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제 77장. 장군멍군
가후, 이유, 순유가 모였지만,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 천자의 사신이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이미 힘은 원가로 쏠렸다는 것을 여기에 모인 사람은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대의명분이라는 것이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인지라 혹시라도 원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고심 때문에 말이 없었다.
이유가 굳은 얼굴로 가후와 순유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소. 그전에 우장군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황제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소. 그때 우장군께서 솔직한 속내를 말씀하셨소. 여건이 된다면, 황제에 오르고 싶다고 말이오.”
가후와 순유는 처음 듣는 이유의 말에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원술도 황제를 칭했고, 힘깨나 있는 제후들이 황제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모시는 원매가 그런 뜻이 있다는 말을 듣자 아무래도 충격이 컸던 것이다.
“어떻소? 우장군의 이런 뜻을 알고도 계속 충성을 할 수 있겠소?”
이유가 날카로운 눈으로 가후와 순유를 바라보았다. 가후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저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으니, 수명이 다한 한漢도 이제는 끝을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누군가가 황제에 오르신다면 우장군이 오르시는 게 낫지요.”
“순치중은 어찌 생각하시오?”
순유는 눈을 질끈 감고, 휴-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말이 없던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놀랍습니다. 솔직히 저도 우장군의 행동을 보며 막연하게나마 한漢에 대한 충성심은 거의 없구나 생각했습니다. 난세이니 어쩌면 이게 맞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마음을 바꾸지는 않겠습니다.”
“고맙소. 그렇다면 내가 생각한 것을 이야기 하겠소. 이번에 사신이 온다면 황제의 명을 받아들입시다. 솔직히 저들이 뭐라 하든 우리는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호칭을 주군으로 통일합시다.”
“호칭은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명을 받게 되면 여기 순치중이 주군보다 지위가 높아지게 됩니다. 그건 문제가 됩니다.”
“괜히 거부하고 그러면 또 사신이 올 테고, 골치 아파집니다. 받아들이고, 대신 시중 대승과 상서 풍석이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있으니 이것을 띄워봅시다. 순치중께서 사신을 따라서 허창에 가서 우장군을 제수해 주신 것에 감사를 표하시고, 조조의 만행을 아뢰어 공론화시켜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하지만, 제 지위가 주군보다 높다는 것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군요.”
“순치중께서는 주군을 모시는 치중일 뿐입니다. 황제를 모시는 우장군이 아니고요. 다시 말해서 이제는 이곳의 조직이 한漢과는 독립적인 조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 명심하십시오. 당분간은 저들의 손에 놀아나 주면 됩니다. 몇 년 안가 조조도 끝장날 것입니다. 대장군과 주군께서 연합공격을 한다면 조조가 어찌 버티겠습니까?”
“그럼 대장군께서 보내는 서신은 이별가께서 보내주십시오. 대장군께서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주군을 뵙고 잘 설득하겠소. 그리고 대장군께도 서신을 보내겠소. 그러니, 가별가는 주변제후들의 정황을 꼼꼼히 살피시고, 순치중은 당분간 조조와 천자를 상대하는 일에 진력해주시오.”
가후와 순유는 이유의 말에 동의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유는 굳은 얼굴을 펴고, 미소를 지으며 원매에게로 향했다. 원매는 이유로부터 상황을 전해 듣고는 곧바로 승낙했다. 굳이 이런 부분까지 자신이 나서고 싶지 않았고, 책사들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이틀 후. 천자가 보낸 사신인 오자란이 완성으로 들어섰다. 오자란의 안색은 어두웠다. 병사들은 공손히 예를 취하며, 오자란을 원매에게 안내했다.
원매를 비롯한 신하들은 황제를 대하는 예를 취하고는 조서를 받았다.
오자란은 이들이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자 내심 깜짝 놀랐다. 큰 논란 없이 지나갔고, 오자란은 원매에게 여러가지 대접을 받은 후 허창으로 돌아갔다. 이때, 순유가 대동했다.
