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포항(1)
원정 팀 전용 라커룸 안.
경기 시작 전, 서울의 선수들이 대기하고 있는 이곳에서는 감독의 연설이 이뤄지고 있었다.
김상훈 역시 두 눈을 반짝이며 손승민 감독의 연설에 집중했다.
신인 선수인 김상훈에게는 모든 순간이 소중한 경험이었으니까.
다만, 그의 집중력을 자꾸만 방해하는 남자가 있었다.
- 상훈아! 너 저기 있는 손승민 형 술버릇이 뭔지 알아? 모르지? 저 형, 실은 술만 먹으면 질질 짜는 버릇이 있어. 그래서 그런지 정말 친한 사람들 아니면 술자리에 안 가더라고.
- 그게 끝인 줄 알아? 저 형 취미가 축구게임인데 저렇게 카리스마 있고 묵직해 보이는 양반이 게임에서 지면 바로 조이스틱을 바닥에 던져버린다니까?
김상훈은 계속해서 손승민 감독의 썰을 풀어대는 이찬수의 말을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솔직히 흥미진진한 얘기들이었기에 막았던 귓속으로 조금씩 이찬수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찬수의 말을 무시하는 것에 실패한 김상훈이 작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진짜에요?”
- 그럼! 내가 저번에 말했다시피 내가 오늘의 위닝 초고수거든. 근데 저 형이 어느 날 나한테 한 번 붙자는 거야. 그래서 뭐, 내가 게임 속에서 흠씬 두들겨 줬지. 한 6골 쯤 박아줬었나? 그랬더니 저 얌전하던 양반이 글쎄 갑자기 조이스틱을 집어 던지면서 게임 개발자들 욕을 하기 시작하는데····· 어우! 그때 어찌나 웃겼던지······.
김상훈은 이찬수의 말을 들으며 곁눈질로 손승민 감독의 얼굴을 봤다. 그러자 무거운 표정과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선수들을 향해 연설을 하고 있는 손승민 감독의 모습과 조이스틱을 집어던지는 손승민 감독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크흡······! 저 지금 웃으면 안 되니까 적당히 하세요.”
- 그래서 오늘 경기 자신 있어?
“뭐······ 상대가 강팀이라 어떨지는 모르겠는데 분석은 끝냈잖아요? 물론 이찬수 선수가 거의 다 도와주신거지만.”
- 에휴! 네가 실력만 좋았어도 내가 K리그 선수들 분석 같은 걸 할 일은 없었을 텐데.
“예~ 제가 죄송합니다.”
만담을 나누던 도중, 김상훈은 볼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음흉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이찬수의 얼굴을.
세상 얄밉게 웃으며 목을 긋는 시늉을 하고 있는 이찬수의 모습을.
고개를 갸웃거린 김상훈은 고개를 돌려서 뒤를 돌아봤다.
‘아, 시바······.’
김상훈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화가 많이 난 듯 얼굴이 붉어진 손승민 감독이 서 있었다.
“자네, 지금 뭐하는 건가?”
“아······ 죄송합니다.”
“내가 우스운 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집중 잘 하겠습니다.”
“경기 시작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짧게 말하지. 자네가 데뷔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것은 맞아. 특히 마지막에 보여준 모습은 나 역시 크게 놀랐으니까.”
“······.”
“하지만, 자만하지 않길 바라네. 자네는 이제 겨우 데뷔전을 치룬 신인 선수일 뿐이야. 그런 것이 아니길 바라지만, 만약 자네가 한 경기를 잘했다고 거만해진 것이라면····· 정신 차리게.”
“……명심하겠습니다.”
핑계가 통할 분위기가 아니었고, 핑계를 댈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김상훈은 그저 죄송하다, 명심하겠다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쉰 손승민 감독은 몸을 돌리며 작게 말했다.
“저번처럼 후반전에 출전할 수도 있으니 알고 있게.”
***
김상훈은 데뷔전 때의 활약을 인정받아서 오늘 경기에서도 벤치에 앉을 수 있었다. 사실 이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2군을 뽑으려던 테스트에서 합격한 선수를 2달도 안 되는 훈련 이후 1군으로 바로 올리는 것.
