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제 124장. 원매 남군을 얻다.(지도첨부)
서량 농서군 한수치소.
“하- 정말이지 미쳐버리겠구나. 독 안에 든 쥐 심정이 이런 것인가?”
“주군! 저희들이 제대로 보좌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한수는 부지불식간에 탄식을 쏟아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성공영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군량을 틀어막고 있는 원매가 죽일 놈이지, 성공영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원매는 요즘 어때? 아주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중원의 요지는 대부분 원가에게 넘어갔습니다. 맹렬하게 기세를 떨치던 조조도 남쪽으로 밀려났을 정도입니다. 형주는 갈갈이 찢겨졌고요.”
“자네 생각을 말해봐. 이제 버티는 것도 한계에 이르렀어. 어찌하면 좋을까?”
“서량을 포기하셔야 합니다.”
한수는 예상한 대답이 나오자 눈을 질끈 감았다. 평생을 서량에서 살았다. 척박했지만, 고향이었고 이곳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서량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 수 있을까? 성공영은 한수가 말이 없자,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한수의 눈이 떠졌고, 날카로운 안광이 쏟아졌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봐.”
“서량을 포기하고, 익주로 넘어가셔야 합니다. 익주를 공격해서 무너뜨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항복하자는 뜻으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한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길게 쫙 찢어진 눈에서는 눈알이 사라졌고, 도무지 의중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항복한 다음에는?”
“유장에게 충성을 다하십시오. 그래서 인정을 받으시면 됩니다. 지금이 난세이니 언젠가는 외부에서 익주를 한번쯤은 흔들어줄 것입니다. 그때는 주군의 뜻대로 움직이십시오.”
“그래. 자네는 오래 전부터 이런 생각을 했었겠지? 내가 서량에 대한 애착이 강하니까 미뤘을 테고.”
성공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굶어 죽느니 뭐라도 해야지.”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고, 지금 즉시 익주에 다녀오겠습니다.”
한수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성공영은 군례를 올린 후 치소를 빠져 나갔다. 그는 준비를 단단히 하고는 익주 성도로 방향을 잡았다.
서량에서 익주 성도까지는 길이 험하고 멀었기에 성공영이 오가며 회신을 주고받고 하는 데만 몇 달이 소요될 지 몰랐다. 아무튼 잠자던 서량의 풍운아 한수가 드디어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형주 양양성 유종치소.
이제 겨우 10살인 유종은 채씨, 채모, 괴월로부터 번갈아 항복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유씨 중에 힘을 가지고 있었던 유기, 유호, 유반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그나마 둘째 형인 유수가 있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특히나 유종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것은 유표의 첩이자, 죽은 어머니 진씨를 대신하고 있는 채씨였다.
“왜 이리 답답하십니까? 형주목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도와드린다고 했지 않습니까? 목사께서 유비와 조조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설령 상대를 하더라도 내년에는 우장군께서 40만 대군을 이끌고 내려오실 텐데, 그때는 어찌하시려고요? 형주의 백성들이 모두 죽어야 정신차리실 것입니까?”
협박이나 다름없는 채씨의 발언에 유종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머니. 고정하십시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버님의 가업인 형주를 쉽게 넘겨줄 수가 없어서 고민을 했을 뿐입니다.”
“가업이라니요? 일정한 기간 동안 목사를 하는 것입니다. 지나친 욕심을 자제하세요. 그리고 다시 당부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무릉군이 절반은 유비에게 넘어갔고, 조만간 그들이 이곳을 침략할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깊게 생각해보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쾅-
채씨는 앞에 놓인 작은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유종이 놀라 움찔하자 채씨는 강경하게 소리쳤다.
“내일까지 결정하세요. 더는 시간을 못 드립니다.”
채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처소를 나가자, 유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그는 자리에 앉아 눈물을 쏟았다. 아직 정치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고, 어쩌다 보니 형주목이 되어 있는 판국이었다. 그저 아버지(유표)에게 물려받은 영토를 지키고 싶을 뿐 다른 욕심도 없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어렵게 되고 있었다. 가장 믿었던 채씨, 채모, 괴월등이 앞장섰고, 대신들이 그들의 비유를 맞춰서 압박을 해왔던 것이다.
