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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웅 삼국지 - 원소 셋째 아들 천하를 품다-19화 (19/253)

# 19

제 19장 손경孫輕

파재는 거만하게 앉아 있는 손경에게 군례를 올린 후, 당당하게 마주 보았다. 손경이 상좌에 앉아 있었고, 오록과 여러 장수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게 선물을 가져오셨다고?”

“그렇소이다. 이번에 쌀 30섬을 가져왔으니, 기쁘게 받아 주셨으면 하오이다.”

파재의 대답에 손경이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았다.

“우리와 같은 유협이셨다가 지금은 원가의 개가 되셨는가? 그래 겨우 쌀 30섬을 주고 이 손경이를 안심시킨 후 목이라도 베려고 그러는가?”

어느새 손경의 목소리가 칼날같이 날이 서 있었다. 오록은 대화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손경 앞에 앉아 있던 왕당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파재를 향해 소리쳤다.

“네놈은 감히 대두령(장연)에게 맞서던 파재가 아니더냐? 원가의 개가 되었으면 거기서 꼬리를 치며 살 것이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기어들어 왔단 말이냐?”

왕당은 장연의 심복이었다. 손경이 장연의 직속 부하가 아니라 장연을 따르는 독립적인 조직의 대장이었는데, 왕당은 장연이 심어 놓은 것이다. 혹시라도 분위기가 장연을 배신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왕당이 강하게 선수를 치고 나온 것이다.

“나를 보고 개라고 욕해도 상관없소. 내 부하들은 예전처럼 배를 곪지 않고 있고, 사람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소. 생각해보시오. 누가 나 같은 산적에게 교위를 내려준단 말이오? 엄정에게도 사마가 내려졌소. 나는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기에 알려주려고 온 것뿐이오.”

파재의 차분한 대응에 왕당은 더욱 길길이 날뛰었다.

“거짓말하지 마라. 원가가 어떤 놈들인데, 도적 출신인 네놈에게 교위를 준단 말이냐? 이런 거짓말로 여기 손두령을 설득시켜놓고 나중에 어찌하려고 하는 것이냐?”

“내가 교위를 받은 것은 맞소. 원가는 그대의 말처럼 고리타분한 집단이오. 절대 내게 교위를 줄 사람들이 아니오. 다만 사례도독이신 원매공자께서는 다르오. 능력만 된다면 충분히 교위를 주고, 필요하면 더 높은 직위도 주실 분이오.”

왕당이 다시 발작하려고 하자, 손경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파재의 말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매공자는 그전에 다시없는 한량이었다가 요즘 들어 변했다고 하더니 진심인가 보구려?”

손경의 말은 어느새 아주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렇소이다. 말을 빼앗으려고 한 사마구라는 자도 도적 출신이었지만 용맹이 쓸 만하였기에 아장으로 삼았소이다. 신분과 관계없이 오로지 능력에 따라 사람을 부리고 있소. 저도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지만, 직접 경험을 해보고는 매우 놀라고 있소이다.”

손경은 파재의 말이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가능할까? 손경은 머리가 아픈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파재를 다시 쳐다보았다. 확신이 가득 찬 그의 눈을 보며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처음에 손두령께서 세상의 부당한 처사에 대항하여 분연히 궐기하시지 않았소이까? 그때 만약 손두령의 능력을 알아보고 인정해주는 자가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분명히 지금과는 상황이 다르지 않겠소이까?”

“믿지 마십시오. 지금 파재는 겨우 쌀 30섬과 아첨하는 말로 손두령을 속이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신분이 낮은데 벼슬을 준단 말입니까? 당장 저놈을 죽여 버리십시오.”

왕당이 중간에 끼어들었지만, 손경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왕당은 이를 바드득 갈며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설마 대두령(장연)을 배신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맹주께서는 무려 백만의 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어서 파재의 목을 베어 충성을 표하십시오.”

“왕소두령은 말을 삼가시오. 손두령께서 맹주를 따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는 엄연히 독자적인 세력범위요. 그대는 지금 손두령을 겁박하고 있소. 사과하시오!”

오록이 왕당의 말을 강하게 받아쳤다. 부하들의 내분 조짐까지 보이자, 손경이 벌떡 일어서서 양쪽을 호통쳐서 말싸움이 더 커지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는 지그시 파재를 노려보았다.

“오록! 저놈은 간자가 틀림없다. 당장 옥에 가두어라!”

손경의 명령에 오록은 당혹했지만, 충실히 따랐다. 그가 파재를 끌고 나가자, 왕당의 굳었던 얼굴이 풀어졌다.

“죽여 버리셔야 합니다.”

“아- 그것은 내가 심문을 좀 더 해보고 결정할 것이니, 왕소두령께서는 이제는 끼어들지 마시오. 나도 대두령을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손경이 자리를 일어섰다. 왕당은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지만, 이제는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더 참견한다면 손경이 화를 낼지도 몰랐다. 그는 지금처럼 부드러워 보일지 몰라도 화가 나면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왕당도 조심히 관망하고 있는 것이다.

오록은 옥에 파재를 가둔 후, 그의 부하들도 모두 나누어서 옥에 가둬버렸다.

“손두령께서 생각이 있어서 그리하신 것이니 불편하더라도 잠시만 참으시오.”

“오소두령 고맙소. 나는 손두령을 믿소이다. 분명히 옳은 결단을 하실 것이란 것을 말이오.”

오록은 고개를 끄덕인 후, 옥리에게 파재를 잘 감시할 것을 명령했다. 혹여 왕당이 무슨 짓을 저지르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손경은 오록을 비밀리에 불러 독대를 하고 있었다.

“오록아. 너는 파재의 말을 어찌 생각하느냐?”

