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제 102장. 곽가郭嘉의 계책戒責.
조조군영.
촤르르륵-
곱게 말아진 죽간을 거칠게 펴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무심하게 하지만 꼼꼼하게 글을 읽어 내려갔다. 다 읽은 죽간을 빠르게 확인을 한 후, 탁자에 내려 놓았다.
“순문약도 이번 일에는 별다른 계책을 내놓지 못하는구나. 나 조맹덕이 이리 허무하게 무너져야 한단 말인가?”
조조는 씁쓸하게 웃었다. 물량작전이 무섭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뼈저리게 당할 줄은 몰랐다.
“허창성으로 후퇴할까?”
전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대치하면서 귀한 군량만 축내고 있으니 생각하지도 못한 말이 불쑥 튀어 나왔다.
“조금만 버티십시오. 분명 기회가 있을 것이고, 수가 생길 것입니다.”
곽가는 정말로 후퇴를 하는 줄 알고 조조를 설득했다. 조조가 빙그레 웃었다.
“내가 바보야? 누구 좋으라고 후퇴를 해. 반드시 원매 이놈을 죽여버리고 말겠어.”
“주군. 제가 요즘 살펴보니, 제일 서쪽에 장합군영이 위치하고 있는데, 기병은 없고 보병만 있습니다. 기병은 원매가 모조리 손에 쥐고 있습니다. 물론 10만을 가지고 있으니, 장합도 만만치는 않지만, 야간 기습을 해서 그간 쌓인 병사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병사들의 불만을 해소하자고 전쟁을 일으키잔 말인가?”
“설마요. 그건 부수적인 성과입니다. 십만으로 야간에 기습을 하시고, 3만은 남겨 군영을 지키게 하십시오. 그리고 원매, 문추군영에서 지원 나오는 길목에 7만을 매복시켜서 그들을 물리치면 됩니다. 야간에 매복한 것이니 꽤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흠- 괜찮긴 하군. 장합이라는 놈은 어떤 놈이야?”
“곽도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아주 계산이 빠르다고 합니다. 머리도 좋고, 지략도 뛰어나고 용맹하고, 출세하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고요.”
“웬지 그 말속에 숨은 뜻이 있는 거 같은데?”
“역시 주군의 직감은 속이지 못하겠군요. 상황이 불리해지면 항복할 놈입니다. 항복도 그냥 하는 게 아니라 대우를 받기 위해서 어떤 짓이든 서슴없이 저지를 놈이지요.”
“흐흐흐흐. 알겠어. 자네 말뜻을 알겠어. 지금은 원매가 장합을 잘 다독여놓았으니 항복할 리는 없다. 이번 전투를 통해서 그 놈을 궁지에 몰면 항복할 것이다. 이 말이지?”
“제가 이래서 다른 제후들이 아무리 좋은 대우를 약속해도 주군을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에 제 계책을 알아주시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아. 말은 제대로 해야지. 매일 술이나 먹고 계집질하는데, 나 아니면 누가 자네를 거두는가?”
곽가와 대화를 나누며 조조의 얼굴은 많이 편해졌다. 그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책사가 곽가였다.
이틀에 걸쳐 꼼꼼하게 계책을 수립한 곽가는 조조의 허락을 득하고, 야간에 곧바로 작전을 시행했다.
유연, 사환에게 3만을 주어 군영을 지키게 했고, 조인, 악진, 서황에게 10만을 주어 장합을 공격하게 했다. 장료/조휴에게 보병 3만, 기병 7천을, 조홍/조순/하후연에게 보병 4만, 기병 1만 3천을 주어 각각 문추와 원매의 지원군을 매복 습격하도록 지시했다.
조조의 명령에 군사들은 눈을 반짝이며 임무를 수행하러 진군을 시작했다. 장료군과 조홍군이 먼저 출발하여 매복지를 선점했고, 조인군 10만이 장합군을 치기 위해 행군을 서둘렀다.
장합군영.
장합은 경계를 확인하고는 잠이 들었다. 계산이 빠른 그는 조금의 실수로 책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장수 중 최고의 서열까지 오르길 원했기에, 항상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장군! 어서 일어나십시오! 큰일났습니다!”
경계를 담당하는 이교위가 급히 들어왔다.
“물!”
장합이 소리치자 호위병이 급히 물을 가져왔고, 장합은 머리에 물을 부었다. 차가운 물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타고 흐르며 잠을 멀리 내쫓았다. 어느새 그의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자세히 말해봐.”
