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제 12장 힘을 키우다-5-5
“전사마(전예), 여기 파재를 알고 있다는 놈을 데려 왔습니다.”
기병의 보고에 전예는 죽간을 내려놓고, 손짓으로 들어오게 했다. 기병은 낡은 옷을 걸친 장정 한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엄정이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들어오다 전예를 보자 급히 엎드렸다.
“일어서거라. 파재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네. 항산 바로 아래에 있는 이합촌에서 계곡을 타고 두 시진(네 시간)정도를 올라간 곳에 평평하고 넓은 공터가 있는데, 그곳에 산채를 만들어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약 2천의 무리가 있는데, 그중 병사들은 7백 정도입니다.”
“좋은 정보로구나.”
전예는 서랍을 열어 은자를 꺼내 주었다. 엄정은 이곳 기병들의 상황과 전예를 보고서 이들이 파재에게 적의가 없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확실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곧바로 엎드려 감사를 표하며, 혼자 중얼거리듯 떠들었다.
“유주에서 오신 분들인가?”
“잠깐! 지금 유주라고 했느냐?”
전예의 말이 날카로워지자, 그는 급히 엎드렸다.
“소인이 혼잣말한 것입니다. 유주방언과 기주방언이 틀려서 그랬습니다. 혹시~ 역후(공손찬)께서 보내신 것입니까?”
“어째서 그것이 궁금하느냐?”
전예의 말투에서 의심을 하는 기색이 비치자, 엄정은 더욱 납작 엎드렸다.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탁군이 가까워 소식을 알고 있습니다. 두려워서 그런 것입니다.”
대략 말하고는 슬쩍 전예를 보자, 매섭게 엄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엄정은 고개를 급히 숙였다.
“우리는 원가에서 왔다. 네가 걱정하는 공손가는 아니니 안심하거라. 그리고.”
잠시 말을 끊은 전예는 일어서서 엄정에게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우리가 너희 두목을 만나려고 하는 것은 상황을 알기 때문이다. 어차피 장연에게 밀려서 힘들지 않느냐? 갈 곳도 없을 테고. 이곳의 주인이신 원매공자님께서는 신분을 초월하여 뜻이 맞는다면 모두 포용하려고 하신다. 능력이 된다면 군인으로 출사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엄정이 두려운 눈으로 전예를 바라보았다. 전예의 묘한 말투에서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난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우리는 황건적 잔당이니 도적이니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부터 개과천선하여 열심히 노력하면 모두 도와줄 것이다. 농토를 줄 것이고, 군인으로서 출세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 호족들이 수탈하지 않도록 공자님께서 막아줄 것이다. 생각해 보거라. 공자님휘하에 있는데, 어떤 호족이 덤벼들겠느냐?”
“그런 높으신 분들이 어찌 비천한 우리들을 신경 쓴답니까?”
“자네. 파재의 명령을 받고 우리가 어떤 가 염탐하러 온 것이지?”
전예가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자, 엄정은 급히 머리를 숙였다. 아니라고 부정을 해야 하는데, 두려움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괜찮아. 잘됐어. 온 김에 공자님을 뵙고 가게. 우리가 자네들에게 적의가 없음을 알려주고 싶은 것뿐이야.”
엄정은 사색이 된 표정으로 전예를 바라보았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한 그의 얼굴을 보고 엄정은 좌절했다. 전예는 엄정을 따라오라고 손짓을 하고는 곧바로 원매에게로 향했다. 엄정은 불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뒤를 따랐다.
“공자님. 전예입니다.”
“들어와.”
전예는 곧바로 엄정을 이끌고 막사로 들어섰다. 원매는 사마구에게 병법을 가르치던 중이었다. 사마구를 보자 전예는 미소를 머금었다.
“같이 온자는 누구인가?”