갓 1군으로 올린 선수를 개막전에서 곧바로 데뷔시키는 것.
그 선수를 그 다음 경기까지 후보로 데려오는 것은 K리그 역사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그만큼 손승민 감독은 김상훈에 대한 기대가 컸다.
손승민 감독, 그에게 김상훈은 확실하게 실력을 보여줬으니까.
훈련 때도 어떻게든 골을 넣는 모습을 보여줬고, 데뷔전에서는 괴물과도 같은 모습으로 헤트트릭을 기록했으니까.
손승민 감독의 믿음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아쉬워하고 있었다.
‘설마 녀석이 벌써부터 거만해진 것은 아니겠지.’
엄청난 선수로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은 신인이 벌써부터 자만심에 빠져버린 것 같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오바 하는 것이었으면 좋겠군.’
자신의 생각이 틀렸길 바라며 손승민 감독은 그라운드 위로 시선을 옮겼다.
반면, 벤치에 앉은 김상훈은 허공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아오! 이찬수 선수 때문에 감독님한테 찍혔잖아요!”
- 그게 왜 내 잘못인데?
“이찬수 선수가 자꾸 말 걸어서 이렇게 된 거잖아요.”
- 그럼 승민이 형한테 가서 말해. 귀신이 된 이찬수가 자꾸 말 걸어서 그거 대답해준 거라고.
“아으! 진짜!”
- 크컄컄컄컄!
“진짜 한 번 날 잡아서 용한 무당한테 데려가든지 해야지······.”
- 무당한테 데려가도 내가 졸라 쎈 귀신이라 아무것도 못할걸? 그나저나 너 경기 집중 안 하냐? 벤치에 앉은 네 선배들은 열심히 경기를 보고 있는데, 신인 선수인 너는 무슨 래퍼마냥 혼자 계속 떠들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네?
“아오! 이제 말 걸지 마세요. 진짜 집중할거니까.”
- 예, 예~ 그러세요.
말을 마친 김상훈은 경기가 열리고 있는 전방을 바라봤다. 집에서 자료를 보고 분석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이렇게 실제로 경기를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상대 선수를 분석하는 것에 더욱 큰 도움이 된다.
김상훈은 그 사실을 알기에 서울과 포항의 경기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
오늘 서울 선수들의 의지와 열정은 대단했다. 수비수와 공격수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선수가 포항 선수를 강하게 압박했고, 공을 빼앗기면 빼앗긴 공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팀의 경기력 차이는 분명했다.
강팀인 포항과 약팀인 서울.
게다가 포항의 선수들 역시 홈경기이기 때문에 승리를 갈망하며 최선을 다해서 뛰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울 선수들의 얼굴에 점점 그늘이 드리워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직 전반전임에도 강한 압박을 꾸준히 하던 서울의 선수들은 눈에 띄게 지쳐갔다.
“신광희! 끝까지 쫓아가! 이웅, 네가 백업 해야지!”
결국 포항의 윙어인 이석훈를 서울의 풀백인 신광희가 놓쳐버렸다. 국가대표 출신이자 주장 완장을 차고 있는 서울의 중앙수비수 곽태현이 다급하게 수비조율을 시도했지만, 이미 코너킥 라인 근처까지 공을 몰고 온 이석훈은 중앙으로 쇄도하고 있는 포항의 공격수 레오를 향해서 빠른 크로스를 올렸다.
뻥-!
정확하게 날아오는 공을 188cm 장신의 레오는 놓치지 않고 이마를 가져다댔다. 곽태현이 다급하게 점프를 해서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파앙-!
장신의 공격수가 내리꽂는 헤딩슛은 불규칙한 바운드를 만들어내며 골키퍼가 막기 힘든 코스로 튀어 들어갔다. 서울의 골키퍼 유현수는 너무나 불규칙한 슈팅에 반응하지 못하고 멍하니 고개만 돌려 골대 안으로 들어가는 공을 바라만 봤다.
출렁-!
골을 넣은 브라질 용병 레오는 빠른 속도로 홈 관중들을 향해 뛰어갔다. 당연하게도 관중들은 포항 득점 1위 공격수인 그에게 뜨거운 환호성을 뿜어냈다.
