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제 119장. 고람 : 충성 하나로 삼공에 오르다.
원매는 업성으로 죽간을 먼저 보내어 중앙관직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의논하겠다고 통보를 한 후, 순유를 데리고 상행길에 올랐다. 허창성에서 볼 때 업성은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4일정도를 말을 타고 가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산이 없고, 오로지 평야만 있었기에 빨리 갈 수 있었다.
업성 봉기 치소.
전풍은 원소로부터 죽간을 전해 받고는 봉기를 찾았다. 봉기는 죽간을 훑어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전별가께서 하면 될 터인데, 어찌 내게 가져 오셨소?”
약간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어투였다. 그간 중요한 일이 많아 서로 가까이 얼굴을 마주했지만, 둘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다. 전풍이 머리를 숙였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그간의 소원한 관계를 이 기회에 풀었으면 합니다. 주군께서 곧 황제에 오르시고, 우장군께서 황태자가 되십니다. 합심해서 일을 해도 힘이 들 터인데, 서로 엇박자가 나서야 되겠습니까? 그간 제가 고지식해서 불편했다면 사과 드리겠습니다.”
봉기도 그 말을 듣고는 느껴지는 바가 있어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는 전풍의 손을 잡고 사과했다.
“내가 속이 좁았소. 우장군은 사사로이 이 사람의 사위인데, 내가 먼저 이런 말을 꺼냈어야 했거늘. 허허허- 내가 나이를 헛먹었소. 앞으로도 잘 부탁 드리겠소.”
한마디가 어려웠을 뿐, 이런 식이라도 가슴에 쌓인 앙금을 조금 털어내자 표정은 그전보다 밝아졌다. 한번의 사과로 온전히 앙금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시작이 중요했다. 이후 둘은 대신들 관직을 어찌 배치할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풍이 원매를 배려하여 봉기로부터 추천을 받는 모양새가 되었다.
원소치소.
원매는 업성에 도착하자 곧바로 원소의 치소로 향했고, 순유는 전풍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녀석. 그사이에 더 늠름해졌구나. 이제는 문추도 너한테 안 된다면서?”
원소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원매의 어깨를 감싸 안고 치소 안으로 향했다. 원소의 팔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수척해졌기에 원매는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원소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그런 원매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자신의 몸 상태부터 이야기를 꺼냈다.
“네놈이 하도 걱정을 하니 내가 먼저 말하마. 몸이 안 좋은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몇 년 내에 죽을 정도도 아니니 우거지상 좀 하지 마라. 요즘 들어서는 신경도 덜 쓰고, 잠도 억지로 자고 있어. 당연히 술도 안 먹는다. 그러니 확실히 그전처럼 피곤하지 않아.”
원소는 장난스럽게 원매의 등을 토닥이고는 자리로 안내했다.
“다행입니다. 그렇게 규칙적인 생활만 해도 건강해지실 것입니다.”
“그래. 이번에 올라온 김에 며칠 쉬었다 가거라. 패(원패:원매 아들)도 보고, 아버지 노릇, 지아비 노릇도 하고 가거라. 그리고 네 어머니도 보고 가거라. 요즘 나를 돌보느라 많이 수척해졌어.”
“어머님과 같이 계시니까 좋으십니까?”
“마음은 편하구나. 유씨(원소의 첩)와 함께 있을 땐 못 느꼈던 편안함이야. 그때는 참으로 내가 못났었어.”
“유씨는 어디로 갔습니까?”
“쫓아 버렸으니, 업성에 없다. 기주에는 없을 테고, 친정인 연주로 갔겠지. 이제는 신경 쓰지 않는다. 아주 괘씸해.”
화가 나는 듯 원소는 얼굴이 붉어졌다. 누구도 원소의 면전에서 ‘첩의 자식’이라는 말은 함부로 꺼내지 못했는데, 유씨는 그런 말까지 꺼내며 원상을 지지하고, 원소의 속을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진정하십시오. 마음을 편안히 가지셔야 합니다.”
“그래. 관직개편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내 뜻은 전별가에게 전해 놓았으니, 상의해봐. 순유를 데려왔다고?”