“파재가 보낸 자입니다. 아무래도 우리를 염탐하러 보낸 듯한데, 공자님께서 전령으로 이용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원매는 매섭게 한눈에 엄정을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곳을 책임지고 있는 원매일세. 자네는 누구인가?”
원매의 위압감에 엄정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원매를 바라보고는 체념하여 입을 열었다.
[엄정(36)]
무력:67, 통솔력:50
※ 황건적 장수로 상황이 다급해지자, 장보를 죽여 항복한 인물. 연의 가공의 장수.
“소인은 엄정이라고 합니다.”
“엄정. 그래. 파장군이 우리 동태를 살펴보라고 했겠지? 자네가 본대로야. 우리는 파장군에게 적의가 없어. 장연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도 알고 있고. 괜찮다면 우리와 함께 가세. 나는 절대로 신분 따위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네. 능력이 있다면 출세의 문은 항상 열려있어.”
엄정은 원매의 말에도 믿지 못하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말을 잘못했다가는 목이 달아나지 않을까하는 걱정에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무력 89에 오른 원매의 몸에서는 자연스럽게 타인을 위압하는 무형의 기운이 뻗어 나왔던 것이다.
“이쪽은 사마구야. 내말들을 뺏으려고 덤볐다가 패하여 항복했어. 그리고 내 부하가 되었지.”
원매가 슬쩍 사마구에게 턱짓을 하자, 사마구는 엄정에게 그간의 있었던 일을 살을 붙여가며 자세하게도 풀었다. 굳이 원매의 주먹에 죽도록 맞았느니, 그런 말은 필요 없었는데, 흥분해서 계속 떠들어 댔다.
“그만.”
원매가 말리지 않았으면 밤새도록 떠들었을지도 몰랐다.
“이놈아. 짧게 중요한 것만 말하면 되지. 그걸 미주알고주알 다 말하느냐?”
“아니. 다 말하라면서요? 시킬 땐 언제고 왜 야단을 치십니까?”
원매가 눈을 부라리자, 그제야 사마구가 눈을 내리 깔았다. 엄정은 이 기묘한 상황을 보며, 마음이 편해졌다. 도적출신의 항장을 저렇게 마음을 주어가며 상대하는 사람이라면, 자신들도 무시하지 않고, 동등한 기회를 주리라 판단한 것이다.
엄정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렸다.
“장군(파재)께 공자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장군께서도 이런 공자님의 진정한 의도를 아신다면 마음이 돌아서지 않겠습니까?”
“고맙네. 필요하면 자리를 마련하게. 나도 파장군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군. 뜻이 맞는다면 모두 같이 살수가 있어.”
원매는 엄정을 격려하여 돌려보냈다.
엄정은 그길로 파재에게로 향했다. 산에 올라가다 중간에 숨어서 누가 몰래 뒤를 따르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는 빠르게 산을 타고 올라 파재의 치소로 뛰어들었다.
“장군!”
문이 ‘쾅-’하고, 열리며 엄정이 들어오자, 파재는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 이곳 놈들이 예를 잘 모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치소로 올 때는 나름 조심했던 것이다.
“갔던 일은 잘됐는가?”
“잘됐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고, 신분에 연연하지 않고 충성심과 실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출세의 길이 열려 있다고 했습니다.”
파재는 혹시 엄정이 미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미친놈이 신분을 가리지 않고, 실력만으로 출세를 시켜준단 말인가? 더군다나 이곳 기주의 원소는 철저한 신분, 유주의 공손찬은 인연위주였다.
“똑바로 들은 것이냐? 저놈들에게 놀아난 것은 아니고?”
파재가 자신의 말을 의심하는 듯하자, 엄정이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그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아니 내가 바보가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엄정은 원매, 전예, 사마구의 일을 일일이 열거하며 자세히 설명하자, 파재의 의심스러운 표정도 많이 풀어졌다. 한참 후에야 닫혔던 파재의 입이 어렵게 열렸다.