- 역시 브라질 애들이 잘하네. 브라질 애들은 저렇게 멀대같은 애들도 신기하게 빠르고 발기술이 좋단 말이지. 근데 너네 어떡하냐? 분위기 완전 망했는데? 무슨 애들이 이미 진 것 같은 얼굴이야.
이찬수의 말대로 골을 먹힌 뒤, 서울의 벤치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본 김상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경기가 어렵게 흘러가네요.”
축 처진 김상훈의 어깨를 바라보던 이찬수는 신이 나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 슬슬 쫄리지? 아까 승민이 형이 후반에 너 넣을 수도 있다고 했잖아? 사실상 너한테는 이번이 진짜 중요한 경기인 거 알지? 데뷔전에 활약했던 네가 만약에 오늘 경기에서 죽 쑨다? 그럼 너에 대한 믿음이 그냥 박살나버리는 거야. 아! 김상훈 저 친구는 데뷔전에서 뽀록을 터트린 것뿐이구나! 라고 말이지.”
그 말에 김상훈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오히려 너무 흥분되는데요?”
- 뭐래? 이 변태자식은? 흥분이 왜 돼?
이찬수가 눈을 가늘게 뜬 채, 김상훈을 쳐다봤다.
“그렇잖아요. 이렇게 팀이 위기에 빠졌을 때, 저라는 영웅이 나타나서 팀을 구하는 시나리오! 캬~! 상상만 해도 간지나지 않아요?”
보통 선수라면 긴장감과 부담감으로 멘탈이 흔들릴 만한 상황.
반면에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김상훈의 모습에 이찬수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이거 진짜 미친 새끼네······.
***
서울의 필사적인 경기력에도 포항이 1점을 유지한 채, 전반전이 종료됐다.
사실상 전반전 내내 포항의 공격을 서울이 간신히 버티는 느낌이 강했다.
후반전이 시작되기 전, 서울의 라커룸에서 손승민 감독이 열변을 토하며 선수들에게 용기를 심어줬고 교체카드까지 써가며 변화를 꾀했지만 경기는 여전히 포항의 우세로 이어졌다.
‘결국 다시 너를 믿어보게 되는구나.’
후반 70분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손승민 감독은 김상훈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김상훈.”
“예, 감독님.”
손승민 감독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김상훈은 진지한 자세로 그의 말에 집중했다.
그 순간 팔짱을 끼고 있던 손승민 감독이 오른손을 뻗어 김상훈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자네, 나랑 약속하나 하지.”
“어어, 예! 말씀하시죠.”
멘탈이 강하고 쉽게 긴장하지 않는 김상훈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손승민 감독의 행동에 긴장감을 숨기지 못했다.
“절대로! 절대로 무리하지 말게. 더 이상 뛰지 못할 것 같으면 언제든 괜찮으니 코치진을 향해 신호를 보내게.”
“아······ 저번에 쓰러진 것 때문에····· 괜찮아요. 병원에서도 단순한 과로였고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어요.”
“약속하게.”
손승민 감독의 표정은 단호했다.
사실 이런 행동은 손승민 감독의 본 모습이기도 했다. 강렬한 카리스마 속에 숨겨진 선수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
그런 남자였기 때문에 서울의 선수들은 그를 믿고 고된 훈련을 소화하고 경기장에서 열정을 쏟았다.
- 이 양반은 변한 게 없네······. 사람 참 진국이라니까.
이찬수의 말이 들렸지만, 김상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손승민 감독의 눈을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절대로 무리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저도 다른 약속 하나 더 해도 될까요?”
더불어 하나의 약속을 더 제안했다.
그 제안에 손승민 감독은 흔쾌히 대답했다.
“말하게.”
그런 손승민 감독의 모습에 김상훈은 씨익 웃으며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경기, 무조건 골 넣겠습니다.”
그런 김상훈의 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온 것은 손승민 감독의 미소뿐이었다.
“그럼, 약속 하신 걸로 알고 골 넣고 오겠습니다.”
후반 70분, 김상훈이 투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