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도발(2)
- 저기 이광 보인다. 이야~ 너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데? 야리지 말라고 한 마디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나 같으면 이미 눈 뽑아버리기 전에 눈 깔라고 했을 텐데.
“뭐하러 그래요. 그냥 경기로 보여주면 되지. 그리고 쟤 저번에 저한테 당한 게 있잖아요. 열 받을 만도 하죠.”
- 새끼, 착한 척 하기는. 어디 한 번 네가 가만히 있나 보자.
“착한 척이 아니라 저는 진짜 착한 거예요. 한 번 보세요. 쟤가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저는 성인군자처럼 무시해버릴 거니까.”
- 푸하하핫! 네가 착하다고? 상훈아 진짜 지랄도 병이다.
김상훈은 그를 한껏 비웃는 이찬수의 말을 무시하면서 인천 선수들과 악수를 하기 위해 다가갔다.
꾸욱!
한 명, 한 명 악수를 하며 지나가던 김상훈의 눈에 계속해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눈 빠지겠다. 인마.’
당연하게도 김상훈을 노려보는 남자는 이광이었다.
그래, 내가 저번에는 조금 심하게 도발하긴 했지. 화날 만도 해.
과거에 했던 자신의 행동이 과했다고 생각하며, 김상훈은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실제로 지금 김상훈은 이광에게 큰 악감정은 없었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한다고 생각했고, 상대가 기분 나쁜 눈빛으로 쳐다본다고 해서 똑같은 행동을 하면 결국 자신도 비슷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저런 눈빛 따위, 가볍게 무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휙!
그런 김상훈의 악수를 이광은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꿈틀!
선의의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건넨 김상훈의 눈썹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하! 이 새끼가?!’
그래, 참자. 그럴 수 있어. 경기에서 보여주면 되잖아?
김상훈은 스스로를 다스리며 이광의 도발을 웃어넘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는 달리 이미 입과 혀가 움직여버렸다.
“어이!”
***
파릇파릇한 잔디가 깔린 필드 위에는 승리를 갈망하는 선수들이 각자 정해진 위치에 서 있었다.
양 팀 선수들이 그런 잔디 위에 올라서서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길 기다릴 때, 반투명한 몸을 가진 남자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 크하하하하핫! 어우! 진짜 내 배꼽 어디 갔어? 내 배꼽! 푸하하핫! 상훈아, 조금 전에 네가 뭐라고 했더라? 저는 진짜 착한 거예요?!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성인군자처럼 무시해버릴 거예요?! 푸하하핫!
“아! 그만하세요. 아깐 조금 기분이 나빠서 그랬던 거라고요.”
- 예~ 예. 천사 김상훈 씨.
“후······.”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찬수의 공격으로 인해 멘탈이 흔들리려 할 때쯤, 그런 김상훈을 구해주는 소리가 있었다.
삐이익! 삑!
경기 시작을 알리는 주심의 휘슬소리였다.
투욱!
에반에게 공을 받은 박성인은 뒤에 위치한 김상훈에게 공을 돌렸다. 전방을 바라본 김상훈은 줄 곳이 없다는 것을 판단하고 뒤에 있던 하대선에게 다시 공을 돌렸다.
공을 잡은 하대선은 오른쪽 사이드로 치고 들어가는 고요함에게 롱패스를 뿌렸다.
뻥-!
패스는 정확하게 고요함이 달리고 있는 바로 앞 공간에 떨어졌다. 공을 잡아낸 고요함은 크로스를 할 것처럼 다리를 휘둘렀다. 그러자 한 발 늦게 따라온 이진야가 고요함의 크로스를 막기 위해 다리를 뻗었다. 그러나 고요함의 크로스는 페이크였다.
휘두른 다리에 힘을 빼고 몸을 틀어서 이진야를 제쳐낸 고요함은 왼발로 크로스를 올렸다.
이번에는 전방에 쉐도하는 박성인을 노린 진짜 크로스였다.
타앗!
박성인이 날아오는 공을 향해 점프했다.
점프 타이밍도 나쁘지 않았고, 위치 선정도 좋았다. 제대로 이마에 공을 맞추기만 하면 골이 될 확률이 높은 상황.