“진실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와 함께 대화하면서 올라왔는데, 이야기가 일관되고 얼굴이 편안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파재는 나도 알아. 한때는 아주 굉장했던 사람이지. 그런 자가 원매의 전령으로 여기에 왔어.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이곳에 말이야. 거짓말은 아닐 것이야.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오록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손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손경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너나 나나 천민 출신이야. 천민이 교위에 오른다? 들어 본 적도 없는 일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냔 말이다?”

오록도 손경의 지적에 대답을 못 했다. 그 이상을 답변할 만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록이 말이 없자, 손경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솔직히 파재의 말이 맘에 든다. 맨날 이렇게 쫓겨 다니느니 정식으로 녹봉을 받으면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출세하는 것이니까. 문제는 왕당이야. 그가 가만히 있겠느냐? 대두령이 적어도 3~4만의 병사들을 가지고 있고, 나는 7~8천 정도야.”

“파재의 말을 따르면 원매공자가 돕지 않겠습니까? 그의 휘하에는 맹장 고람이 있습니다. 고람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잘 알지. 그 지긋지긋한 이름을 어찌 잊겠느냐? 어쩐다······. 내가 좀 더 고민해볼 터이니, 너는 왕당을 잘 감시하거라. 아직 결정도 안 했는데, 대두령이 오해를 한다면 정녕 큰일 아니냐?”

손경은 오록을 물리고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파재의 제안이 그만큼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천민 출신으로 매일 업신여김을 받았다. 장연이 조정에서 평난중랑장을 제수했고, 덕분에 손경도 장연으로부터 벼슬을 받았지만 말뿐이었다. 봉록도 없었고, 산속에서 살다가 부족하면 약탈해서 살아야 하는 처지였다. 이렇게 사는 것이 운명이려니 하는 찰나에 파재가 나타나 손경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나도 큰 마을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고 싶다. 교위라면 2천을 지휘하는 장수이니, 녹봉도 상당할 터이고 나름 살만할 것인데.’

손경이 오록과 독대를 하고 있을 때, 왕당은 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옥의 경비가 매우 삼엄한 것을 보고는 의아함이 들었다.

‘이것은 파재를 감금한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것 같구나.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대두령에게 보고를 해야겠구나.’

왕당은 급히 처소로 달려가 죽간을 작성하여 장연의 치소가 있는 양두산으로 전령을 보냈다. 양두산은 상당군과 태원군 사이에 있었고, 산이 크고 계곡이 깊었다. 발구산에서 양두산까지는 길이 험하기는 했지만 3일이면 충분했다.

왕당이 장연에게 전령을 보낸 사실은 그다음 날 바로 손경의 귀에 들어갔다. 손경은 즉각 왕당을 호출했다.

“대두령께 전령을 보내셨는가? 지금까지는 항상 나와 상의를 하고 보냈는데, 어찌 홀로 결정하여 보냈는가?”

“지금까지 저를 감시하고 있었습니까?”

“감시가 아니라 전령이 나갔는데 어찌 내가 모르겠는가? 말 돌리지 말고 어서 말해보게. 왜 독단적으로 대두령께 전령을 보냈는가?”

“별일 아닙니다. 손두령께서 대두령께 충성을 계속하신다면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충성의 징표로 파재를 참하십시오. 그렇다면 대두령께서도 안심하실 것입니다.”

일이 커졌다. 장연이 군대라도 보내면 큰일이다. 손경은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오르자, 앞뒤 가리지 않고 그대로 왕당에게 달려들었다. 왕당이 급히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손경의 왼손이 그의 멱살을 잡은 후였다.

빡-

그대로 손경의 오른 주먹이 왕당의 얼굴에 꽂혔다. 얼마나 힘이 셌던지 한방에 왕당이 기절하며 축 늘어졌다. 오록이 밖에서 듣다가 상황이 심각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곧바로 달려와서 손경을 막았다.

“어쩌시려고 이랬습니까? 왕당 이놈이 죽일 놈이기는 하지만 저놈 뒤에는 장연이 버티고 있습니다.”

손경은 얼굴이 붉어져 있었고,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저 죽일 놈이 내 허락도 없이 대두령에게 전령을 보냈단 말이다. 만약 대두령이 전후 사정 가리지 않고 군대를 끌고 내려온다면 어쩌란 말이냐? 필시 내 말을 듣지 않고 이곳마저 뺏으려고 할 것이다.”

손경은 잘못하면 이곳마저 장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분통이 터지는지 널브러져 있는 왕당을 발로 또 한 번 찼다.

“이 개자식이 모든 것을 망치는구나. 어쩌란 말인가?”

“차라리 파재의 도움을 받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제는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제안을 받아들이더라도 협상을 하면서 최대한 얻어내려고 했는데, 저 왕당 개자식 때문에 다 날아가는구나. 이제는 상갓집 개처럼 꼬리를 내려야 하지를 않느냐? 이게 분통이 터지는 것이다.”

손경은 욱하고 분노가 치밀자 오록을 뿌리치고는 쓰러져있는 왕당을 발로 찼다. 오록이 급하게 말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왕당은 손경에게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손경을 앉히고는 오록이 원매를 따를 것을 설득했지만, 손경은 좀처럼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잠시 분노를 가라앉힌 그는 탄식을 터트렸다.

“제기랄, 저 멍청한 왕당 때문에 꼬리를 내려야 한다니. 어쩔 수 없지. 어서 파재를 데려오너라.”

오록이 급히 달려나가자, 손경은 부하들을 시켜서 왕당을 연금시키고는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곰처럼 무식해 보일지 몰라도 나름대로 머리가 돌아가는 손경이었다. 그는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머리가 쥐가 나도록 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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