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제 106장. 형님! 한번만 도와주시오.
오씨의 등장에 힘이 난 우번은 병사들을 뿌리치고는 그녀를 당당히 맞이했다. 방금 전에 죽을 뻔한 위기를 맞은 우번이었지만, 당당한 표정만큼은 칭찬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 보게. 공근(주유).”
“예. 대부인 말씀하십시오.”
“이런 일이라면 당연히 나부터 찾아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송구합니다. 강동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었습니다.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대부인을 찾아 뵈려고 했습니다.”
오씨는 당당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초췌했다. 주유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손책의 사망소식을 전했기에 그 슬픔을 이겨내느라 매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오늘도 주유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움에 달려왔지만, 그녀가 마주친 현실은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인가? 그전에 연통을 보냈을 때는 자네가 후계자가 된다는 말은 없었어. 이곳은 손가의 땅일세.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자네가 어찌 이리 나온단 말인가?”
“다시 말씀 드리지만, 강동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주군의 유언으로 이 자리에 올랐을 뿐, 사사로운 욕심으로 오른 게 아닙니다.”
오씨는 고개를 돌려 황개를 노려보았다. 손가의 충신인 황개를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
“이보시오. 황장군. 그대가 이야기를 해보시오.”
황개는 난처한 표정으로 주유와 오씨를 바라보고는 짧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주장군의 말이 맞습니다. 유언이 있었고, 주장군도 며칠을 고사했습니다. 강동의 혼란을 막기 위해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황개마저 그리 나오자 오씨는 말문이 막혔다. 이번에는 오씨의 등장으로 목숨을 건진 우번의 입이 벌어졌다.
“들을 가치도 없는 비겁한 변명입니다. 어찌 손가의 땅을 주가에게 넘기겠습니까? 주군께서 몸이 좋지 않아서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는데, 주가 놈이 제멋대로 해석을 한 것이지요. 평소에는 군자인척하며 선하게 포장을 하더니, 기회가 생기니까 위선자의 탈을 벗어 던지고 욕심을 드러냈습니다. 저런 놈의 말을 어찌 믿겠습니까?”
오씨의 등장에 이어, 우번이 계속해서 주유를 헐뜯고 혹평하자 대신들도 하나 둘씩 그의 부당함을 지적했다. 대대로 손가의 덕을 입어온 그들로서는 주유가 마땅치 않음이 분명했다.
다만, 장소와 장굉은 입을 꾹 닫고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았다. 강동출신이 아닌 그들로서는 이런 개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어느 쪽으로 결정이 나든 빨리 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주유는 차분히 앉아서 누가 자신의 편이고, 누가 적인지를 구분해냈다. 그는 손책처럼 감정을 앞세우지 않았고, 냉철한 이성으로 최선의 방안을 찾아가고 있었다.
“분명히 말해두겠습니다. 대부인께서 주군의 모친이지만, 주군의 유언을 의심하는 행동은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강동을 다스리고, 천하를 통일해야 하는 주군의 뜻을 받들어야 합니다. 이런 소모적인 감정싸움을 벌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대부인께서는 제게 일을 맡기시고 잠시 돌아가 계십시오. 제가 곧 다시 찾아 뵙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유의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투에 오씨는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우번! 네놈은 돌아가신 주군을 욕보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주군을 모욕한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여봐라! 무엇하느냐? 어서 우번 저놈을 끌어다가 목을 베어라!”
“안 된다!”
오씨가 다시 주유를 막아 섰다. 주유는 한번 물러설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부정적인 상념을 떨쳤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난관이 있을지는 불을 보듯 훤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우번처럼 입으로 모든 것을 해치우는 놈을 살려두었다가는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하여 주유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꺼내들었다.
“태사장군(태사자)! 주군을 욕보이고, 반역을 꾀하는 우번을 지금 즉시 처단하시오! 만약 태사장군의 앞을 막아서는 자가 있다면 반역으로 간주하겠소!”