“원매라는 자는 참으로 놀라운 자로구나. 다른 것은 몰라도 사마구를 그리 대한다는 것은 결코 가식이 아니란 증거다. 어찌 원가에 그런 자가 태어났을까?”
“장군께서 한번 만나보시지요. 제가 똑똑하지는 않아도 눈치는 있지 않습니까? 결코 거짓으로 연극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 네가 다시 가서 자리를 마련해 보거라. 네 말이 맞는다면 그를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구나. 장연 저 죽일 놈 때문에 갈 곳도 없어.”
엄정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곧바로 산을 달려 내려갔다. 파재가 만남을 제안하자 원매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장소는 산에서 내려온 넓은 개활지의 중간을 택했는데, 군사를 숨기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파재를 안심시키기 위한 원매의 배려였다.
가운데 사방이 뚫린 막사가 설치되었고, 원매가 사마구를 대동하고 먼저 기다렸다. 아무래도 사마구가 대화를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파재는 멀리는 원매의 행동을 지켜보고, 사방에 매복한 군사들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엄정을 대동하고 막사로 들어섰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파재입니다.”
“원매, 자는 현옹이오. 반갑소.”
[파재(41)]
무력:75, 지력:69, 정치력:55, 통솔력:72
※ 황건적장수로 초창기에 영천에서 주준의 군대를 격파했지만, 이후에 황보숭, 주준, 조조의 연합군에 패한 후 기록이 없다.
원매는 파재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털썩 앉았다. 그는 사마구를 손짓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사마구요. 대화를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데리고 나왔소.”
파재는 날카로운 눈으로 사마구를 훑어본 후, 이것저것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사마구는 미리 원매에게 교육을 받았는지 그전처럼 마구 떠벌이지 않았다. 파재는 사마구와 이야기를 하고나자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 들리는 소문으로는 지금과 훨씬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을 속이려고 그러신 것입니까?”
“그때는 철이 없어 그런 것이오. 언제까지 그렇게 살수는 없지 않소?”
“신분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실력만 있으면 출세를 시켜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원가에서 태어났으면서 어찌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최고 명문인 원가라면 사방에서 호족들이 스스로 임관을 청할 것이니, 자기 같은 도적에게까지 손을 내미는 상황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솔직히 이야기 해드리리다. 호족들이란 자신만의 굳건한 세력이 있소. 다시 말해 그들이 충성을 하는 것은 가문을 위한 것이오. 언제든지 가문이 위험해지면 배신을 할 수가 있소. 내게는 호족의 연합에 대응하는, 오직 내게만 충성하는 세력이 필요하오. 그래서 신분도, 재력도 보지 않고, 오직 충성심과 실력을 보는 것이오.”
원매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파재를 담담히 쳐다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가 맘에 드오. 나와 함께 영화를 같이 합시다. 내 사람을 결코 홀대하지 않소이다.”
“이야기를 들으니 언뜻 이해가 가면서도, 쉽게 수긍은 가지 않습니다.”
철저한 신분제의 틀에서 40년을 살아온 파재가, 현대인 권진현이 회귀한 원매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나를 믿고 따라오시오. 어차피 장연 때문에 곤궁한 처지가 아니오? 사마구를 보면 알겠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소이다. 그대는 장수로서의 삶을 살고, 그대 휘하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땅을 나눠주겠소. 내가 있으니 어떤 호족도 땅을 빼앗거나 수탈을 하지 못할 것이오. 어떻소? 이정도면 꽤 괜찮은 조건 아니겠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내가 이곳에서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소. 얼마면 되겠소?”
“넉넉잡고 3일이면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저에게서 어떤 연통도 없다면 인연이 아니어서 멀리 간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원매는 파재에게 다가가 손을 꼭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파장군. 사람 냄새나는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해 주시오. 나는 그대를 믿고 이곳에서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소.”
파재는 파르르 눈가에 경련을 일으키다가 예를 표하고는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