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패스마스터
별다른 꾸밈없이 오직 굵은 선으로 만들어진 반투명한 사다리게임.
그 사다리를 바라보는 김상훈의 몸은 아주 무서운 공포영화라도 본 듯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제발! 제바아알!”
긴장감으로 입고 있던 티셔츠가 축축하게 젖은 채, 간절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 김상훈.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이찬수 역시 양손을 마주잡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양손을 빠르게 비비며 요상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 제발, 신이 있다면 김상훈에게 최악의 운을 선사해주소서! 제발 운빨좆망겜의 최후를 맞이하게 해주소서!
그런 이찬수의 행동을 당연하게 김상훈은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아 진짜! 뭐하는 거예요? 부정 타게 증말······!”
- 야 인마! 솔직히 여기서 메시의 드리블이나 인자기의 위치선정이 나오면 쒸바 그게 게임이냐? 어? 네가 메시처럼 드리블을 한다고 생각해봐. 그게 말이 돼?
“말이 안 될 건 뭐가 있어요? 이미 이찬수 선수의 퍼스트 터치도 잘만 쓰고 있는데!”
- 그거는 좀 다르지!
“뭐가 다른데요?”
- 퍼스트 터치는 티도 잘 안 나고······ 하여튼! 다르지!
“아! 괜히 할 말 없으니까 이러시네. 그리고 저 두 개 빼고는 저한테 다 필요 없는 거라고요.”
- 아 하여튼 이건 안 돼! 야 그리고 너는 미드필던데 인자기의 위치선정이 왜 필요해? 하루죙~일 세컨볼만 노리려고?
“레전드 스킬이니까 없는 것보다는 낫겠죠. 아니면 공격수로 전향해도 되는 거고요.”
- 헤딩도 못하는 놈이 무슨 공격수야?!
“저 헤딩 준수하게 하거든요? 지금 저 키 작다고 그러시는 거죠? 지금 키 작은 공격수 비하하시는 건가요?”
- 지랄하지 말고, 너는 아직 공격수답게 움직이는 법을 모르잖아.
“아! 그래서 매일 이찬수 선수한테 배우고 있잖아요.”
- 아직 멀었어 인마!
“하여튼 좋은 거 떠야 돼요. 아오! 근데 이건 왜 이렇게 느리게 움직이는 거야? 어? 제대로 움직인다!”
- 어어?!
작은 진동 수준의 움직임이었던 알파벳D가 드디어 그 무서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굵은 선으로 만들어진 사다리, 그 위를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알파벳 D.
김상훈은 이제 숨도 쉬지 못하고 오롯이 사다리에 집중했다.
드르륵! 드르르륵!
알파벳 D가 움직일 때마다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소리는 김상훈과 이찬수의 긴장감을 더욱 커지게 만들었다.
좌······ 우······.
천천히 움직이던 알파벳 D는 리오넬 메시의 드리블이 위치한 곳 근처에서 지그재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김상훈의 눈이 점점 커졌다.
“······간다! 간다!”
현재 알파벳 D는 분명히 리오넬 메시의 드리블 쪽에서 맴돌고 있었다. 이름만으로도 사기적일 것 같은 스킬을 눈앞에 둔 김상훈은 계속해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거의 다 됐다! 조금만 더······! 응?!”
지금 이 순간 김상훈은 생각했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다고.
그에게 벌어진 일들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만큼 믿기 싫은 일이 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띠링! 띠리링-!
[랜덤 사다리의 보상이 결정되었습니다.]
[키가 쑥쑥! 오마 골드!(G)가 지급됩니다.]
- ·······큽! 크흡!
이찬수는 스스로의 입을 막고 바닥을 데굴데굴-뒹굴었다. 웃음을 참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전드 등급의 스킬 2개를 눈앞에서 날린 김상훈은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주저 앉아있었다.
“·······이건 아니지. 진짜 이건 아니지······.”
레전드 등급 스킬을 얻을 확률은 따지고 보면 50% 확률이었다.
그 50% 확률을 뚫지 못하고 엉뚱한 보상을 얻어버린 김상훈은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조용히 웃음을 참던 이찬수의 입에서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 크캬캬캬캬캬컄! 아오! 진짜 너무 통쾌하다! 시스템이 이제 제대로 일을 하는 구만?! 그래, 일은 이렇게 해야지! 지금까지 너무 밸런스 생각 안하고 퍼준 걸 지도 아는 모양이야.
“······그만하시죠.”
- 왜? 내가 왜 그만해야 돼? 시룬뎀~? 시룬데에에에엠~?