그런 상황에서 인천을 구해낸 것은 수비수 김용한이었다. 인천의 수비수인 그는 뛰어난 피지컬로 수비를 하는 전형적인 파이터형 수비수였다.
그는 박성인보다 점프 타이밍이 늦었지만,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박성인의 헤딩을 방해했다.
투욱-!
김용한의 거친 방해에 결국 박성인은 머리에 공을 제대로 맞추는 것에 실패했고, 바닥에 떨어진 공을 인천의 골키퍼 최산이 잡아냈다.
“이동석!”
공을 잡은 최산은 팔을 크게 휘둘러 공을 멀리 던져냈다. 그가 노린 곳은 인천의 미드필더 이동석이 위치한 곳이었다.
탁!
공을 잡은 이동석이 서울의 수비라인 앞쪽에서 달리고 있는 이광을 바라봤다.
현재 인천에서 이광의 입지는 단단하게 다져진 상태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시즌 중반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8골을 넣은 선수는 쉽게 볼 수 없었으니까.
‘녀석이라면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거야.’
때문에 이동석은 이광에 대한 믿음을 갖고 전방을 향해 길게 패스를 뿌렸다.
뻐엉-!
이광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이동석과 그의 호흡은 이미 몇 차례 경기를 통해 완벽하게 맞춘 상태였다.
이동석의 눈빛을 보자마자 수비라인을 뚫고 뛰기 시작한 이광은 빠르게 쏘아져나가는 공을 향해 다리를 뻗었다.
탁! 공을 잡은 이광의 앞에는 골키퍼 빼곤 아무도 없었다.
즉, 그의 슈팅을 방해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골을 넣는 건 이광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스윽!
침착한 슈팅을 위해 드리블 템포를 확 죽인 이광은 차분한 눈으로 전방을 바라봤다. 다급하게 튀어나오는 유현수 골키퍼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이광은 당장이라도 강한 슈팅을 때릴 것처럼 다리를 강하게 휘둘렀다.
유현수 골키퍼는 그런 슈팅을 막기 위해 이광의 다리 밑으로 슬라이딩을 했다.
촤츠츠츠츠!
잔디와 유현수의 몸에서 나는 마찰음. 그런 마찰음과 함께 유현수의 몸이 빠르게 이광에게 접근했다. 이광은 그런 유현수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툭!
동시에 골키퍼가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다리에 힘을 빼고 공을 가볍게 찍어 찼다.
이광이 가볍게 찍어 찬 공은 유현수의 몸을 넘겨서 골대로 향했다.
당연히 골일 것이라 생각한 이광은 세레머니를 하기 위해 어딘가로 빠르게 달려갔다.
이 순간 이광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지금 벌일 행동을 위해 그동안 얼마나 노력해왔던가.
빠른 속도로 한 남자의 앞에 다가간 이광이 멈춰 섰다.
눈이 붉게 물든 이광은 남자를 향해 간신히 억눌러왔던 감정을 폭발시켰다.
“이게 나야 이 새끼야! 이게 나라고!”
반면 그런 이광의 앞에 서 있던 김상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야, 너 뭐하냐?”
원하던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이광의 동공이 흔들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팀원 그 누구도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이광이 고개를 돌려서 서울의 골대를 바라봤다.
“뭐, 뭐야!”
공은 분명히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골이 아닐 리가 없었다. 그때, 이광의 고개가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곧 그는 볼 수 있었다.
코너킥라인에 서 있는 부심이 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 순간 이광의 귓가에 듣기 싫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푸흡! 야 너도 참···· 어지간히 흥분했나보다? 어떻게 프로라는 놈이 업사이드인 걸 확인을 안 하냐? 방금 거 업사이드야 인마. 그렇게 내 앞에서 세레머니를 하고 싶었어? 엉?”
“이, 이게 왜! 이게 왜 업사이드야!”
“심판한테 물어봐 인마. 왜 나한테 난리야?”
얼굴이 붉어진 채 길길이 날뛰는 이광을 무시한 채, 김상훈은 자신의 포지션 위치로 뛰어 들어갔다.
