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호박에 줄 긋기
침대 위에 올라가서 무릎을 꿇은 남자, 김상훈은 스스로의 무릎을 탁-하고 내리쳤다.
“좋아! 결정해~쓰!”
그 말에 옆에 있던 이찬수가 곧바로 반응했다.
- 뭔데! 어떻게 하기로 한 건데?!
“아! 어차피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거고 레드 박스나 오렌지 박스에서 좋은 거 뜬 적도 있잖아요?”
- 그··· 건 그렇지.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고? 레드 박스?
“아뇨. 그래도 38600포인트나 있는데 레드 박스를 까는 건 좀 그렇잖아요? 오렌지 박스 정도는 까줘야지.”
- 그래. 그런 소탈한 모습 보기 좋다. 네가 언제 그린 박스 같은 걸 쳐다봤어? 암, 너한테는 레드 박스나 오렌지 박스가 딱이야.
“그 말 들으니까 그냥 그린 박스에 포인트 탕진하고 싶어지는데요?”
- 이런 청개구리 같은 새끼.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박스나 까. 졸라 궁금하니까.
“옙.”
대답과 동시에 김상훈은 반투명한 오렌지 박스와 레드 박스를 손가락으로 빠르게 누르기 시작했다.
[오렌지 박스를 구매하셨습니다.]
[오렌지 박스를 구매하셨습니다.]
[오렌지 박스를 구매하셨습니다.]
[오렌지 박스를 구매하셨습니다.]
[오렌지 박스를 구매하셨습니다.]
[오렌지 박스를 구매하셨습니다.]
[오렌지 박스를 구매하셨습니다.]
[레드 박스를 구매하셨습니다.]
[레드 박스를 구매하셨습니다.]
[레드 박스를 구매하셨습니다.]
총 7개의 오렌지 박스와 3개의 레드 박스를 구매한 김상훈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부자가 된 기분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박스 부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박수 하나는 기가 막히게 치죠. 그리고 이 박스들에서는 레전드 스킬과 히어로 스킬들이 나올 예정인데요! 자! 모두들 기대해주세요.”
기분이 너무 좋아진 나머지 텐션을 올려서 방송할 때와 비슷한 멘트가 튀어나왔다.
- 너 지금 뭐하냐? 왜 그러는 거야? 응? 왜 주접 떠는 거야?
“아니 왜 초를 치고 그래요. 기분 되게 좋았는데.”
- 어으! 이상하게 꼴 보기가 싫어. 이제 주접 그만 떨고 박스나 까시지 그러세요? BJ김상훈 씨?
“아~ 예.”
김상훈의 대답과 동시에 3개의 레드 박스가 먼저 돌아갔다.
[피지컬이 1만큼 상승합니다.]
[민첩이 2만큼 상승합니다.]
[몸싸움이 2만큼 상승합니다.]
- 괜찮네.
“나쁘지 않네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어찌됐건 영구적으로 능력치가 오르는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김상훈에게 필요한 능력치만 올랐으니까.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김상훈은 오렌지 박스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레드 박스 때보다 더 기분 좋은 효과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또로로롱!
[체력회복 물약(S)을 습득하셨습니다.]
[능력치 상승 양피지(B)]
[능력치 상승 양피지(B)]
[포인트 박스(G)]
[포인트 박스(G)]
[복불복 항아리(G)]
···.
“아······.”
- 크핰핰핰!
7개 있던 오렌지 박스를 6개까지 돌렸을 때, 김상훈의 입에서는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거의 다 이미 알고 있는 아이템들이었고, 처음 본 아이템인 복불복 항아리조차 골드(Gold)등급에 불과했으니까.
많은 박스를 까며 대박을 노렸지만 중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조차 나오지 않았으니까.
김상훈의 얼굴이 구겨졌다.
반면, 이찬수는 오랫동안 앓던 변비를 해결한 사람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 아~ 속이 다 시원하네!
“뭐가 그리 좋아요? 저기서 좋은 게 나올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아직 박스 하나 남았거든요?”
- 그래봤자 좋은 거 뜨겠냐? 걍 포기해.
김상훈은 계속해서 놀려대는 이찬수를 무시하며 오렌지 박스를 돌렸다. 이번에는 뭔가 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항상 마지막에는 좋은 게 뜨지 않았던가.