“······제자가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는데 놀리고 싶으세요?”
- 크헤헤헤헤! 기분 진짜 좋다. 네가 이렇게 좆망하는 날이 드디어 오는구나!
이찬수의 계속된 놀림을 듣던 김상훈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 너 뭐하냐? 갑자기 잠바는 왜 입어?
“······.”
- 왜 대답이 없어? 상훈아, 그래도 스승이 얘기하면 대답은 해줘야지~?
“런던에서 유명한 엑소시스트 좀 찾아가려고요.”
- 뭐?! 뭔 소리여 그건 또? 엑소시스트를 왜 찾아가? 내가 시발 무슨 악령이야?! 어?!
“······웬만한 악령보다 더 사악한 것 같아서요.”
- 이, 일단 진정 좀 하고! 상훈아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저거 키 크는 아이템이잖아? 괜찮은 거 아니야?
“······레전드 놓쳤잖아요.”
- 야! 다음에 얻으면 되지~ 그리고 이미 레전드 스킬 2개 가지고 있잖아. 그리고 블루 박스도 남아 있잖아.
“······에휴! 일단 레전드 스킬들은 잊어버리고 블루 박스에 기대를 걸어봐야겠네요.”
말을 마친 김상훈은 랜덤스킬 사다리에서 뜬 아이템의 정보를 바라봤다.
[키가 쑥쑥! 오마 골드!]
- 등급 : 골드(G)
- 효과 : 츄잉캔디를 먹으면 50% 확률로 키가 1cm 영구적으로 커집니다.
오마 골드, 이 아이템은 김상훈이 한 번 먹어본 경험이 있는 아이템이었다.
결과는 실패였지만, 오마 골드는 어찌되었건 50%의 확률로 키가 클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이었다.
현재 김상훈의 키는 179cm.
이 아이템으로 1cm 크는 것에 성공하다면 꿈에 그리던 180cm 키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만 지금의 김상훈에게 오마 골드에 대한 큰 기대는 없었다.
이미 레전드 아이템을 눈앞에서 놓쳐버린 그는 오늘의 운이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김상훈은 과감하게 오마 골드를 입안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쮸압-! 쮸압-!
“쩝······맛은 괜찮네.”
부드럽고 쫄깃하게 씹히는 츄잉 캔디의 맛은 썩 괜찮은 편이었다.
적당히 달콤하고 새콤한 맛의 그것은 몇 번 씹자, 이내 스르륵 녹아 없어져버렸다.
입 안에 캔디가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시스템이 결과를 공개했다.
화려한 효과음은 덤이었다.
빠바바밤-! 빠밤빠암-!
[축하합니다! 50% 확률을 뚫어내고 1cm의 키를 얻으셨습니다.]
“·······오?!”
- 오?!
전혀 기대하지 않아서였을까?
절망에 빠져있던 김상훈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졌다.
“나 180cm 된 건가?”
- 미친, 이렇게 키가 큰다고?
“크게 느껴지진 않네요. 180이 되면 공기부터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 자! 이제 박스나 까보자.
“예 지금 까려구요.”
사실, 그 전까지 깠던 레드 박스 4개는 모두 제물에 불과했고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아주 높은 확률로 좋은 스킬이나 아이템이 나오는 블루 박스.
이게 남아있다는 것이 레전드 스킬을 놓친 김상훈이 힘을 낼 수 있는 이유였다.
“제물도 다 깔아놨겠다, 진짜 가봅시다.”
기대감은 이미 커질 대로 커진 것이 사실이었다.
메시의 드리블과 인자기의 위치선정을 본 김상훈은 지금 이 순간 비슷한 급의 스킬이나 아이템이 아닌 이상 별 감흥을 느끼지 않을 것만 같았다.
때문에 블루 박스를 오픈하는 김상훈의 표정은 덤덤했다.
[블루 박스를 오픈하시겠습니까?]
“예아~! 빠르게 돌려줘요~”
푸른빛을 띤 고급스러운 박스가 굳건한 몸체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른 효과음이 들렸다.
마치 클럽에 온 것과도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신나는 EDM음악이 흘러나온 것이다.
둠칫 둠칫 둠칫-! 빠밤빠빠빠빠밤~! 빠빠빠빰-!
“뭐, 뭐야?! 왜 클럽음악이 나와?”
일단 클럽 음악이 나오니 저절로 몸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상훈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 으, 으악! 내, 내눈! 너 뭐하냐?
“보면 몰라요? 클럽댄스 추잖아요. 안되겠다. 휴지도 좀 뿌려야겠다.”
