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제 30장 하동군河東郡-가규賈逵
197년 3월. 건안 2년.
날이 풀리자 원매는 하동군 공략을 개시했다. 오록에게 보병 일천을 주어 고도현을 지키게 했다. 오록은 하동군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워야 한다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원매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격려한 후, 곧바로 대군을 출발시켰다. 보병 2만 3천, 기병 2천 4백이었다.
고도현을 출발한 병력은 계곡을 따라 행군하여 이틀 만에 단씨현에 도착했다. 단씨현은 상당군에서 하동군에 들어서는 입구였다.
넓지 않은 평야, 분수의 지류가 흐르는 계곡에 오밀조밀하게 마을을 이루고 있는 이곳이 단씨현이었다. 단씨현령은 원매의 대군을 보자 곧바로 성문을 열어 항복했다.
단씨현령을 그대로 유임하고는 병력을 휘몰아 강읍성으로 진군했다. 단씨현에 군사를 남겨두지 않은 것은 고도현에서 강읍성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라 다른 출구가 없었고, 큰 성이 아니었기에 배신을 하더라도 언제든지 토벌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백파적까지 상대해야 했기에 병력을 최대한 아껴야 했다.
강읍성.
가규는 멀리 상당군 쪽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미 원매가 군사를 조련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에 대비하여 군사들을 훈련시켰지만 어떤 특별한 대책을 마련하기는 힘들었다. 겨우 강읍현령의 신분이었기에 할 수 있는 것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단씨현이 넘어갔다는 소식이 전파되고, 겨우 이틀 만에 원매의 선발대가 나타났다. 원매의 군대는 하루 동안 계속 진군하여 강읍성을 에워쌌다. 견고하기는 하지만 크지 않았던 강읍성. 그 안의 백성들과 병사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혹시라도 동탁, 이각 때처럼 무수한 살인, 약탈, 방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원매는 성을 에워싸자, 곧바로 두기를 사신으로 성안에 들여보냈다. 가규는 선선히 사신 두기를 입성시켰다.
“강읍현령을 뵙습니다. 저는 사례도독 휘하에서 부조를 맡은 두기라고 합니다.”
“그래 무슨 일로 이곳까지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온 것입니까? 원가도 동탁, 이각처럼 영지에 욕심을 내는 것입니까?”
“지금은 난세니까요. 약자는 강자의 보살핌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이지요.”
“보살핌이라······. 그렇다면 항복을 권하러 오셨군. 내가 끝까지 저항하겠다면 어쩌시겠소?”
“전투가 벌어지겠지요. 죄 없는 백성들과 병사들이 죽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인근 현의 모든 장정을 징발할 것이고, 군량이 부족하면 그것도 징발할 것입니다. 필요하면 부녀자까지 모두······.”
두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가규를 바라보았다. 일부러 가규를 자극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가규는 표정이 변화는 없었지만, 눈매가 매서워지며 칼날 같은 호통이 터졌다.
“입조심 해라. 내가 네놈의 목을 벨 수도 있다. 사신이라고 살려줄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것참. 이상하군요. 물어보셨으니 솔직하게 대답을 해드린 것뿐입니다. 도독께서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부녀자까지 화살받이로 동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한 개 현 정도 몰살시켜도 강읍성을 얻는다면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죽일 놈들이구나. 이각이야 못 배웠으니 그런다지만 배울 만큼 배운 네놈들의 입에서 어찌 그런 말이 나오느냐?”
“원래 배운 사람들이 더 독한 법입니다. 어떻게 쥐여 짜는지를 아니까요.”
화를 내려던 가규는 문득 두기의 행동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입으로는 아주 뻔뻔하게 협박을 하고 있었지만, 묘하게도 풍기는 분위기가 정반대였다.
‘이자는 도대체 어떤 작자인가? 난세니 이런 괴팍한 자들이 등장하는 것인가?’
두기는 가규의 눈치를 보고는 죽간을 꺼내 들었다. 종사관을 통해서 죽간을 받아든 가규는 매섭게 두기를 한번 노려보고는 단번에 죽 읽어내려갔다. 가규는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두기를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아까는 부녀자까지 화살받이로 쓰겠다더니, 이제는 나를 귀히 쓰겠다? 항복만 하면 살인, 약탈은 절대 없을 것이니 안심해라? 도대체 무엇이 진심인가?”
“당연히 죽간의 내용이 진실입니다. 죽간은 도독께서 직접 작성하신 것입니다. 가성주(가규)가 애민의식이 투철한 관리라는 것을 듣고, 그것을 시험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두기가 고개를 숙이자, 잠시 생각을 통해 혼란스러움을 정리한 가규가 입장을 결정했다.
“증거를 보여줄 수 있겠소? 백성들 살인, 약탈하지 않는다는 증거 말이오?”
“가슴을 열어 속을 보여드릴 수도 없고,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곳의 백성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사례도독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은 어떻소? 자신의 병사들과 백성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한다면 나중에 번복하지 않겠지요. 원가의 자제시니까요.”
가규는 친필이 적힌 죽간보다는 모든 백성에게 공표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해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이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두기는 싱긋 웃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그 정도라 어렵지 않습니다.”
“쉽게 장담하지 말고, 도독을 잘 설득할 준비나 하시오. 체통을 중히 여기는 원가가 이런 것을 쉽게 허락하리라 여기시오?”
“글쎄요. 체통이라? 네. 분명히 체통을 중히 여기긴 합니다. 다만 벗어던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체통 따위는 언제든지 시궁창 속에 쳐넣을 수 있지요.”
두기는 아는 대로 소상하게 원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사마구, 파재, 손경 등 도적들조차도 벼슬을 주며 달래서 장군으로 쓰고 있다는 말에 가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는 탁자를 ‘탕-’하고 치며 벌떡 일어섰다.
