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제 15장 등지鄧芝
원매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며 이곳으로 말을 타고 오는 일단의 무리가 눈에 띄었다. 원매는 한눈에 그들이 기병이 아님을 알았다.
‘설마 내가 원하는 인재인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내년이면 시작해야하는데, 문관쪽 인재가 없어. 물론 그때가 되면 아버님께서 몇 명 붙여주겠지만 진정 내 사람이 될지는 의문일 것이다.’
원매는 벌떡 일어서서 그들을 주시했다. 말을 타는 게 그리 능숙하지 않은지 속도는 조금 더뎠다. 곧 위병의 확인을 받은 그들이 천천히 자신에게로 향했고, 기병 한명이 먼저 원매에게 말을 몰고 달려와 고했다.
“공자님. 봉호군께서 보내신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고생했다. 돌아가라.”
원매의 손짓에 기병은 군례를 올리고는 물러섰다. 원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문사를 주시했다. 꽤 젊어 보이는 문사였다.
‘서서일까?’
한명이었기에 서서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후덕한 인상의 소유자였으며, 어느 정도 무예를 수련한 듯하지만, 큰 고수가 아니란 것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현옹공자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등지, 자는 백묘라고 합니다.”
[등지(25)]
무력:51, 지력:79, 정치력:83, 통솔력:72
※ 신야현 출신으로 유비의 눈에 띄어 외교가로서 활동했고, 군사지휘능력도 뛰어나서 거기장군까지 올랐다. 촉에서 유비에게 중용된 것을 볼 때, 형주에서 출세가 힘들자 촉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이며, 매우 늦은 나이에 출세를 한 것으로 보인다.
“반갑소. 내가 원매, 현옹이오.”
원매는 공손히 인사를 받고는, 등지를 이끌어 자리에 앉혔다. 그는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등지에게 물었다.
“이곳까지 어찌 온 것인지 상세히 설명해 주겠는가?”
“어려울 것 없습니다. 남양군에서 봉가의 영향력은 대단히 큽니다. 그곳에서 기주에서 일할 관료를 뽑는다는 말을 듣고 제가 찾아갔습니다. 형주에서는 대성인 채가, 괴가등과 연줄이 닿지 않으면 관리로 등용되기 힘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말을 듣고는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저를 이리로 보낸 것입니다....”
등지는 기주에서 관리를 한다는 생각에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다. 작은 호족인 그로서는 이런 기회는 반드시 잡아야했다.
원매는 열정적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등지를 보며 만세라도 부르고 싶을 정도로 기뻤다. 등지를 이렇게 쉽게 얻다니. 기쁜 마음을 애써 참다보니 원매의 표정은 뭔가 불편한 듯 이상해보였다.
원매가 말이 없자, 열정적으로 자신을 소개하던 등지의 눈에 실망감이 역력했다. 이곳에서도 안 되는구나. 그런 자조감이 들었을 것이다.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선 후, 작별인사를 고하려고 하자 원매가 급히 그를 붙잡았다.
“푸하하하하~ 미안. 미안하오. 하지만 좀 웃어야겠어.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하겠어.”
“어째서 그리 웃으시는 것입니까?”
등지의 얼굴은 언뜻 분노까지 엿보였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감히 원가의 핏줄인 원매 앞인지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오해는 하지 말게. 나는 그대가 남양군에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 만약 알았다면 그대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고라도 데려왔을 것이야. 그런데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어찌 웃음이 나지 않겠느냔 말이야.”
등지는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야. 나도 이해를 시킬 자신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명심해 두게. 이제부터는 바쁜 날이 이어질 것이야. 지금은 내가 관직을 내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년이면 관직을 줄 수 있네. 필요한 봉록은 지금부터 챙겨주지.”
“조금이라도 연유를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원매가 무심코 뱉은 말에 등지는 상당한 호기심이 발동한듯했다. 원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대로 말한다고 믿어줄 리가 없으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차차 알려주지. 때로는 너무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닐세. 그리고 괜찮은 인재인데 대호족이 아니어서 관리로 나서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있다면 추천하게. 내가 능력만 된다면 쓰고 싶군.”
“저는 아직 능력을 보여드리지 못했습니다. 어찌 제가 능력이 있다고 그리 단언하십니까?”
“그것도 차차 알 날이 오겠지. 자네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첩보조직을 만들어서 관리하는 일이야. 이번 가을에 흑산적을 쳐야하니, 그쪽부터 첩보를 파악해보게. 간자를 심어도 좋고. 필요한 경비는 언제든 요청하게. 참, 추천할 인재가 있는가?”
선한 인상의 등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원매같은 사람에게 위험한 행동일수도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그만큼 원매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매의 말을 곱씹어 봤지만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며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무슨 말인가? 아까 관리를 하겠다고 열정적으로 소개를 했잖은가? 왜 갑자기 발을 빼는 거야?”
원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등지를 바라보다가 입을 다시 열었다.
“좋아. 내 마음을 분명히 이야기 하지. 흑산적이 토벌되면 아버님께서 올겨울이나 내년 봄에 목사직을 추천할 것일세. 그러면 그곳을 토벌하러 갈 것이야. 어디가 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자네에게는 중요한 임무를 맡긴다고 확언하지. 어떤가? 이정도면 내말이 믿음이 가는가?”
