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제 79장. 갑을甲乙(?)
원매가 마초와 오일의 간격을 두고 대련을 펼치고 연습을 통해 무예를 계속 수련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마초는 넘어설 수가 없었다. 한시진(두 시간)이나 이어진 연습에 체력이 방전된 원매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무엇이 문제인가? 마초와 같은 극강의 장수를 극복하려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정녕 그 정도의 천재는 극복하지 못한단 말인가?’
원매는 생각을 거듭했지만,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생각을 멈추었다. 언젠가는 되겠지. 이게 그의 생각이었다. 나이는 충분히 젊고, 굉장히 높은 단계까지 착실하게 올라왔다. 지금 난관에 부딪혔지만, 노력하다 보면 분명히 길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 무력 100으로 설정되어 있으니까.
기주. 업성.
봉기는 치소에서 원희를 만나고 있었다. 원희는 원소에게 유주에 대한 상황보고를 하러 내려왔다가, 얼떨결에 봉기에게 잡힌 것이다.
“이공자. 유주의 생활은 어떠십니까?”
“뭐, 황량하기는 한데 나쁘지는 않소. 한형이 문관들을 잘 통제해주고 있고, 장수로는 초촉, 장남이 자리잡고 있으니, 나야 그들만 잘 통제하면 문제없소. 다 아실 터인데, 혹시 할말이 있으신게요?”
“사실 요즘 들어 대공자(원담)나 사공자(원상)께서 지나치게 흥분해계십니다. 그 둘을 지지하는 심배나 곽도 이런 이들이 오히려 조조편을 들고 나서니 참으로 민망하고 당황스럽습니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그게 그런 의도가 숨어 있었군요. 하지만, 저는 후계자다툼에 끼어들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아버님이 누군가를 후계자로 공식 인정한다면 그를 도울 생각입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삼공자(원매)를 도와달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번 일과 같은 일이 반복되면 안되기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형제들끼리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주군께서도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훗- 그걸 누가 모릅니까? 전부 욕심에 눈이 멀어서 그런 것이지요. 솔직히 지금 현옹(원매)이가 앞서나가고 있지만, 저는 진흙탕의 개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습니다.”
원희는 단호하게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봉기는 답답했지만, 다시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너무 앞서나갔군요. 하지만, 주군의 건강이 좋지 않은데 계속 형제들간의 분란이 일어나면 안되지 않습니까? 하여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꼭 삼공자를 도와달라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원희는 돌아서서 나가려다 멈칫했다.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이오?”
“다른 건 없습니다. 주군께서 후계자를 정하시면 그때 강력하게 지지를 하시고, 탈락한 자들을 설득해 주십시오. 저는 원가에 분란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좋소. 당연히 내가 할 일이오.”
원희는 말을 마치자 그대로 치소를 빠져 나갔다. 봉기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됐다. 이제 삼공자가 후계자가 되었을 때,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이공자가 지지선언을 한다면 대공자나 사공자가 감히 반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이 정도 해놓았으니 대공자나 사공자를 편들지 않고 중립을 지킬 것이다. 큰 산을 하나 넘었구나.’
심배치소.
심배는 요즘 굉장히 불안했고, 초조했다. 요즘은 원상을 지지하던 대신들이 슬슬 자신과 거리를 두는 모습이 역력했다. 지난번에 삼공자를 대놓고 탄핵했을 때, 그들이 자신에게 보내던 경멸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다.
‘내가 오판을 했구나. 주군이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일은 일단 피하고 보는데, 어찌 그렇게 강력하게 나오셨을까? 허창에서 온 사신들도 주군의 서슬 퍼런 위세에 눌려 제대로 말도 못하고 돌아갔다. 도대체 삼공자가 뭔 짓을 해놓았기에 저리 하는 것이야? 이리 되면 후계자는 힘도 못쓰고 삼공자에게 넘어가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어. 그럴 수는!’