뾰롱뾰롱!
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회전하는 노란색 박스.
그 박스가 제자리에 멈춰선 순간!
김상훈의 눈앞에 보인 것은 하나의 매직펜이었다.
그 매직펜의 정체는.
[호박에 줄긋기!]
- 등급 : 조커(J)
- 효과 : 호박 같은 얼굴에 다섯 개의 선을 그리세요. 매력이 영구적으로 10만큼 상승합니다.
“오! 조커등급?! 아니 근데 효과가 이게······.”
매직펜처럼 생긴 아이템의 효과를 본 김상훈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고, 이찬수는 이미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 크핰핰핰핰핰! 으컄컄컄컄컄! 아이고~배야! 시스템도 네가 못생긴 걸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나봐. 아오! 너무 웃기네!
“이런 미친! 축구에 매력이 왜 필요한 거야? 아 솔직히 매력 능력치는 필요 없는 능력치 아니에요? 이게 왜 조커등급이지? 이해가 안 되네.”
- 왜 필요가 없어. 축구선수도 잘생긴 축구선수가 더 인기 많잖아. 실제로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잘생긴 축구선수를 선호하기도 했었고. 나를 봐봐. 내가 레알에서 뛰었을 때, 대표적인 꽃미남 선수였잖아?
“이찬수 선수, 미쳤어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찬수 선수는 2002년 월드컵 때 가장 못생긴 축구선수 2위로 뽑혔었고요. 레알에서도 이찬수 선수가 평균 외모를 다 깎아먹는다는 말 엄청 많았거든요?”
- 지랄하지 마.
“그러니까 도발 좀 하지마세요. 포인트 올인 한 결과가 이따위라서 지금 너무 예민하니까요.”
- 크흠! 그래도 일단 선은 그어보는 게····· 크흡!
“아이 씨!”
- 아아아아아! 미안하다. 아오! 아무리 그래도 스승한테 아이 씨라니······.
“후우······! 그래도 조커등급이니까 한번 써보긴 하는 게 낫겠죠?”
- 그치! 당연한 거지!
뽁!
김상훈은 곧바로 매직펜의 뚜껑을 열고 얼굴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 푸흐흐흐흐······.
옆에서 억지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하며 얼굴에 5개의 선을 긋는 것에 성공했다.
[매력이 10만큼 상승합니다. 외모에 변화가 생깁니다.]
“응?”
- 응? 뭐, 뭐야!
갑자기 얼굴에서 느껴지는 간질거림에 김상훈은 화장실로 달려갔다.
거울을 보자마자 보이는 훈남····· 까지는 아니지만 봐줄 만한 얼굴을 가진 남자가 보였다.
달라진 스스로의 모습에 김상훈의 눈이 커졌다.
“뭐, 뭐야! 진짜 이거 뭐야?!”
어느새 화장실까지 따라온 이찬수 역시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 야, 너··· 쪼금 덜 못생겨졌다?
“우와····· 이런 것도 되는구나. 뭐가 바뀐 건지 크게 티가 나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얼굴이 잘생겨졌네?”
- 아니, 말은 바로 해야지. 잘생겨진 게 아니라 덜 못생겨진 거야.
“아으, 알겠다고요!”
얼굴이 조금 나아진 채, 방으로 돌아온 김상훈은 나머지 아이템들을 바라봤다.
“일단 아이템 정리 좀 해야겠네.”
김상훈은 일단 박스를 까고 얻은 아이템들을 나열했다.
[체력회복 물약(S)]
[능력치 상승 양피지(B)]
[능력치 상승 양피지(B)]
[포인트 박스(G)]
[포인트 박스(G)]
[복불복 항아리(G)]
체력을 20만큼 회복시켜주는 체력회복 물약(S)은 일회성 아이템이지만 중요한 순간에 김상훈에게 큰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일단 체력회복 물약은 중요할 때 쓰는 걸로 하고······ 양피지부터 찢어야겠네.”
[능력치 상승 양피지]
- 등급 : 브론즈(B)
- 효과 : 양피지를 찢으면 1~5까지 랜덤으로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상승되는 능력의 종류는 랜덤입니다.