“네. 현명한 인재니 잘 의논해서 처리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네 말을 듣고 보니 순씨들이 인재가 참 많아. 내가 데리고 있는 순심도 괜찮고, 조조를 섬기는 순욱도 일품이지. 내게 먼저 왔었는데,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떠났어. 지금 생각해보니 아깝긴 하지만,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 이제부터는 네가 주도권을 쥐고 정치를 해야 한다. 가후, 순유, 이유, 전풍, 저수, 봉기 이 정도면 어디에 내놓아도 밀리지 않아. 참, 그리고 승상을 하겠다고?”
“예. 좀 노골적으로 권력을 탐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권력을 탐하려면 뻔뻔해야 해. 그럴 필요가 있어. 승상부터 시작해봐. 적극 밀어줄 테니까.”
“고맙습니다.”
원소는 원매의 어깨를 다시 토닥이고는 정치적인 부분에 대해서 세세하게 조언을 해주었다. 제후들 중 정치력이 최고라 평가 받는 원소인 만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 많았다.
원소와 원매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순유는 전풍을 찾았다. 다소 우둔한 얼굴에 속을 들여다보기 어려운 순유와 날카로운 눈매와 예리해 보이는 전풍의 만남이었다.
“전별가. 처음 뵙겠습니다. 치중을 맡고 있는 순유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별가를 맡고 있는 전풍이라고 합니다. 자 이리로 앉으시지요.”
자리에 앉아 잠시 팽팽한 눈싸움을 벌이던 그들은 거의 동시에 미소를 지으면서 슬쩍 한 발짝씩 물러났다. 순유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것은 주군의 승낙을 얻어 작성한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가능하면 전별가의 의견을 많이 수용하라고 하셨습니다. 한번 훑어보시고 조언을 부탁 드립니다.”
순유가 공손하게 죽간을 내밀자, 전풍도 공손하게 받아 들었다. 그는 슬쩍 순유를 바라보고는 죽간으로 눈을 돌렸다. 원매가 승상부를 개설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삼사, 삼공, 구경에 대해서는 요구사항이 까다롭지 않았다.
아예 구경은 요구사항이 없었고, 삼사(천자의 스승. 고문직. 태사, 태부, 태보)중 태부에 원환을 추천했고, 삼공(최고관직. 사도-민정, 사마-군사, 사공-토목)중 사마에 고람을 추천했다.
“아무리 승상부를 따로 개설한다고 하시지만, 이 정도면 너무 양보하는 것 아닙니까? 최고위직 6개 중에서 4개를 제게 양보하시다니요?”
“주군의 뜻입니다. 마찰 없이 진행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그리고 원로급 인재를 살펴보면 업성에 훨씬 많으니까요. 어떻습니까?”
“이렇게까지 배려를 해주신다면 제가 일하기가 훨씬 수월해지겠군요. 사실 최염이 숙청을 당해 빠져나갔어도 괜찮은 인재들이 워낙 많아 고민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우장군의 책사인 이별가(이유), 가별가(가후)가 이순(60), 지천명(50)을 넘었고, 공이 뛰어납니다. 최소 한 분 정도는 삼사나 삼공으로 추천하셔도 무리가 없을 텐데요.”
“사실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하지만, 주군께서 초기에 승상부를 확실하게 꾸려야 한다고 쐐기를 박으셔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삼공, 삼사, 구경, 승상부 이렇게 4개조직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일을 처리하면 될듯합니다. 아마도 실무적인 손과 발은 저희 승상부에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순유의 말에 전풍의 눈이 가늘어졌다. 중요 높은 관직은 양보했지만, 실세는 모두 가져가겠다는 순유의 선포였다. 하지만, 전풍은 순순히 순유의 의견에 동의했다. 어차피 실세가 원매였고, 자기사람으로 꾸리겠다는데 반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라도 고위직과 황제직속인 구경을 넘겨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려해주었다는 인상을 받은 것이다.
“제가 우장군과는 여러 번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업성에 올라오실 때마다 제게 조언을 구하며 겸손한 자세를 취하셨지요. 그런 우장군께서 이렇게 제안을 해주셨는데 제가 따르는 게 도리겠지요.”