심배는 불안한 마음에 이런 저런 궁리를 해봤지만,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같이 발을 맞추기로 했던 곽도와 신평은 원소의 단호한 태도를 보고는 곧바로 발을 뺐다. 오히려 자신들은 속은 것이라며 모든 것을 심배에게 뒤집어 씌우고 유유히 빠져 나왔다.
‘이 쳐죽일 놈들! 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어쩐다? 그래. 허자원(허유)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심배는 뜻을 세우자, 곧바로 허유의 치소로 향했다. 허유의 치소에 도착했을 때, 심배 특유의 능청거리는 웃음이 얼굴에서 사라졌다. 봉기와 허유가 웃음을 터트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심치중. 어서 오시오. 오늘은 내가 손님대접으로 바쁜 날이로군. 봉호군에 이어 심치중까지 누추한 이곳을 방문해 주시고 말이야.”
심배가 굳은 얼굴을 펴며 예를 표할 때, 봉기가 빙그레 웃었다.
“어서 오게. 안 그래도 자네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참으로 용감하다고 말이야. 난 주군께서 그리 화내시면 무서워서 말을 못하는데.”
봉기가 웃으며 이죽거리자, 심배의 얼굴은 똥 씹은 듯 찌그러졌다. 허유가 급히 둘을 중재했다.
“아니 뭘 이런 걸 가지고 티격태격하시오. 자- 심치중도 이리 앉으시오.”
허유는 심배를 강제로 자리에 앉히고는 차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심배는 차를 마시며 부글거리는 속을 달랬다.
“봉호군이 오셔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소. 이제 공손찬도 멸망시키면 곧 조조를 공격할 것이니 그때 어찌할까를 고민 중이었소. 아마 그때 심치중께서 후방지원을 맡으실 텐데 임무가 막중합니다.”
심배는 차를 마시며 대답하지 않았다. 봉기가 벌써 선수를 쳤다는 것이 강하게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허유는 이후 업성이 평화로워야 하는데, 후계자문제로 암투가 벌어지는 것 같아 걱정된다. 빨리 천하를 통일해서 안정시켜야 한다. 세상에 둘도 없는 충신인 것처럼 떠들어대다가 심배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말이 없으시오. 이곳까지 왔으면 할말이 있어 온 게 아니오?”
심배는 봉기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입을 닫았다. 도움을 요청하러 왔는데, 이런 말을 하면 분명히 봉기의 비웃음이 터질 것은 자명했다.
“내가 있어서 불편한가 보구먼.”
봉기는 허유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심배는 봉기가 사라지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이보시게. 허자원. 아무래도 내가 말실수를 했던 것 같으이. 혹시라도 주군께서 자네에게 뭔가 말씀하신 것 없으신가? 아니면 들은 상황이라도 있으면 말해주시게.”
심배가 머리를 조아리자, 허유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런걸 가지고 이리 위축되셨소? 걱정 마시오. 주군께서 뭐라 하시면 내가 적극적으로 편을 들겠소. 그리고, 아직까지는 주군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소. 그냥 속으로 삭히신 것 같소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조심하시면 될 것이오.”
“그렇소? 고맙소.”
허유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심배를 위로했다. 심배는 치소를 나오자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해진 것을 비로소 알아챘다.
‘빌어먹을! 내가 허자원 이 새끼한테 머리를 조아리는 날이 올 줄이야.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다. 언젠가는. 그때가 되면 모조리 뒤엎어주마.’
심배는 이를 악물고는 자신의 치소로 돌아갔다. 허유는 치소에서 봉기, 심배의 만남을 복기하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힘의 균형추가 봉기에게 넘어왔군. 심배는 껍데기만 가지고 있었어. 흐흐흐흐- 그전에 심배에게 잘 보이려고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 조금 더 기다리다가 제일 힘센 놈에게 붙으면 되겠지. 그건 그렇고, 심배 놈 얼굴이 볼만했어. 그간 그토록 잘난 체를 하더니 아주 똥 씹은 표정이 볼만했어. 흐흐흐흐-‘
허유는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시원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토록 잘난체하던 곽도, 심배가 꼬꾸라지고, 오롯이 봉기 혼자 우뚝 섰어. 참 세상 오래 살고 볼일이야. 3년전만해도 별볼일 없던 삼공자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업성에서 봉기, 심배, 곽도, 허유의 위치가 미묘하게 조정되고 있었다. 전풍/저수는 이런 일에 관심이 없었고, 아쉽게도 원소가 견제를 하는 통에 입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능력은 있지만 깐깐한 그들이 원소로서는 불편했던 것이다.