오자란과 순유가 허창성으로 들어서자, 정욱이 이를 듣고서는 급히 달려 나와 앞을 막아 섰다. 그는 오자란에게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원매가 너무 쉽게 황제의 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만약에 거부를 하면 2차, 3차로 이것저것 계획을 세워놓았는데, 이리 되고 보니 너무 허무했다.
이때 오자란 뒤에 있는 순유와 딱 눈이 마주쳤다. 순유가 빙그레 미소를 짓자, 정욱은 순간 싸한 느낌이 들어 당혹스러웠다.
“저는 폐하께 보고를 드려야 하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저자는 누구입니까?”
“이번에 우장군을 제수 받으신 순공(순유)입니다. 폐하께 감사인사를 드리러 가는 길입니다. 앞으로는 말씀을 함부로 하시면 안됩니다.”
오자란이 정욱에게 일침을 주고는 곧바로 순유와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정욱은 일이 묘하게 틀어지자 순욱을 불러서 조조에게로 향했다. 조조는 정욱으로부터 상황을 전해 듣고는 안색을 굳혔다.
“순공달(순유)은 지략이 뛰어난 자입니다. 골치 아프게 됐군요. 답례를 가는 순공달을 막아 설 명분이 없습니다.”
조조도 뜨끔한지 입을 다물었다. 순유를 막아서면 그 순간 원매의 정치적인 공세가 시작될 것은 자명했다. 또한, 순유가 잘못되면 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조와 순욱, 정욱이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 있을 때, 순유는 황제를 알현하고 있었다.
“폐하- 신 순유입니다. 우장군을 내려주신 하해와 같은 은혜 평생을 두고 충성으로 갚겠습니다.”
헌제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었기에, 순유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공이 워낙 뛰어나서 그리 한 것이니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시오.”
“황공합니다. 폐하 그런데 소신이 듣기로는 장안에서 이곳으로 오셨을 때 시중 대승과 상서 풍석을 데리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보이지를 않는군요. 어디 보내셨습니까?”
헌제는 대승과 풍석 이야기가 나오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조가 말을 듣지 않는 그들을 데려다가 죽인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사람이 아니오.”
“소신에 3년전에 보았을 때, 아주 건강했습니다. 혹시 이각의 무리에게 해코지를 당한 것입니까?”
헌제는 대답이 없었다. 이각의 눈치를 보다가 이제는 조조의 눈치를 보는 허수아비신세가 되고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기 힘든 처지였다. 오자란이 헌제의 불편한 심경을 눈치채고는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아니 그 당시 조거기(거기장군 조조)는 겨우 연주목이었습니다. 어찌 시중, 상서를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당장 조거기를 데려다가 죄를 물으십시오.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아니······ 뭐 그렇게 까지······”
헌제는 조조가 두려워서 말을 잇지 못하고 순유의 눈길을 피했다. 순유는 일부러 모른척하며 계속해서 조조를 탄핵할 것을 주장했다. 워낙 크게 떠들었던 지라 주변에 있던 조조의 세작들이 날랜 걸음으로 조조에게 모든 것을 일러 바쳤다.
세작들의 보고를 받은 조조의 눈은 침중하게 가라 앉았다. 세작들을 물리고는 순욱에게 의견을 구했다.
“어떻게 생각해? 순유가 보통이 아니야. 오히려 역공을 가하고 있잖아.”
“이것 참. 이제야 원매의 의도를 알겠습니다. 폐하의 명을 거부하면 귀찮아지니까 신속하게 받아들이고, 대신 주군의 탄핵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군요. 이거 무승부가 되었습니다.”
“아니. 이 사람아- 그리 속 편하게 말하는 건가? 아무리 황제가 힘이 없다지만, 원매가 이걸 가지고 트집을 잡으면 귀찮아진다고.”