“지금 나랑 농을 하자는 것이오? 원가라면 출사를 하려는 자가 줄을 선다고 들었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저도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알아보니 도독의 행동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대호족은 그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대호족의 자제를 쓰기가 싫은 것입니다. 지금 도독의 사람들은 대부분 중소호족이거나 평민, 천민들입니다.”
가규는 곰곰이 두기의 말을 되새기다가 눈을 부릅떴다. 그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제 보니 도독께서는 세상을 뒤엎을 생각이시구려.”
“썩어빠진 세상을 새로운 세상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제 도독에 대한 믿음이 생기십니까?”
가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내가 말한 대로 해주시오. 그리 한다면 성문을 열겠소. 내게는 백성들의 안위가 제일 중요합니다.”
두기는 예를 표하고 곧바로 성을 나왔다. 원매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기에게 다가갔다.
“어찌 되었소?”
두기가 빙그레 웃으며 가규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원매는 낭랑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드디어 강읍성을 획득하고, 가규를 얻는구나. 내 그리하지. 뭐 대단한 것도 아니구먼.”
원매는 즉시 앞으로 나왔다. 병사들을 조용히 앉아 기다리도록 명령을 내렸다. 조용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성 위에도 가규를 비롯한 수많은 백성이 빼꼼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하동태수 겸 사례도독 원매다. 백성들의 고혈을 빠는 도적들을 모두 소탕할 것이며,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이다. 약속한다! 백성들을 죽이거나, 약탈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내 부하들이 그런 일을 저지른다면 반드시 엄하게 처벌할 것이다! 이 원매의 이름으로 약속한다!”
원매가 뱃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함성을 토해내자, 그의 목소리는 멀리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성안에서 백성들과 병사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가규가 성문을 열고 나왔다. 그가 달려 나와 원매 앞에 무릎을 꿇으려고 하자, 원매는 급히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이러지 않아도 되오. 나는 그대를 진작부터 알았고, 반드시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소. 이제부터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를 해주시오.”
“명을 따르겠습니다.”
가규가 머리를 조아리자, 원매는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형법과 법률을 담당하는 율령사를 제수했다.
[가규(25)]
무력:61, 지력:82, 정치력:83, 통솔력:73
조조가 매우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모든 면에서 만능에 가까운 활약을 보였고, 예주자사까지 진급했다. 대단한 인물인데, 아들인 가충과 손녀인 가남풍의 명성이 워낙 대단하여 그의 공이 묻혔다.
원매는 곧바로 강읍성으로 들어가 백성들을 위로하고는 이곳에 곽조와 병력 3천 5백을 배치했다. 이곳의 병사들은 대부분 농민을 급히 징발한 상황이었기에 다시 돌려보냈다. 가규는 원매의 이런 호방한 조치를 보고는 깊이 깨닫는 바가 있어 진언을 올렸다.
“도독.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말해보게.”
“지금 하동군 태수 왕읍은 안읍성에 있습니다. 그도 애민의식이 있는 유자이니, 제가 가서 설득하겠습니다.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다치지 않으니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내가 원하던 바요. 하지만 그곳에는 위고, 범선이라는 악질관리가 있다고 들었소. 나는 그런 자들까지 용서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흠-’ 가규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진중하게 대답했다.
“그들이 악질관리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왕태수가 항복하자마자, 그들을 치신다면 왕태수를 비롯한 다른 관리들과 백성들이 불안해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지요. 일단 모두 품으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현령으로 발령 내신 다음, 죄를 짓는다면 그때 처벌하면 됩니다. 평소에 그리 살았으니 분명히 죄를 지을 것입니다.”
“괜찮은 생각이오.”
원매가 수긍하자, 가규가 계속해서 진언을 올렸다.
“왕태수는 인덕이 높은 관리입니다. 이번에 폐하께도 공물을 바쳤고, 동탁과 이각에게 공물을 바치는 와중에도 백성들에게 최소한도로 피해가 가도록 노력한 인물입니다. 치세에 매우 뛰어나다고는 볼 수 없지만, 덕으로 다스릴 수 있는 인물입니다. 가능하면 그에게 계속 태수를 맡기는 것은 어떻습니까?”
원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 될 것 없소. 그리하지.”
원매는 즉시 고개를 돌려 명령을 내렸다.
“전예! 문칙!”
“예. 도독!”
“보병 3천 5백, 기병 4백을 이끌고 가규를 따라가서 안읍성을 접수하고, 주변의 도적들을 소탕하게. 그 정도 병력이면 충분하겠지?”
“물론입니다. 즉시 병력을 점고하여 출병하겠습니다.”
전예와 문칙이 복명하여 물러서자, 원매의 입에서 또 다른 명령이 내려졌다.
“두기! 왕련! 등지! 자네들도 가규와 함께 움직여. 안읍성에 입성하는 대로, 상황을 잘 파악해 놓게. 나는 이곳에서 북쪽의 백파적을 물리치고 안읍성으로 가도록 하지. 두기 자네가 선임이니 나를 대신하여 일을 잘 처리하게.”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원매의 명령에 문칙이 기병을 점고하여 문관 네 명을 대동하여 먼저 출발했고, 전예는 보병을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던 원매에게 순유가 다가와 진언을 올렸다.
“도독. 바로 군사회의를 주관하시지요. 이미 첩보를 파악해 놓았기 때문에 바로 전투를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좋소. 당장 장수들을 소집해 주시오!”
원매의 명령에 남아 있는 장수들이 지휘소로 몰려들었다. 이제 원매는 강읍성을 점령하고, 백파적을 격파하여 하동군을 완전하게 장악할 것이다. 하동군은 원매가 야망의 날개를 펴는데, 거대한 발판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