전풍은 죽간을 내려놓고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관직은 일단 이렇게 정하시고,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조조의 가신 중에는 영천군 출신 순씨, 곽씨, 조씨등의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 그곳 출신은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순욱, 순연, 곽가, 조엄등은 저와도 인연이 깊습니다. 어릴 적부터 같이 공부를 한 사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제가 공과사를 구분 못 할 정도는 아니니, 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아- 오해를 하셨군요. 순치중의 충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조조를 깨트리면 상당히 재능이 있는 그들을 어찌하실 요량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죽이거나 초야에 묻히기엔 아까운 인재들 아닙니까?”
“솔직히 주군께 보고는 드리겠지만, 판단은 그분의 몫입니다. 처음에야 모든 것이 부족해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조금의 능력이라도 된다면 산적이라도 받아들여야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어찌 보면 인재가 넘쳐나는 상황입니다. 순욱이라면 차기 승상감입니다. 뛰어난 인재지요.”
“승상감이라? 호오~ 상당히 높게 평가하시는 군요. 그럼, 우장군께서 황위에 오르시면 차기 승상은 생각해두고 계십니까?”
“글쎄요. 저희 쪽에서 한다면 가별가가 유력합니다. 이별가는 나이가 들어서 고문직으로 물러나기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주군께서 기주 세력과의 통합을 염두에 둔다면 이곳에서 승상을 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 된다면 전별가나 저감군이 유력하지 않겠습니까?”
“봉호군(봉기)은 아예 빼시는군요.”
“주군의 방침입니다. 인척들에게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약속하고, 기본적인 대우를 할 순 있어도 결코 나라를 좌지우지할 권력을 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삼사나 삼공, 구경 같은 자리를 줄 순 있지만, 승상 같은 실세의 자리는 힘들 것입니다.”
“봉호군이 들으면 섭섭하겠는데요.”
“주군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 이건 제가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그분의 소신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순유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이야기를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15년 정도를 내다보고 승상재목을 키우고 있습니다. 제갈량이라고 남양군에서 얻었는데, 처음부터 차기승상이라 쐐기를 박았습니다. 순환보직을 시키며 여러 가지 경험을 쌓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쌀과 농업에 대한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황당하군요. 미래를 보신다는 겁니까? 이별가나 가별가도 알고 있습니까?”
“그럼요. 그분들은 주군의 인사권을 행사하면 무조건 동의합니다. 처음에 뛰어난 인재를 얻을 때, 오로지 주군의 능력으로 얻었는데 신기하게 인재들을 쏙쏙 뽑아냈습니다. 지금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마치 사람을 보면 머리 위에 이만큼 능력이 뛰어나다. 이런 글을 보는 것처럼 쏙쏙 골라내니까요. 제가 말하고도 황당하군요. 믿거나 말거나 자유입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손찬 휘하에 있던 전예를 뽑아낸 것도 그렇고, 곽도, 신평, 신비, 심배, 허유등 능력이 있어도 욕심 많고 무리수가 있는 인물들은 모조리 배제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 부분은 순치중의 의견을 반영하고, 나머지 인사는 주군의 뜻을 받들어서 처리하겠습니다.”
중요한 이야기가 마무리 지어지자, 순유는 전풍과 한담을 나누며 좀더 친근해지려고 노력했다. 원매는 원소의 치소를 물러나온 후 황옥을 만났다. 황옥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안색이 평안해 보이십니다.”
“그래 보이느냐? 다시 업성에 돌아오고, 상공과 함께 있다 보니 꿈만 같구나. 너만 이곳에 있다면 바랄 나위가 없겠는데, 이 어미의 욕심이겠지?”
“어쩌겠습니까? 세상이 저를 놔두지를 않는 것을. 필요할 때는 군대를 이끌고 제가 직접 나서야 합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내가 주책없이 오래 붙잡았구나. 가자.”
황옥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서자, 봉영이 패를 안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몇 달 만에 얼굴을 보는지라 만날 때마다 눈물을 쏟았다. 그전에는 눈물을 쏟는 게 전부였지만, 이제는 패를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만 한 살을 넘은 패는 제법 커져 있었다. 아직 옹알이를 하지는 못했지만, 손발을 움직이고, 입을 계속 움직이는 것을 보아 조만간 시작할 것 같았다. 원패를 볼 때마다 분신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