“솔직히 더 혼란스럽습니다. 그냥 낮은 종사관부터 일을 시작하라 했으면 군말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내 말은 진심이야. 언젠가는 내 속마음을 모두 밝힐 날도 오겠지. 섭섭지 않게 대우할 터이니 첩보조직을 빨리 만들어서 흑산적부터 살피게. 그리고 괜찮은 인재인데, 대호족이 아니라서 신분이 낮아서 출세를 못하고 있다면 추천하고. 자네 가족도 이리로 데려오게.”
혼란스러워하는 등지에게 원매가 일침을 놓았다.
“자네는 이제 내 사람이야. 딴생각을 하지 말게. 고장군에게 가서 내 이야기를 하면 병사를 내어줄 것이야. 그걸로 시작해봐.”
원매는 등지가 생각에 잠긴 동안, 호위병으로부터 죽간을 건네받아 간결하게 글을 적어 내려갔다.
등지는 처음부터 자신을 고평가하는 원매에게 좀처럼 믿음이 가지 않았다. 형주에서는 아무리 자신을 알려도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대호족과 연줄이 없으면 출세는 불가능했다. 수년 동안 그렇게 살아온 것이 원매의 진정성 있는 마음을 막고 있는 것이다. 종사관부터 시작해서 능력을 보이면 좀 더 출세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등지의 솔직한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등지는 원매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죽간을 받아들어 고람에게 향했다.
촤르르륵--
고람은 죽간을 펼쳐 한눈에 죽 읽어 내려갔다. 죽간을 덮고 얼굴을 들자, 그의 밝은 안색이 드러났다.
“백묘(등지). 환영하오. 내가 군사를 내줄 터이니, 지금부터 제대로 일해 보시오. 경비 등 필요한 것은 언제든지 말하시오.”
역시 고람으로부터도 원매와 같은 시원한 대답을 듣자, 등지의 표정은 그제야 밝아졌다. 이곳은 형주와는 다른 세상인 것이다. 진실로 능력이 우선인 곳이다. 원매가 자신을 왜 고평가 했는지는 궁금하긴 했지만 미련을 접기로 했다.
“첩보조직을 만들어야 하니, 태행산 지리에 밝은 노병들 위주로 편성해주십시오.”
“내일까지 선발해 드리겠소. 당분간은 저쪽 탁자에 짐을 풀고 일하시오. 며칠 내로 새로운 막사를 지어 드리겠소.”
등지는 짐을 대충 풀고는 가운데 위치한 지도 상황판으로 다가갔다. 꽤 정교하게 산, 하천, 길, 마을등이 나오도록 제작되어 있었다.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골똘히 생각하던 등지는 ‘아차’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공자님-”
원매는 등지를 보내고 기쁜 마음에 병사들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자 뜨끔했다. 또 안하겠다고 그러면 어쩌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제가 중요한 것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아까 참신한 인재가 있으면 추천하라고 했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 빨리 말해보시오.”
원매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등지가 이정도로 말할 정도면 훌륭한 인재라는 생각이 들은 것이다.
“두기라는 자인데, 집안은 가난합니다. 호족도 아니고요. 잠시 한중군 승으로 있었지만 난리가 나자 관직을 버리고 도망쳤기에 세인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옛것에 얽매이지 않고, 지혜와 책략이 아주 풍부한 자입니다. 다만 ...... ”
“다만 무엇이오?”
“오만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한때 공조로 있었는데, 경조윤 장시가 일하는 부분을 타박하자 자신은 공조보다는 하동태수가 어울린다고 말해 빈축을 샀습니다. 그로인해 위고가 매도를 하는 통에 쫓겨났습니다. 대인관계에서는 결점이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능력만큼은 정말 대단합니다.”
“내가 꼭 데리고 쓰고 싶군. 어떡하면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소?”
“저와 안면이 있으니 허락하신다면 연통을 보내겠습니다. 자존심이 강한만큼 예로 대우를 해주시면 순순히 공자님의 사람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고맙소. 어서 시행하시오.”
원매는 등지의 손을 잡고 흔들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비록 제갈현을 얻지는 못했지만 등지와 두기라면 현재 얻을 수 있는 최상의 문관을 얻는 것이었다. 책략과 모략이 뛰어난 군사를 얻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등지에 이어 두기까지 얻는다고 생각하자 원매의 마음은 설렜다.
급히 막사로 달려가는 등지를 보며 원매는 생각에 잠겼다.
‘그토록 안 되던 것이 풀리려니 한 번에 풀리는구나. 관중을 점령하여 내가 확고한 위치를 다진다면 지금보다 인재를 얻기 쉬워질 것이다. 그때 더 좋은 인재를 얻더라도 지금의 내 사람들을 절대 박대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공자님-”
사마구의 큰소리에 원매는 깜짝 놀라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저런 비리비리한 자들이 머리는 좋겠지요?”
“왜 부러운 것이냐?”
“저는 태어나길 이렇게 태어나서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습니다.”
사마구는 머리를 긁적였다. 말해놓고 보니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눈치였다. 원매가 그런 사마구를 다독였다.
“그렇지 않아. 너도 내게 병법도 배우고 글도 배우면서 많이 발전했다. 방금 전에 네가 뭐라 했느냐? ‘언감생심’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느냐? 예전이었다면 그런 말을 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네. 어찌 그런 귀한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 나왔을까?”
“그러니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하거라. 수적천석水滴穿石이라 하였다.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는 말로 노력을 계속하면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알겠느냐?”
“수적천석水滴穿石이라. 명심하겠습니다.”
사마구는 원매가 말한 수적천석을 곱씹고 곱씹었다. 어찌 보면 자신에게 딱 맞는 말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