종사관이면 하급관리였다. 이때부터 비관은 두뇌를 열심히 돌렸다. 왜 원매가 이런 하급관리를 보냈을까? 하지만, 그 의도를 추측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혹시 우장군과 인척이시오?”
“전혀 아닙니다. 이번에 외교가 뭔지 배워보라면서 보내셨습니다. 저도 갑자기 명을 받고 온지라 얼떨떨합니다.”
제갈량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박한 표정을 짓자, 비관은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생각 같아서는 윽박질러서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상대는 원매의 사신이었다.
“그런데 이곳으로 오면서 들으니 한장군이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서량의 대호라는 한장군이 따른다니 유목사께서는 참으로 든든하시겠습니다.”
“든든은 무슨. 군량이 부족하니 ···”
비관은 급히 입을 닫았다.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갈량은 뭔지 모르겠다는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군요. 그토록 뛰어난 장수가 기병을 이끌고 올 터인데,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비관은 급히 화제를 바꿨다.
“우장군께서는 어인 일로 그대로 보내셨소이까?”
“아까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외교를 배워보라고요.”
“아니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목적이 뭐냐 이거요?”
“유목사께서 익주를 잘 다스리신다는 소식을 접하시고는 원가의 충신이 될 뜻은 없는지 넌지시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비관은 분노한 표정으로 빤히 제갈량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을 보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