이미 사용해본 기억이 있는 아이템이었고 크게 능력치가 상승됐던 적도 없기에 김상훈은 조금도 기대하지 않고 양피지 2개를 찢었다.
찌익-!
[드리블이 5만큼 상승합니다.]
[슈팅이 3만큼 상승합니다.]
“오!”
양피지에서 나온 결과에 김상훈은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주 마음에 드는 결과였기 때문.
다음으로 그가 선택한 것은 10000포인트가 나온 적이 있는 포인트 박스였다.
대박이 터졌던 좋은 기억을 더듬으며 포인트 박스 2개를 동시에 돌렸다.
[100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700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 푸하하핫! 개 망했네?
“아오!”
포인트 박스를 까서 얻은 800포인트.
그 사실에 김상훈은 주먹으로 침대를 내리쳤다. 그만큼 속이 쓰렸다.
구매하려면 총 10000포인트가 필요한 오렌지 박스 2개에서 나온 것이 겨우 800포인트라니!
한숨을 푹푹 내쉬던 김상훈은 이윽고 마지막 남은 아이템을 바라봤다.
“복불복 항아리? 이건 처음 보는 건데······. 이찬수 선수는 본 적 있어요?”
- 아니, 나도 첨 본다.
처음 보는 아이템이었던 만큼 정보 확인이 필요했다.
[복불복 항아리]
- 등급 : 골드(Gold)
- 효과 : 하나의 능력치를 선택하면 복불복으로 -10이 되거나 +10이 됩니다.
-이거···· 좋은 거냐? 나쁜 거냐?
“글쎄요···· 저도 헷갈리네요.”
- 좋다고 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고, 또 안 좋다고 하기에는 능력치를 크게 높일 수 있고····· 모르겠다. 너 이거 쓸 거야?
김상훈은 고민에 빠졌다. 이찬수의 말처럼 복불복 항아리의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것이 문제였다.
잠시 후, 생각을 마친 김상훈이 이찬수를 바라봤다.
“결정했어요.”
- 뭐? 그거 쓰려고?
“예. 그래도 나왔는데 썩히는 것보다는 써보고 싶어서요.”
- 어떤 능력치로 하려고?
“음····· 체력?”
- 뭐? 너 미쳤어? 가뜩이나 지금도 체력이 부족한데, 그거 썼다가 체력이 더 떨어지면 어쩌려고? 넌 걍 망하는 거야.
“그렇죠? 저도 그냥 해본 말이에요. 그래서 오르면 좋고, 떨어져도 큰 타격까지는 아닌 능력치를 건드려보려고요.”
- 그게 뭔데?
이찬수의 질문에 김상훈은 씨익 웃으며 자신의 상태창을 가리켰다.
- 미친놈! 슈팅을 건드린다고? 그거 존나 위험한 도박인 거 알지?
“인생 뭐 있어요? 일단 질러보는 거지.”
- 야! 야! 너 진짜 좆되려고 그래? 안 돼! 딴 거 넣어!
계속해서 말려대는 이찬수를 무시한 채, 김상훈은 복불복 항아리에 넣을 능력치로 슈팅을 선택했다.
[복불복 항아리에 ‘슈팅’을 넣으시겠습니까?]
50% 확률로 능력치가 오를 수도, 낮아질 수도 있는 도박.
김상훈은 지금 이 순간, 도박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그래, 슈팅을 넣는다. 가보자고!”
- 너는 미친놈이야.
[복불복 항아리에 슈팅을 넣으셨습니다.]
[50% 확률로 능력치의 상승과 하락여부가 결정됩니다.]
[5····4·····3·····2·····1······.]
화려한 효과와 함께 항아리 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김상훈은 눈을 부릅뜨고 그 결과를 기다렸다. 그 역시 긴장하고 있었다.
아무리 멘탈이 강한 남자라고는 해도 그에게도 중요한 슈팅 능력치를 걸고 하는 도박이었다.
김상훈의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갔다.
이윽고 모든 빛이 사라지고 항아리가 형체를 감췄다. 그와 동시에 시스템이 결과를 알려줬다.
[축하합니다. 복불복 항아리에 들어갔던 ‘슈팅’이 +10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결과가 나옴과 동시에 김상훈은 양손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으아아아아악! 만세! 만쉐이! 됐다! 됐다고!”
