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제 70장 협상協商
가후는 번성에서 형주수군의 도움을 받아 면수를 건넜다. 그들은 가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유수의 안위가 걱정되었는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못했다. 그는 포구에 내려 수많은 배와 수군들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감탄했다.
‘과연 남방지역은 북방과는 다르구나. 우장군께서 남양군을 점령하고,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이유가 있었어.’
가후는 양양성으로 들어서자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천험의 요지였다. 양양성은 높은 산을 배후로 삼고, 정면과 측면은 면수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 정도면 난공불락의 성이다. 수군이 강력하지 않으면 공격할 엄두도 내기 어려운 성이다. 유표가 생각 밖으로 만만치가 않구나.’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다 보니, 어느새 종사관이 그를 맞이하여 치소로 안내했다. 그곳에 있던 수십 개의 눈이 가후에게로 쏠렸다. 죽일듯한 눈빛을 보며 가후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우장군의 명을 받아 유목사를 뵈러 온 가후라고 합니다.”
가후가 정중하게 예를 올리자, 유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먼저 우장군의 요구사항을 말해보시게.”
“우장군께서는 둘째 공자를 돌려보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조건은?”
“그런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다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을 거라고만 하셨습니다.”
남양군 뺏긴 것도 억울했고, 유수 때문에 이런 협상을 해야 하는 것도 화가 났다. 그런데 가후가 이리 나오니 유표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괴월이 유표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채고는 재빨리 물었다.
“빨리 조건을 말하시오. 지금 뭐 하는 수작입니까?”
“평화를 원합니다.”
“평화? 지금 우장군이 제멋대로 남양군을 점령했고, 우리 형주군이 많이 죽었어. 그런데 평화라는 말이 쉽게 나오는가?”
“평화를 원합니다. 우장군께서는 더는 면수를 건너 남쪽으로 군대를 돌리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유목사께서도 남쪽의 골칫덩어리를 처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게 상당히 시급할 텐데요?”
장사군에서 할거하는 눈에 가시 같은 장선의 존재를 언급하자, 유표의 얼굴에 그늘이 드려졌다. 가후는 통했다고 생각하자 계속 말을 이어갔다.
“장수 대신 우장군께서 남양군에 주둔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조조가 공격하면 유목사께서도 마음 졸이며 지켜보시고, 필요하면 병력도 지원했지 않습니까? 이제는 그런 걱정 놓으셔도 됩니다. 감히 조조가 원가를 어찌 공격하겠습니까? 오히려 단단한 방어막이 생긴 것이니 환영할 일입니다.”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치고 들어오자 유표가 말을 못했고, 괴월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우장군이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보장한단 말이오?”
“면수를 건너려면 수군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당장 수군도 없을뿐더러, 앞으로도 만들지도 않겠습니다. 괴별가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수군을 육성하려면 배도 필요하지만, 오랫동안 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니 우장군이 마음이 바뀌어 수군을 만든다 하더라도 대처할 시간이 있습니다.”
“공격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구먼.”
“안 하는 것이지요. 지금이라도 강하군을 칠 수 있습니다. 만약 우장군께서 강하군을 공격하면 막을 수 있습니까? 조양현에서 칠만 오천의 대군을 격파했습니다. 항병만 사만입니다.”
유표는 아무래도 가후에게 말려드는 느낌이 들자, 괴월에게 협상을 하라고 명령하고는 자리를 떴다. 괴월은 가후를 밀실로 이끌고는 곧바로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의견을 주셔서 고맙소.”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괴월과 가후는 한시진(두 시간)넘게 밀고 당기는 협상을 하여 결국 최종안을 도출했다. 채모의 대패로 인해 형주군에 치명적인 공백이 생겼고, 장사군의 장선의 존재 또한 무시 못했기에 수월하게 협상은 마무리 되었다.
괴월은 가후에게 잠시 쉬도록 한 후, 곧바로 유표를 찾았다. 보고를 들은 유표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생각은 어때? 이게 최선인가?”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될 것입니다. 사실 원매가 남양군에서 조조의 공격을 확실히 막아준다면 큰 손해는 아닙니다. 그리고 일만의 군사를 돌려준다고 했으니, 어느 정도 병력의 공백도 메울 수 있습니다. 이공자(유수)도 양양성으로 모셔올 수 있고요.”