“아버님. 어째서 소자에게 이렇게 무거운 짐을 남겨두고 떠나셨습니까?”
유종은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고 어깨를 가녀리게 떨며 울었다. 유종은 그날 저녁에 부손, 한숭등을 불러서 조용히 의견을 물어봤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입니다. 유비나 조조에게 모조리 뺏기느니, 차라리 우장군께 귀부를 하시고 형주목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 사료됩니다.”
“선택을 잘하셔야 합니다. 지금은 난세이니, 잘못하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채호군(채모)과 괴별가(괴월)가 이처럼 진언을 드리는 것도 모두 주군을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유념해 주십시오.”
이미 채모의 사람이 된 부손, 한숭은 유종을 향해 다시 한번 압박을 가했다. 유종의 나이가 20살만 되었어도 자신의 주관이 생겼겠지만, 겨우 10살인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그는 다음날 아침에 채모, 괴월의 제의를 받아 들였다. 전령이 급히 남양군으로 달려갔다. 전령이 숨가쁘게 말을 몰아 신야성에 도착했고, 이미 준비를 해놓고 이제나저제나 때를 기다리던 이통은 곧바로 군대를 출병시켰다. 전령은 곧바로 허창성으로 출발했다. 원매가 이통에게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먼저 출병하여 주요 지역을 장악하라고 미리 명령을 내려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였다.
이통을 대장으로 장수, 곽준, 마초, 마대가 보병 5만, 기병 8천을 이끌고 진군했다. 마초/마대가 급하게 기병 8천을 이끌고 배를 이용하여 면수를 도하하고는 남쪽으로 내달렸다. 장수, 곽준이 5만의 군대를 이끌고 뒤를 따랐으며, 이통은 호위대를 이끌고 양양성으로 들어섰다.
“이장군. 어서 오시게.”
“채호군. 괴별가.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통은 예를 표하고는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로 은밀하게 전달했다.
“주군께는 전령을 보냈습니다. 아마 며칠 뒤엔 주군의 친필이 담긴 죽간이 내려올 것입니다. 유종은 그대로 형주목에 있고, 채호군께서 보좌를 하면서 형주를 다스리시면 됩니다. 그리고, 괴별가께서는 괜찮으시다면 중앙으로 진출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중앙이라? 좋구먼.”
괴월이 순순히 긍정을 표했고, 채모 또한 형주를 실제로 다스리게 되었으니 불만이 없었다.
“그럼 두 분께서 동의하신 것으로 알고, 형주목을 뵙겠습니다.”
“그리하시게. 우장군께서 한번 내려오셔서 이곳 사람들에게 형주는 원가의 땅임을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시오?”
“지금 허창성에 계신데, 전령을 보내고, 제가 먼저 내려왔습니다. 곧 내려오실 것이니 염려 놓으십시오. 형주라는 큰 땅을 얻는데, 백성들을 위무하기 위해서라도 내려오셔야지요. 걱정 마십시오.”
“같이 가세.”
괴월과 채모는 만족스런 답변을 듣자, 이통과 함께 유종의 치소로 향했다. 유종은 어두운 안색으로 이통을 맞이했다.
“형주목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우장군의 지시를 받아 형주를 지키기 위해 내려온 이통이라고 합니다. 앞으로도 형주목께서는 변함없이 직위를 보장받으실 것이며, 필요한 것은 말씀하시면 언제든지 준비해놓겠습니다.”
“이장군. 그럼 우장군께서 내리시는 친필이 담긴 죽간은 없으신가요?”
“형주의 상황이 워낙 촉박하고 위급하여 저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며칠 내로 친필이 담긴 죽간이 올 것이고, 조만간 시간을 내서 주군께서 이곳을 방문할 것입니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니 염려는 놓으셔도 됩니다.”
이때 괴월이 끼어들었다.
“그렇습니다. 우장군은 믿을 수 있는 훌륭한 장군입니다. 제가 보증을 하겠습니다.”
유종은 괴월을 보고는 실소를 흘렸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지만, 괴월의 말투나 얼굴표정에서 욕심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유종의 이런 마음과는 상관없이 괴월과 채모가 번갈아 가며 원매를 칭찬하며 달래고 또 달랬다.