“조조군의 기습입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병력이 군영밖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반각(7분)정도면 근처에 도착하여 공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모두 잠에서 깨워! 비상체제에 돌입한다!”
“예! 장군!”
이교위가 급히 달려나갔고,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모든 망루에는 횃불이 피어 오르며 주위를 붉게 물들였다.
지휘소에서 신호를 담당하는 병사가 커다란 활을 들어 하늘 높이 불화살을 쏘아 올렸다. 발에 걸어 쏠 정도로 거대한 화살이었고, 덕분에 불화살은 매우 높이 날아갔다. 원매와 문추에게 구원을 알리는 신호였다.
슈슈슈슈슉-
어느새 조조의 궁병들이 근처에 자리를 잡고 활을 쏘았다. 장합군은 방책을 앞에 두고 숨었지만, 불빛에 노출되었고, 조조군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어 초반에는 장합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하지만, 방책으로 보호가 되었기에 10만에 비해서는 조족지혈이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이번에는 불화살 공격이 시작되었다.
불화살은 방책 안으로 떨어졌고, 곳곳에 불길이 솟구쳤다. 장합은 수천 명을 화재진압부대로 편성했고, 나머지 병력들은 방어를 명령했다. 수천 명이 일사분란 하게 움직이며 불을 끄자, 조조군의 불화살 공격도 무위로 돌아갔다.
쿵- 쿵-
통나무를 이용한 공격에 방책 곳곳이 뚫렸고, 곧 백병전으로 이어졌다. 방책이 나무를 세워놓은 것이었기에 긴 통나무를 이용한 돌격공격에는 취약했다.
장합은 직접 정예부대를 이끌고 침입한 조조군을 물리치고는 방책을 수리했다. 이 같은 상황이 반복되며 장합군영은 무너질 듯 하면서도 침착하게 버텨내었다.
원매군영.
“주군! 급보입니다. 장합군영에서 급히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원매는 눈이 떠지지 않았다. 머리를 흔들고는 뺨을 때려 잠을 깼다. 어느새 도착한 사마구가 물수건과 물을 가져왔다. 급히 물을 마시고,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자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기병은 출정을 준비하라! 가별가, 전장군을 소집하라! 서둘러라!”
원매는 명령을 내리고는 사마구의 도움을 받으며 갑주를 챙겨 입었다.
“주군! 서두르시면 안됩니다. 저들이 조용히 있다가 이리 공격하는 것을 보니 분명히 다른 목적이 있다고 사료됩니다.”
사마구의 진언에 원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좀더 자세하게 말해보게.”
“예. 장합군영은 10만이 있습니다. 방책으로 막고 있기 때문에 단시간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야간공격이니 공격측에서 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병력도 부족한데 왜 공격을 했겠습니까? 아마도 지원군을 노릴 것이라 생각됩니다.”
“지원군을 노린다?”
“제대로 봤습니다. 사마아장이 참으로 든든하군요.”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가후가 들어서고 있었다. 원매는 가후를 보자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어서 오시오.”
원매가 자리를 권하자 가후가 자리에 앉고는 사마구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이러다가 제자리가 남아나지 않겠습니다. 허허허-“
“어찌 가별가를 따라가겠습니까? 소장은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말씀을 드린 것뿐입니다. 상황이 급박하니 가별가께서 어서 계책을 말씀하시지요.”
가후는 고개를 숙여 사마구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원매를 바라보며 진언을 시작했다.
“지금은 깊은 밤입니다. 지원을 나간다면 필시 매복에 당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급하게 나갔다가 기병전투력이 꺾이기라도 한다면, 조조에게 점했던 우위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두시진(4시간)정도만 기다리면 날이 밝을 것입니다. 지금 점고를 해놓았다가 어슴푸레 날이 밝기 시작하면 그때 출병을 하시지요. 장합이 10만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설마 그 시간을 못 막겠습니까?”
원매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장합이 뛰어난 장수임은 분명하지만, 역사에서 보면 위급하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만약 상황이 꼬여서 위태로워진다면 항복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원매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가후가 추가로 진언을 이어갔다.
“항복할까 걱정되십니까?”
“내 속이 뻔히 보이시오?”
원매가 쓴 웃음을 짓자, 가후가 정색을 하고 진언을 올렸다.