심장이 쫄깃해지는 도박의 결과로 슈팅 능력치가 무려 10이나 올랐다.
그 결과에 김상훈은 스스로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 와····· 너 진짜 깡 좋다?
“휴····· 쫄려서 뒈질 뻔했어요.”
무려 38000포인트를 쓴 투자.
김상훈은 그 투자로 바뀐 능력치를 확인하기 위해 상태창을 오픈했다.
[김상훈]
- 키 : 179cm
- 주발 : 오른발
- 체력 : 62
- 민첩 : 57 ▷ 59
- 패스 : 65
- 슈팅 : 71 ▷ 81
- 개인기 : 70
- 헤딩 : 63
- 드리블 : 65 ▷ 70
- 피지컬 : 63 ▷ 64
- 몸싸움 : 64 ▷ 66
- 매력 : 48 ▷58
- 잠재력 : 83
- 스킬 : 정확한 슈팅(H), 무사 뎀벨레의 탈압박(G), 이찬수의 퍼스트터치(L), 캐논 슈터(G)
(세부능력치를 볼 수 있습니다.)
- 이야~ 슈팅 하나는 일류급 선수인데?
“능력치가 전체적으로 많이 올랐네요.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요.”
- 그래도 이 정도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 더 빡세게 해야지?
이찬수의 말에 김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올랐다고는 해도 이 정도 능력치는 K리그 선수들의 평균치도 되지 않는 낮은 능력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상훈은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서서 이찬수를 바라봤다.
- 왜? 안 자?
“자긴 뭘 자요. 훈련하러 가야죠.”
- 오올~! 그래, 오늘은 어떤 훈련을 해볼까?
“일단 빙의를 좀 실험해봐야겠어요.”
- 그건 내가 바라던 바지!
어두운 밤, 많은 사람들이 일과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지만,
두 남자의 훈련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K리그 개막전 이후 열리는 첫 경기는 바로 서울과 포항의 경기였다. 오늘 열리는 이 경기는 포항의 홈에서 열리는 경기라는 것을 증명하듯 포항 쪽 관중석이 가득 차 있었다.
반면에 서울의 관중석은 듬성듬성 빈공간이 보일 정도로 관중 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서울 선수들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원정 경기에서 관중석이 적은 경험은 항상 겪어왔던 것이다.
관중들이 적다고는 해도 자신들을 응원하러 멀리서 포항까지 와준 고마운 팬들이 있어 그들은 마음을 다잡았다.
라커룸에서 그런 선수들을 바라보던 손승민 감독의 표정은 비장했다.
전전 시즌, 전 시즌 모두 하위권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던 그에게 포항은 꼭 이기고 싶었던 상대였다.
그동안 포항을 이겼던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손승민 감독으로 하여금 승부욕을 더욱 불태우게 만들었다.
특별하게 뛰어난 스타플레이어는 없지만, 팀워크가 좋고 개개인의 능력이 전체적으로 좋은 포항은 강팀이었다.
3년째, 매 시즌 5위권에는 꼭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 이유였다.
승리를 다짐한 손승민 감독은 선수들을 무거운 시선으로 쭉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그가 입을 열자 선수들은 곧바로 하던 행동을 멈추고 손승민 감독을 바라봤다.
“전원 집중. 상대는 강력한 팀인 포항이다. 과거 우리는 포항에게 져왔다. 하지만 전부 과거일 뿐이다. 지금은 새로운 시즌이고, 나는 너희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만큼이나 너희들이 승리를 원했으면 좋겠다. 이상.”
믿고 따르던 감독이 승리를 갈망하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한 상황. 그런 감독의 모습에 서울 선수들의 의지가 더욱 강하게 굳어졌다.
“그럼, 나가자. 승리하러.”
말을 마친 손승민 감독의 시선이 라커룸의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벽을 보고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이 중요한 상황에 저 녀석은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손승민 감독의 눈썹이 역동적으로 휘어졌다.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다. 더군다나 딴 짓을 하던 남자는 입단한 지 얼마 안 된 신입 선수였다.
뚜벅-!
남자에게 다가간 손승민 감독이 물었다.
“자네, 지금 뭐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