태사자가 기세 좋게 칼을 뽑아 들었다. 반역이라는 말에 대신들이 움찔하며 머뭇거렸다. 정보가 급히 오씨를 제지하는 가운데 태사자가 우번을 끌고 나갔다. 우번이 고래 고래 욕설을 퍼부으며 끌려나갔고, 오씨가 우번을 사죄해줄 것을 요청했다.
여러 번의 요청에도 주유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강동의 주인이 주유가 되었음을 확실하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아군과 적군을 확실하게 가릴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모두를 품을 생각이 없었기에 초반부터 단단히 잡을 요량이었다.
곧이어 외마디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고, 오씨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태사자가 쟁반에 우번의 목을 받쳐들고 와서 주유에게 바쳤다. 주유는 그 목을 높이 들고 다시 소리쳤다.
“이자는 감히 돌아가신 주군을 욕되게 하였고, 반역을 도모했기에 처형을 하였소. 앞으로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오! 알겠소?”
“예.”
대신들이 힘없이 대답할 때, 주유는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자신의 편이 누군지를 알아차렸다.
‘장소, 장굉, 엄준은 내편이로구나. 나머지 놈들은 두고 봐야지. 특히 오경(손견 처남) 저놈을 유심히 살펴야 해!’
주유의 일장 연설이 펼쳐졌고, 대신들은 말릉성에 억류되었다. 오씨도 처소로 향했고, 주위는 철통같이 경계를 세웠다. 또한 각 군현으로 주유가 손책의 유언에 따라 새로운 강동의 주인이 되었음을 알렸다. 그간 손가가 강동에 쌓아 놓은 것도 꽤 컸기에, 당분간은 주유의 고전이 예상되고 있었다.
연주 동군 범현.
장패는 날이 어두워지자 급히 주둔지를 편성했다. 병사들이 급하게 주둔지를 편성하는 것을 보는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조조에게서 받은 명령은 간단했다.
-주령의 2만 5천이 군량창고를 습격하는 동안, 악진의 3만을 지원받아 원매의 본진을 공격하라! 곧바로 조조자신이 대군을 이끌고 뒤를 받치겠다!
처음에는 조조가 친히 대군을 이끌고 온다 했기에 그를 믿고 급속행군을 통해 진군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불안했다. 원매의 병력은 40만으로 엄청났고, 본진과 군량창고를 지키는데, 20만이 주둔 중이었다.
만약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지원하지 않는다면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 한가지 의심스러운 것은 왜 제일 강한 본진을 공격하느냐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불길한 예감에 요즘은 피가 마르는 느낌이었다.
‘휴- 그냥 낭야국에서 왕 노릇이나 하면서 편안히 살 것을.’
장패는 다시 병사들이 주둔지를 편성하는 것을 보며 걸음을 옮길 때였다. 낮이 익은 한 무장이 병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장패는 반가움을 드러냈다.
“아니? 자네는 사마구가 아닌가? 이게 얼마만이야?”
“형님! 건강하셨습니까?”
사마구는 꾸벅 인사를 하며 밝은 웃음을 지었다. 사마구와 장패는 태산일대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엄청난 친분은 아니지만, 서로 안면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못 보던 사이에 신수가 훤해졌군! 그래, 어인 일로 오셨는가?”
“그건 제가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사마구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뜻밖에 사람이 입을 열었다. 사마구가 데려온 초라한 늙은이였다.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자세히 보니 눈빛이 형형한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 가후였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장패는 그제야 사마구가아니라 가후가 주인공임을 깨달았다. 사마구를 한번 째려보고는 막사로 안내했다.
“이 보게. 사마구. 이자는 누구인가?”
“형님! 저는 우장군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분은 별가 가후라고 합니다. 형님께 긴요하게 전달한 말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노여워하지 마시고, 가별가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내가 거기장군(조조)을 따르는 것을 모르고 오셨는가? 당장이라도 둘의 목을 날려버릴 수 있어!”
장패의 으름장에 가후는 안색을 바꾸지 않고, 입을 열었다.