원소가 이번에 심배와 곽도가 괘씸하면서도 내치지 못한 이유가 전풍/저수를 견제하려면 이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허창성.
곽가는 심히 속이 불편했다. 자신이 조조에게 올렸던 계책이 사실상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 뒷수습을 순욱이 한 것이다. 순욱보다 못할게 없다고 생각을 했지만, 주변의 상황이나 조조의 신임을 보면 자신을 그 밑으로 보는 것이 괴로웠다.
이대로 계속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자, 곽가는 순욱을 찾아갔다. 순욱은 곽가를 힐끔 보고는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앉아서 기다리는 신호였다.
“사람이 왔으면 얼굴을 봐야 하는 것이 아니오? 내가 왜 왔는지 궁금하지 않소?”
“왜 왔는지 알고 있으니까, 거기 잠시 앉아 기다리게.”
순욱은 죽간을 들여다 보며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곽가는 이런 순욱의 태도가 싫어 그 동안 왕래를 자주 하지 않았다. 곽가가 감정적이고 활동적이라면, 순욱은 이성적이고 냉정했다. 한참 후, 순욱이 죽간을 내려 놓고는 곽가의 맞은편에 앉았다. 곽가가 말없이 순욱을 노려보자, 순욱은 차를 홀짝 마시고는 무심하게 말을 꺼냈다.
“요즘도 계집질이나 하고 다니는가? 그러다가 일찍 죽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왜 남의 사생활에 이러라 저러라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사람이 왔으면 빨리 일을 처리하고, 무슨 일로 왔느냐? 이렇게 묻는 게 정상 아닙니까?”
“묻긴 뭘 물어. 자네가 내놓은 계책을 내가 뒷수습했으니 골이 나서 왔겠지. 한심하기는 그런 일로 삐지는가?”
“말이 심하십니다.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앞으로 내일에는 참견하지 마시오. 오지랖 넓은 것도 정도껏 하시오.”
“그럼. 일을 제대로 해. 왜 내가 자네가 싸지른 똥을 치워야 하는가? 나도 짜증나. 계집질이나 하고 술 먹을 시간에 생각하고, 공부를 하란 말이야. 나는 일하는 게 좋아서 매일 늦게까지 일하는 줄 알아? 제 놈이 똑바로 못한 걸 가지고 어디서 행패야?”
“지금 말 다하셨소?”
“다 못했어. 다하려면 며칠 걸리니까. 여기서 이럴 시간에 생각 한번 더하고, 병법 한 줄이라도 더 읽어. 이런 시건방진 짓거리 그만두고.”
순욱의 냉랭한 말투에 곽가는 모멸감으로 몸을 떨었다. 순욱이 한말 중 틀린 말은 없었다. 하지만, 조조의 신뢰를 받는 자신에게 이렇게 대놓고 모욕을 주는 이는 순욱 말고는 없었다.
“내가 반드시 네놈을 꺾어 버리고 말겠어.”
곽가는 분통을 터트리며 쌩-하고 밖으로 나갔다. 순욱이 그 뒷모습을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지분간을 못하는 망아지 같은 놈! 이제 망아지 꼬리에 불을 붙여 놓았으니, 펄펄 뛰겠군. 이거야 원 다 큰놈을 격동시켜 일을 하게끔 만들어야 하니 답답하군. 봉효야- 천부적인 재능을 썩히지 말고, 노력해서 주군의 동량이 되거라! 이게 마지막 기회다”
순욱은 혀를 한번 차고는 다시 죽간에 파묻혔다.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