이통이 양양성에 머무르며 대신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대부분 그들의 직위를 보장해 주고 있을 때, 마초/마대가 이끄는 8천의 기병은 신속하게 말을 몰아 어느새 남군과 무릉군의 경계인 강릉성에 도착했다. 장수, 곽준이 이끄는 보병은 그 뒤를 따라 내려오는 중이었다.
강릉성.
이곳은 형중의 중심에 위치한 곳으로 물산이 풍부한 교통의 요지였다. 마초, 마대가 내려오자 이곳을 지키고 있던 이엄은 급히 달려 나왔다.
“채호군으로부터 전갈을 받았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릉성을 지키고 있는 이엄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마초입니다.”
마초는 이엄과 예를 표하여 인사를 나누고는 마대를 소개했다. 그리고, 주변에 주둔지를 편성하도록 지시하고 이엄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섰다. 이엄은 강릉을 중심으로 남군 남부지역과 무릉군 북부지역이 그려져 있는 지도를 보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보시다시피, 가운데로 강수(장강)가 흐르고 있습니다. 유비는 진릉, 원릉등 무릉군 남부지역을 장악했으며, 치소가 있는 북쪽의 임원은 아직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임원현은 남군과 무릉, 장사를 연결해주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또한, 강수의 지류인 원수가 크게 발달해 수상교통도 매우 편합니다. 이곳으로 군대를 보내어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유비는 무릉군 중앙인 이곳 원릉현에 있는 것이오?”
“그렇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배를 이용하여 도하를 하고, 지원을 하신다면 충분히 임원성을 지킬 수 있으리라 판단됩니다.”
마초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고는 강릉성을 지키던 수비병력 6천에서 이엄과 3천을 길 안내로 삼고, 나머지 3천으로 지키게 했다. 어차피 장수, 곽준이 곧 내려올 것이기에 3천을 남겨두는 것이 큰 무리수는 아니었다.
이엄을 앞세워 강수를 도하하고, 이틀을 달리자 임원성이 나타났다. 원수를 끼고 발달한 대도시 임원성은 한때 형주의 치소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번창한 도시였다. 마초가 달려갔을 때, 다행히도 임원성은 아직 유비에게 넘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이곳을 지키던 유망지는 성문을 열고 이엄과 마초를 받아 들였다. 유망지는 그들을 치소로 안내하고는 위급한 상황인지라 곧바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장군! 정말 제때에 오셨습니다. 만약 며칠이라도 늦게 오셨다면 모든 것이 끝장날 뻔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유비는 원릉성을 얻은 후에, 주변을 점령하며 올라오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지근거리에 원남성이 있는데, 원군이 도착하지 않고 유비가 압박을 한다면 아마도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원군이 왔으니 힘을 낼 것입니다.”
“걱정 마시오. 내가 선발대로 왔고, 곧 장수, 곽준이 이끄는 5만의 병력이 추가로 증병될 것이오. 적어도 열흘이면 모든 것이 조치될 것이니 걱정 마시고, 성을 지키는데 총력을 기울이시오.”
“힘이 나는군요. 그리 하겠습니다.”
마대에게 5천을 주어 원남성에 주둔시킨 후, 마초는 임원성에 3천을 이끌고 주둔했다. 이엄은 3천의 군사를 이끌고 강릉성으로 돌아갔다.
원매군이 임원/원남성까지 내려왔다는 소식은 원릉성에서 북상하고 있던 유비군에게도 전파되었다.
유비는 장사군에 남아 영릉, 계양까지 아우르며 하급관리와 백성들을 위무하고 있었고, 무릉군은 남쪽은 장비, 북쪽은 관우에게 임무를 주어 정복하게 하고 있었다. 남쪽은 병력이 별로 없었던 지라 수월하게 진행되었고, 병력이 집중되어 있던 원릉성이 열흘 정도를 버티다가 관우가 이끄는 2만의 병력에 함락되었다.
관우는 원릉성이 생각보다 오래 버티자, 유종군의 저력에 놀라 얕보지 않고 침착하게 하나씩 점령해서 올라가던 중 원매군이 내려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뿔싸! 원매에게 당했구나. 이토록 신속하게 접근할 줄은 몰랐어! 어찌한다?”
관우는 당황하여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는 정찰병을 보내어 더 자세하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결국 북쪽으로의 진격을 멈추었다. 그리고 유비에게 다시 명령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