“장수에게는 빌려준 형식이었지만, 이번에는 아예 넘기는 조건이야. 그리고, 곽독, 곽준, 왕위, 문빙의 가족들까지 모두 보내주어야 하는 게 마음에 걸려.”
“크게 보십시오. 어차피 힘을 키우려면 몇 년을 고생해야 합니다. 장사군의 장선도 처리해야 하고요. 그러니 원매와 적대적인 관계를 가질수록 손해입니다. 이쯤에서 못이기는 척하고 받아들이시지요.”
“원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크게 무리한 조건도 아니고, 병력을 돌려주는 것도 그렇고. 좀 이해가 안가는 면이 있단 말이지.”
“중원 쪽에 관심이 있는 듯합니다. 하북의 원소가 공손찬을 토벌하고 힘을 키우면 남진하지 않겠습니까? 그때에 발맞추어 원매도 움직이려는 것 같습니다. 그리 되면 중원의 누가 있어 원가에 대항하겠습니까?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럼, 그 다음에 형주를 노리겠군.”
“아마도 그리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걸 받아들이시고 힘을 키우셔야 합니다. 시간은 충분합니다.”
유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간에 인장을 찍어서 괴월에게 돌려주었다. 가후는 죽간을 교환하고는 곧바로 완성으로 돌아왔다. 가후가 열흘에 걸쳐 양양에 다녀왔는데, 그사이에 꽤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염포가 도착하여 남양태수로서의 임무를 시작했고, 두기가 종사관들을 이끌고 와서 관중에서 하던 것처럼 농토와 백성 호구 수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유와 순유, 등지도 내려와서 일을 돕고 있었다.
“우장군. 다녀왔습니다.”
가후는 원매에게 예를 올리며 죽간을 바쳤다.
“고생하셨소.”
원매는 죽간을 펼쳐서 죽-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하셨소. 일만의 병사들은 노병위주로 선발해 놓았으니 유수와 함께 보내면 될 것이오. 이제 유표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고, 예주/연주/서주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첩보를 획득하시오. 순치중(순유)이 만든 조직이 있는데, 그것을 이어받으면 훨씬 도움이 될 것이오.”
“알겠습니다.”
가후는 조직을 인계 받으러 순유에게로 향했고, 원매는 늙은 병사 일만을 번성으로 보내서 유수에게 직접 데리고 가도록 했다. 남양군이 대략 마무리 되자, 등지와 함께 부대를 재편했다.
이제는 관중이 아니라 남양군이 중심이었다. 관중이나 한중은 사방이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외부의 적을 막기가 수월했지만, 남양은 평평한 벌판이라 대군을 주둔시켜서 지켜야 했다.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이백만에 가까운 인구와 관중/한중을 합친 것보다 많은 농토, 예주/형주와 연결되는 지리적 요건 등.
부대개편안.
-한중군: 파재/이서-보병 일만 이천.
-삼보: 장위/양앙-보병 칠천.
-하동군: 손경/상요/오록/엄정 보병 칠천.
-남양군
신야성: 장수-보병 일만, 기병 삼천
번성: 호거아-보병 삼천.
완성:
예비-1. 전예/위연/강합/노욱. 보병 삼만.
예비-2. 이통/감녕/이휴/양정. 보병 이만 오천.
예비-3. 문빙/곽독/왕위. 보병 이만.
서량기병. 방덕/송과 기병 오천.
유주기병. 조독/문칙/장의 기병 사천.
엽현: 곽준. 보병 오천(조조/원술 경계)
전투가 끝이 났기에 마초/마대와 기병 오천오백은 다시 서량으로 돌려보냈다. 원매는 마초와 마대의 공을 치하하고, 우부풍에 식읍을 각각 이백호, 백호를 내렸다. 또한 포상금을 듬뿍 주어 그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이번 전투에서 공이 큰 장수들에게 식읍 보다는 황금, 쌀, 비단, 포목등을 내려서 공을 치하했다. 소금과 철을 전매해서 많은 부를 비축해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을 세운대로 포상을 해주었고, 병사들에게 쌀이라도 나누어주자, 두기가 짧은 한숨을 연신 내쉬었다.