춤을 추던 김상훈이 침대 옆에 있던 티슈를 뽑아서 허공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찬수의 표정이 점점 괴상하게 변해갔다.
- 그건 또 뭐야? 왜 그러는 거야?
“제가 한참 클럽 다닐 때는 이러고 놀았어요.”
- ·······맞아? 존나 병신 같은데?
“아~! 진짜라고요!”
오랜만에 춤을 춰서일까?
춤바람이 나버린 김상훈이 박스가 돌아가는 것도 잊은 채, 댄스에 집중했다.
그때, 그런 김상훈의 귓전에 이찬수의 커다란 목소리가 스쳤다.
- 박스 멈췄다!
“엌?!”
그제야 정신을 차린 김상훈이 동작을 멈추고 차렷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박스의 뚜껑이 열리는 것을 바라보며 손을 모았다.
“이번만큼은! 제바알!”
박스가 조금씩 반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신비한 광경이었다.
천천히 사라져버린 박스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게 되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다만 평소에 보던 메시지보다 훨씬 화려하고 멋진 메시지였다.
그 결과를 확인한 김상훈과 이찬수가 벙찐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비 에르난데스의 패스(L)를 습득하셨습니다.]
무려 레전드 등급의 스킬이 나와 버렸으니까.
***
사비 에르난데스.
스페인 출신이자 스페인 국가대표로 133경기를 뛴 레전드이자 FC바르셀로나의 최전성기의 중심에 있었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중 한 명.
패스마스터를 꼽을 때면 무조건 꼽히는 선수일 정도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패스능력을 지닌 선수.
그런 선수가 바로 사비 에르난데스였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기가 힘들 정도로 아주 유명한 선수였던 만큼 김상훈도 잘 알고 있는 선수였다.
“사, 사비?!”
당연하게도 김상훈은 너무 놀랐다.
그런 김상훈은 얼빠진 얼굴 그대로 이찬수를 바라봤다.
이찬수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사실 김상훈보다도 더 크게 놀란 남자가 바로 이찬수였다.
실제로 이찬수는 지금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 니, 니가 여기서 왜 나와?!
“이찬수 선수는 사비에 대해서 잘 아시죠?”
- 당연하지 인마! 같은 팀이었는데. 이, 일단 스킬 정보부터 좀 봐봐.
“예. 시스템, 스킬 정보 좀 보여줘.”
[사비 에르난데스의 패스(L)]
- 등급 : 레전드(Legend)
- 효과 : 스페인의 사비 에르난데스, 그의 패스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끝판왕이었다.
지금 이 순간 김상훈은 메시의 드리블과 필리포 인자기의 위치선정과 같은 스킬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물론 앞서 보았던 스킬들도 엄청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패스 능력이 부족한, 특히 창의적인 패스능력이 현저히 부족했던 김상훈에게는 가장 필요했던 것이 이런 패스와 관련된 능력이었다.
- 으아아아악!
스킬 정보 창을 본 이찬수가 괴성을 질러댔다.
“왜, 왜 그래요?”
- 야이~씹! 이건 진짜······! 야 이건! 아! 아으!
“아니 진짜 왜 그래요?! 말을 하세요. 말을!”
- 미친! 패널티도 없이 사비의 패스를 쓸 수 있다고? 야! 이건 메시의 드리블이나 필리포 인자기의 위치선정보다도 더 개사기잖아!
“그, 그 정도라고요?”
- 뭔 개소리야? 너 사비가 누군지 몰라?!
“알긴 알죠. 패스 엄청 잘하는····· 바르셀로나에서 뛰던······.”
- 알긴! 개뿔! 사비 걔는 그냥 엄청 잘하는 그딴 말로 포장이 안 되는 놈이야. 걍 패스의 신이야. 알겠어? 넌 지금 패스를 미친놈처럼 잘하는 놈의 능력을 얻은 거라고!
핏대를 세워가며 말하는 이찬수의 모습에 김상훈은 조용히 잠옷을 벗고 운동용 옷으로 갈아입었다.
- 너 뭐하냐?
“이찬수 선수가 그렇게 극찬할 정도의 사람이 가진 능력이라면, 확인해보지 않고서는 잠이 안 올 거 같아서요.”
- 이 시간에 훈련을 하러 나간다고? 너무 늦었는데?
“좀 늦긴 했지만, 확인해봐야겠어요. 사비의 패스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사비 에르난데스의 패스를 얻게 된 김상훈이 떨리는 마음으로 숙소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