“주군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어찌어찌 상황이 꼬여서 장합이 곤란한 지경에 빠진다면 지원하지 않는 주군을 원망하며 항복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장합을 믿어야 합니다. 제가 볼 때 그의 눈은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만약 주군께서 며칠 지원을 하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가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공을 세울 기회라고 판단한다? 이 뜻이오?”
“바로 보셨습니다. 혼자서 막아내면 그 공은 엄청날 테니까요. 물론 상황이 정말 잘못된다면 죽느니 항복을 하겠지요. 제 생각으로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서 공을 세우려고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아침에 출병해도 충분합니다.”
“알겠소. 병사들에게 급히 밥을 해서 먹이고, 문추군에게 전령을 보내시오.”
“명을 따르겠습니다.”
가후가 복명을 하고 밖으로 나서자, 사마구도 호위기병을 점검한다며 따라 나섰다. 조운은 원매 뒤를 단단히 지켰다. 원매는 지도를 보며 고민을 하다 조운을 바라 보았다.
“자룡! 자네는 부대를 지휘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가?”
“주군께서 맡겨주시면 그때 지휘하겠습니다. 지금은 제 임무가 주군을 호위하는 것이니까요. 언제든 명령을 내리시면 따르겠습니다.”
“사람하고는. 아침에 출병해서 전투가 벌어지면 한번 선봉에 서봐. 조조군에서 과연 자네를 감당할 자가 있는지 모르겠군. 어서 나가서 사마구와 함께 기병을 점검하게.”
“명을 따르겠습니다.”
조운마저 밖으로 나가자 지휘소는 적막해졌다. 종사관 몇 명이 자리를 지키며 명을 기다릴 뿐이었다.
조홍은 원매의 지원군이 올 것으로 예상되는 길목에 병력을 매복하고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뒤쪽에서 장합군영에 불길이 솟아 오르고 비명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올 때가 됐는데, 이상하군.”
조홍이 초조한지 중얼거리며 원매군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조하시오?”
고개를 돌려보니 하후연이었다.
“묘재(하후연)아니신가? 그래. 참으로 초조하군. 이번에 주군께서 모처럼 마음먹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반드시 성과가 있어야 해. 어찌 보면 지금 우리의 역할이 제일 중요하지. 그런데 왜 안 올까? 곧 새벽이 밝아올 텐데 말이지.”
“기다려보시지요. 그것은 저나 장군이 어찌할 상황이 아니니까요. 만약에 아침이 되도록 적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후퇴를 하셔야 합니다. 원매가 기병 4만을 이끌고 나타나면 현재의 병력으로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 휴- 4만이라니. 기가 막히는군. 저놈들의 기병을 꺾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와줬으면 좋겠어.”
조홍은 말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원매군 방향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기병이든 보병이든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그저 쓸쓸한 바람만이 그들의 뺨을 때릴 뿐이었다. 그렇게 장합군영에서는 서로 죽어라 싸움이 계속되었고, 장료군과 조홍군은 애꿎은 시간만 낭비하며 매복지에서 추위에 떨어야했다.
문추도 군영에 1만을 남겨 지키게 하고, 9만의 병력을 점고했다. 날이 밝는 대로 출병할 계획이었다. 그의 눈에는 어떤 초조감도 없는 무심한 눈이었다.
‘장합이 이 정도는 버텨주겠지. 기다렸다가 아침에 지원군을 출발시키는 것은 옳은 명령이야. 역시 우장군께서는 후계자로서 손색이 없구나.’
조인과 서황은 계속해서 장합군영 공격을 독려했다. 끊임없는 공격에 곳곳의 방책이 부숴졌지만, 장합이 결사적으로 막아내면서 야속한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무너진 방책 틈으로 병사들을 우겨 넣으면서 서황이 직접 호위병들을 이끌고 난입했다. 서황을 비롯한 정예병들이 투입되자 서서히 장합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모조리 죽여라!”
피를 뒤집어쓴 악귀 같은 서황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연신 소리쳤다. 어느 정도 공간을 확보했다고 판단될 때쯤, 장합이 이끄는 정예부대가 서황의 앞을 막아 섰다.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여 서황과 장합이 맞붙자, 주위에 넓은 공간이 형성되었다.
캉- 캉-
서황의 도끼와 장합의 대도는 한치도 양보 없이 밀고, 밀리는 접전을 벌였다.
“네놈이 장합이로구나! 목을 내놓아라!”
서황이 커다란 도끼를 날리자 장합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아슬아슬하게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