“두부조(두기). 왕염부(왕련)와 함께 내가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 두 사람이 없었다면 정말 난감했을 것일세.”
“우장군. 말로만 하시면 안됩니다. 창고가 텅텅 비었습니다. 이걸 다시 채워 놓으려면 적어도 내년까지는 큰 전쟁을 벌이시면 안됩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 해야지 어쩌는가?”
“그럼, 저는 그만두겠습니다. 재화는 한정되어 있는데, 무작정 쓰려고만 하시면 어쩝니까? 지금 남양군에만 병사가 십만입니다. 재물이 땅 파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우장군께서는 너무 모르십니다. 약속해주십시오. 내년 가을까지는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요.”
“알겠네. 피치 못한 상황이 발생해도 일만 이하로 군대를 움직이지. 이제 됐는가?”
“약속을 지켜주십쇼. 그럼, 저는 일하러 물러가겠습니다.”
굳은 표정의 두기와는 반대로 원매의 표정은 평온했다. 원매의 부하들은 대부분 이와 같았다. 자기 주장이 강했고, 업무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렇기에 문제가 생기면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힘들어. 왜 역대 군주들이 아첨하는 소인배를 곁에 두었는지 이해가 돼. 하지만, 힘들어도 참아야지. 다 충성에서 우러나와 저리 하는 것인데.’
원매는 잠시 휴식을 가진 후, 방덕과 조독을 호출했다. 방덕과 조독은 원매의 치소 앞에서 만나자, 서로 불편한 듯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게. 밖에서 뭐 하는가?”
곧바로 문이 열리며, 방덕과 조독은 성큼성큼 들어왔다. 군례를 올리고는 원매가 가리키는 자리에 착석했다.
“편안하게 앉게. 사실 여러 가지 생각을 했어. 조장군(조독). 아직도 많이 섭섭한가?”
“저······. 솔직히 그런 면이 있습니다. 여기 방장군의 능력과 서량기병의 뛰어남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나 문칙, 장의의 통솔력이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 유주기병이 우장군을 처음부터 모셨지 않습니까?”
“그래. 이건 내 실책일세. 내가 조장군 볼 면목이 없군. 그래서 이번에는 기병을 유주, 서량 두 기병부대로 나누었지. 유주는 조장군이, 서량은 방장군이 맡게. 두 부대는 독립부대야. 방장군. 할말 있는가?”
“저는 괜찮습니다. 사실 제가 처음부터 기병을 모두 맡아서 조금 불편했습니다. 지금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 생각해주니 고맙네. 조장군. 어떤가? 이 정도면 만족하는가?”
“감사합니다. 배려에 감사 드립니다.”
조독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원매에게 큰 절을 올렸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빠르게 대처해주는 원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울컥했기 때문이었다. 원매는 그런 조독의 어깨를 두드리며 좋은 말로 위로했다.
종사관을 불러서 술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곤 한잔씩 따라주고 잔을 들었다.
“일을 해야 하니, 딱 한잔만 하세. 자네들은 나의 오른팔이야. 필요한 게 있으면 말을 하게. 이제부터는 불화가 있다면 내가 용납하지 않겠어. 알겠는가?”
“명을 따르겠습니다.”
챙—
호쾌하게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방덕과 조독은 한잔으로는 아쉬운지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원매가 단호하게 내쳤다.
“어서 가서 일들 봐. 조만간 자리를 마련할 것이니, 그때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셔보세.”
방덕과 조독은 들어올 때에 비해 밝아진 얼굴로 군례를 올리고는 밖으로 나섰다.
“갈수록 노련해지시는군요.”
사마구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자, 원매도 싱긋 웃었다.
“내가 원래 노련하지 않느냐? 내 나이에 이정도 위치에 오른 사람은 역사를 따져봐도 드물 것이다. 이 정도면 완벽하지 않느냐?”
“노련해지신 줄 알았더니, 뻔뻔해지셨습니다.”
“응? 그런가? 하하하하하— 그래 뻔뻔해졌지.”
원매는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낭소를 터트렸고, 사마구도 따라 웃었다. 조금 지치고, 어두워진 원매를 보고는 사마구가 의도적으로 농을 건 것이다. 원매와 사마구의 관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