“괜찮습니다. 그냥 무시하면 됩니다. 당분간 저들도 큰 병력을 일으키는 것은 힘듭니다.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유표를 물리쳤습니다. 이제는 수습을 해야 할 때지 공격 할 때가 아닙니다. 그냥 순유를 보내시고 무시하십시오. 어차피 이번 계책으로 원매를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운이 좋으면 원소가 원매에게 질책을 내리는 정도였고, 잠시 원매를 궁지로 몰아 주군의 울분을 풀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이 정도면 됐습니다.”
조조는 순욱의 말에 수긍을 하고는 입을 닫았다. 곽가나 정욱에게는 편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했지만, 순욱에게는 조심스러운 조조였다.
“그래. 맞아. 솔직히 속에 쌓인 울분도 조금 풀렸어.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찌하면 좋겠어?”
“지금부터 힘을 바짝 모아야 합니다. 여남의 원술은 내버려두고 힘을 키우십시오. 정보에 의하면 공손찬은 얼마 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공손찬이 무너지면 원소가 대군을 이끌고 무조건 내려올 것입니다.”
“그럼 원매가 옆에서 치고 들어오겠구먼. 원소가 내려오는 것을 막는 것도 빡빡한데, 원매의 공격도 막아라. 거참. 첩첩산중이야.”
“그리 나쁘게 보실 것은 없습니다. 지금 원소의 성정으로 본다면 원매를 주군께 투입하지 않고, 유표에게 투입시킬 확률이 높습니다.”
“그럴 리가요? 그게 말이 됩니까? 왜 압도적으로 유리한데, 군사를 분리한단 말입니까?”
정욱이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질문하자, 순욱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원소는 몸이 좋지 않습니다. 야망은 크고 욕심은 많지만, 몸이 따라주지를 않습니다. 그럼 어쩌겠습니까? 한곳에 모든 전력을 쏟아 붓는다면, 다른 곳을 점령할 때 또 시간을 걸리겠지요. 준비하고 공격해야 하니까요. 아마도 원소는 그 시간을 절약하려고 할 것입니다. 원소가 기주/청주/유주/병주의 군대를 이끌고 내려온다면 주군의 두 배는 족히 될 테니까요. 잘못된 계산은 아니지요.”
“빌어먹을. 듣고 나니 더 울분이 터지는구먼. 원소가 한 수 접어준다고 나오는데, 그래도 전력이 두 배나 많다 이거지. 허참.”
“그러니 순유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마시고, 전력증강에 온 힘을 쏟으십시오. 당분간 원매도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유비가 어찌 나올지는 모르겠는데, 주군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리고 강동의 손책과 동맹을 맺어 후방을 든든하게 해놓아야 합니다.”
“원매를 한번이라도 곤궁에 빠뜨릴려고 했더니, 나참. 그것도 쉽지 않구먼. 손책과의 동맹은 순문약(순욱)이 직접 처리해.”
“알겠습니다. 제가 순공달(순유)을 만나 그쪽도 이야기를 해놓겠습니다. 며칠 푹 쉬십시오. 계속 신경 쓰면 머리만 아픕니다.”
순욱은 조조를 편히 쉬게 하고는 정욱을 데리고 치소를 나왔다. 정욱은 순욱을 따라 나오며 ‘역시 순욱이다.’ 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순유는 시중 대승과 상서 풍석의 죽음을 공론화 시키려고 여기저기 찔러봤지만, 조조측에서 아예 무대응으로 일관하면서 시들해졌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는 나는데,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열심히 떠들어 댄 꼴이었다.
순유는 돌아오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조조의 무례함을 따졌고, 그것은 분명히 조조의 귀에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니 이제는 이 일로 더는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곽가의 계책은 조조의 울분을 어느 정도 가라앉히는 선에서 끝이 났다. 애초부터 조조나 곽가 모두 이것으로 원가를 흔들면 좋고, 안되면 그만인 작전이었기에 여기서 끝이났지만, 미련을 두지는 않았다.
이제는 독하게 군비를 증강하고, 군대를 정비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