- 푸하하하! 이 악마 같은 새끼! 그걸 또 놀리고 그러냐. 나는 이제 슬슬 이광이 불쌍해지려고 해.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도발한 녀석 잘못이죠.”
- 그래도 저 녀석 덕분에 경기는 편해지겠네.
“그럴 거 같네요.”
이찬수의 말 그대로였다.
이광처럼 경기 중에 과도하게 흥분한 선수는 보통 그 팀의 분위기를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화를 참지 못하고 거친 플레이를 해 옐로우 카드를 받는 경우도 많았고, 심할 경우에는 레드 카드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김상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의 목표는 골을 넣는 것과 팀이 이기는 것.
경기의 난이도가 쉬워진다면 그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오늘 골 맛 좀 실컷 볼 수도 있겠네요.”
- 에휴! 또 꿀 빨겠네.
***
꺄르르륵! 푸하하핫!
관중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웃음소리가 자신을 향한 비웃음으로 느껴졌다.
꾸욱!
주먹을 강하게 움켜쥔 이광이 소리를 질렀다.
“젠장! 젠자앙!”
그 순간 잔뜩 흥분했던 이광이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다시 깊게 내쉬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흥분할 때가 아닌, 경기를 이기기 위한 골을 넣어야 할 EO라는 것을.
이런 감정 따위 어떻게든 조절해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후우······ 그래, 진정하자. 일단 이기자. 이기고 나서 생각하자.”
다혈질에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라고는 하지만 이광 역시 프로였다.
프로라는 타이틀은 이광으로 하여금 감정 컨트롤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제 겨우 1번 실수 한 거잖아? 한 번은 실수할 수 있어. 그래 괜찮아. 좋은 기회는 또 올 거니까····· 응?!”
세차게 흔들리던 멘탈을 간신히 붙잡아가던 이광의 눈에 화려한 중거리 슛으로 골을 넣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양팔을 펼친 채 필드 위를 뛰어다니며 괴성을 질러댔다.
“촤아!”
그 남자, 김상훈의 골에 이광의 멘탈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김상훈은 머지않아 멋진 퍼스트 터치 이후에 때린 슈팅으로 2번 째 골까지 넣었다.
김상훈이 두 골을 넣는 시간은 경기가 시작되고 20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활약.
그런 김상훈의 활약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이광은 기어코 해서는 안 될 생각을 가졌다.
“이대론 안 돼.”
이광의 눈빛이 더욱 독하게 변했다.
날카로운 슈팅과 동료들과의 뛰어난 연계플레이로 인천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김상훈을 막아야 했다.
아니, 막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녀석의 다리를 부숴버리고 싶다. 녀석이 다시는 축구를 못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생각을 마친 이광은 망설이지 않았다.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인터넷 방송이나 할 것이지 왜 축구를 한다고 나대서 나를 열 받게 해?”
그는 전속력으로 김상훈을 향해 달려갔다.
김상훈이 공을 잡는 것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서울의 공격의 대부분이 김상훈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때문에 김상훈은 계속해서 공을 만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투욱-!
에반에게서 공을 돌려받은 김상훈이 다시금 박성인을 향해 전진패스를 찔러주려 할 때.
김상훈의 뒤로 뛰어온 이광이 다리를 높이 들고 김상훈의 발목을 향해 슬라이딩을 했다.
촤아아악!
“죽어! 이 개새끼야!”
김상훈의 발목에 발이 닿기 직전, 이광은 무릎을 살짝 접었다가 강하게 펼치며 축구화의 스터드로 그의 발목을 강하게 내리 찍었다.
빠아아악!
그 순간, 그라운드 위에 커다란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아악!”
그 끔찍한 비명소리에 관중들이 스스로의 입을 막고 하던 응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 열광적으로 스스로의 팀을 응원하던 관중들은 지금 이 순간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그라운드 위를 바라봤다.
“끄아아아악! 내 발!”
그라운드 위에는 한 선수가 발목을 부여잡고 고통에 울부짖으며 잔디 위를 뒹굴고 있었다.
그 선수가 붙잡고 있는 발목은 누가 보더라도 부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위아래로 덜렁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