“장군은 이번 작전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본군에는 보병 16만, 기병 4만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행로를 분석해보면 본군을 향해 진격하고 계신데, 조거기가 불합리한 명령을 내렸다고 생각이 되지 않습니까?”
장패는 자신의 속을 꽤 뚫어 보는 듯한 가후의 말에 섬뜩함을 느껴,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장군도 아시겠지만, 우장군의 기병은 중원최강입니다. 더군다나 4만입니다. 야전을 벌여서는 절대 이길 수가 없습니다. 무모한 전투지요. 암요. 무모한 전투입니다. 장군께서는 그렇게 목숨을 잃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이기에 제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나보고 거기장군을 배신하란 말인가?”
“배신이 아닙니다. 살길을 찾는 것이지요. 난세에 명분이 어딨습니까? 그저 살아남은 강자가 만든 것이 명분일 뿐입니다. 살아남을 확률로 본다면 우장군이 거기장군보다 훨씬 높습니다.”
장패의 눈빛이 흔들리자, 가후는 대략적인 조조의 계획을 알아차렸다. 장패를 지원하는 세력이 크지 않다는 것을.
“장군께서 공격을 하더라도 거기장군이 많은 병력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보낸다고 했더라도 장군은 오지 않으면 어쩌나 불안할 것입니다. 거기장군의 병력이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한다면 장군의 부대는 몰살될 것입니다. 이것은 불합리합니다. 이번 작전이 실패해도 거기장군은 잃는 것이 별로 없지만, 장군은 병력을 잃고, 최악의 경우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장패가 말이 없자, 가후에 이어 사마구가 입을 열었다. 그는 원매를 따른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차분하게, 하지만 열정적으로 설명했고, 원매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를 호소했다. 그가 알아주기를 바랬기 때문에 그의 언변은 강하게 힘이 실리고 있었다.
“아니? 자네 진정 사마구가 맞는가? 혹시 쌍둥이 형 아닌가? 이 사람아. 어찌 이렇게 변할 수 있는가?”
“형님. 저도 우장군을 따르면서 글을 깨우치고, 세상살이에 눈을 떴소. 도적질이나 하던 내가 떳떳하게 아장(호위대장)을 하고 있소. 그분이라면 형님을 하나의 이용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무장, 아니 한 명의 인간으로 대우할 것입니다.”
인간으로 대우를 한다는 말이 장패의 심금을 울렸다. 자신이 큰 세력을 가졌으니 모두 두려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존경심은 없었다. 사마구의 말을 들으니 자신도 사람대접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급격하게 조조에 대한 충성심이 흔들렸다.
사마구가 가까이 다가와서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형님! 이 사마구를 믿어주시오. 내 눈을 보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않소? 우리도 사람답게 사십시다.”
사마구가 눈물까지 찔끔 흘리자, 장패의 마음은 흔들렸다. 결국 사마구의 설득에 얼음처럼 단단했던 장패의 마음이 녹아 내렸고, 가후는 장패로부터 조조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가후가 가져온 황금을 장패에게 선물로 바치고, 이번 전투가 끝나면 많은 포상과 관직을 제수할 것임을 약속했다. 또한, 원매가 직접 써준 죽간을 주어 그를 안심시켰다. 장패는 가후에게 충성의 서약을 죽간에 적어 넘겨주었다.
멀어져 가는 사마구와 가후를 보며 장패는 자신의 머리를 치며 자책했다.
“내가 뭔가에 홀렸구나. 홀렸어. 이런 미친 짓을 하다니.”
겉으로 나온 말과는 다르게 그의 마음은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래. 난세다. 빌어먹을!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누가 알아준다더냐? 기병이 4만이라니. 휴- 까딱했다가는 그냥 저 세상으로 갈뻔했구나. 조조가 참으로 야속하구나. 기병 4만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은 것을 보니 나를 이용하고 버리려는 것이 분명해. 내가 잘 선택한 거야.’
장패는 애써 자신이 선택이 옳았음을 합리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