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들린 축구선수-2화 (2/200)

2화 레드 박스(Red Box)

마스터리그는 11대 11로 붙는 일반적인 축구게임과는 달리 자신만의 선수 하나만을 컨트롤하고 키워서 최고의 축구선수로 만드는 컨텐츠였다.

자신만의 선수를 키울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마스터리그는 ‘오늘의 위닝’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컨텐츠였고, 김상훈의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도 김상훈이 마스터리그를 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마스터리그는 김상훈 또한 자주 즐기던 컨텐츠였다.

“맙소사······.”

그런 김상훈의 눈앞에 마스터리그의 화면이 펼쳐져 있었다.

평소와 같은 마스터리그 화면이었지만, 그는 평소처럼 플레이를 시작할 수가 없었다.

- 이야, 이거 진짜 신기하네? 내가 죽은 사이 이런 게 나왔어? 최소한 20년은 더 있어야 나올 줄 알았는데, 이게 그 가상현실게임 같은 건가? 근데 3D안경이나 VR없이도 3D로 보이네? 야, 그럼 이제 야동도 3D로 편하게 볼 수 있겠다?

옆에서 떠들어대는 이찬수의 행동에도 아무런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당황스러웠으니까.

평소 즐겨왔던 ‘오늘의 위닝’ 마스터리그가 모니터가 아닌, 자신의 눈앞에 홀로그램처럼 떠올라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스터리그의 시작화면에 생성되어있는 캐릭터는 분명 김상훈 자신이었으니까 말이다.

“휴······.”

방송용 방음부스 안에서 뒤로 젖혀진 의자에 거의 누워버린 김상훈은 지끈거리는 두통에 스스로의 관자놀이를 양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댔다.

꿈은 아니었다.

어디선가 들은 것처럼 손가락을 까딱여보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는 등, 꿈에서 깨기 위한 방법들은 다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 이런 건 얼마주면 살 수 있는 거야? 우와, 캐릭터도 너랑 아예 똑같이 생겼는데? 햐! 진짜 못생겼다. 그래픽은 또 왜 이렇게 좋아? 그냥 사진으로 찍어낸 수준이네! 야, 너랑 똑같이 생긴 캐릭터라고해서 능력치 사기적으로 올리고 플레이하는 거 아니지?

두통에 신음하던 김상훈의 귓속으로 어렸을 적 축구에 모든 것을 걸었을 때 그 누구보다도 존경을 했던 남자, 프리메라리가에서 최고의 축구선수로 꼽혔던 이찬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 이거 진짜 꿀잼이겠다. 나도 한 판 해볼 수 있을까? 나도 한 때 꽤 게임 잘했거든! 이거 ‘오늘의 위닝’ 맞지? 내가 또 이 게임은 기가 막히게 잘했거든. 내가 바르셀로나에 있었을 때, 하루는 메시가 그러더라고. 지가 바르셀로나에서 위닝을 가장 잘한다고. 그 말을 듣고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 당연히 한 판 붙자고 했지. 결과는? 5대 0. 말 그대로 5대 떡으로 발라버렸더니 그 다음부터 나를 졸졸 따라다니더라고. 귀여운 자식. 그래, 그래. 네가 생각하는 리오넬 메시 맞아. 그 자식 요즘엔 게임실력이 많이 좋아졌을라나? 하여튼, 그러니까 나도 한번 해보자. 아, 지금은 귀신이라 조이스틱을 못 만지겠구나. 그러면 아쉬운 대로 내 바지 속에 있는 매직스틱이라도 만지면서······.

어렸을 적, 김상훈에게는 만나보는 것만으로도 꿈만 같았을 것 같은 남자. 그런 남자가 바로 이찬수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우상과도 같았던 남자는 지금은 계속해서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투머치토커 귀신이었을 뿐이니까.

게다가.

축구는 지금의 김상훈에게는 아무런 의미조차 없는 무관심의 종목 그 자체였으니까 말이다.

“이찬수 선수.”

- 왜?

“축구 같은 것에 관심 없으니까 조용히 좀 해주시죠?”

- 왜 관심이 없어? 그러면서 축구게임은 왜 하는 거야?

“게임은 게임이니까요. 그리고 제 눈앞에 홀로그램처럼 떠 있는 건 게임 같은 게 아니에요. 현실이라고요. 게다가 이런 건 아직 발명되지도 않았어요. 그러니까! 지금 제가 머리 아파 죽겠으니까 제발 조용히 좀 해달라고요.”

- 아, 그러냐? 이게 게임이 아니라고? 그럼 좀 놀랐겠구나. 미안하다.

“됐으니까, 제발 조용히 좀 해주세요.”

이찬수, 그는 현역시절 ‘아시아의 베컴’이라는 멋진 별명도 가지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양아치’, ‘입찬수’, ‘혀찬수’, ‘개찬수’라는 별명들이었다.

그만큼 그는 거칠고, 험하고, 욕 잘하는 선수의 교과서라고도 할 수 있는 남자였다,

당연히 그는 김상훈의 말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 보자보자하니까 너 내가 좆밥으로 보이냐? 엉? 내가 누군지 몰라? 나 이찬수야, 이찬수! 그리고 아까 전화하는 거 들어보니까 너도 선출인 것 같은데, 결국 내 후배 아니야?

“제가 왜 이찬수 선수 후배에요?”

- 뭔 소리야? 선출이었다며? 일단 선수출신이면 너도 축구 좀 했던 놈인 것 같은데, 그런 놈이 내 후배가 아니고 뭐야?

“지금은 관뒀잖아요. 꼰대처럼 왜 그래요?”

- 허! 이 친구, 생각보다 더 대화가 안 통하는 친구네? 그래, 지금은 그만뒀으니까 후배가 아니라고 치자. 근데 머리 아플 게 뭐가 있다는 거야? 네 눈앞에 생긴 게, 좋은 거 일수도 있잖아?

“평생 안 보이던 것들이 갑자기 보이기 시작하는데 어떻게 머리가 안 아프겠습니까. 그리고 이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는 아직 모르잖아요. 되게 따갑기도 했고요.”

- 그러니까 알아보고 난 뒤에 짜증을 내도 늦지 않다는 거지. 가만 보자. ‘오늘의 위닝’은 맞는데, 그거 마스터리그 맞지? 나도 마스터리그 해봤는데, 그거 자신만의 선수를 키우는 거잖아? 그러면 그걸로 네 실제 능력을 키울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듣다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요······.”

- 거봐. 야, 마스터리그가 포인트로 랜덤박스를 사서 선수 능력치 올릴 수 있는 거 맞지?

“예, 그렇죠.”

- 그리고 내 기억에는 처음 마스터리그를 시작하면 상자 하나를 깔 수 있는 포인트를 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지?

“예 뭐, 그렇죠.”

- 그럼, 뭐가 걱정이야? 일단 상자 하나 까보고 생각하면 되잖아.

이찬수의 말에 김상훈은 자신의 눈앞에 떠있는 ‘위닝-마스터리그’를 바라봤다.

***

자신의 아파트 안에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김상훈은 조용히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 자꾸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야, 야! 자꾸 혼자만 들리게 말하지 말고 얘기 좀 해봐. 궁금하니까.

이찬수, 귀신이 되어버린 그의 말에 마침내 김상훈이 또박또박한 말로 말했다.

“이거, 게임이 아니라고요.”

- 엥? 생긴 건 마스터리그인데, 뭔가 다른 게 있어?

“예······.”

- 뭐가 다른데?

“게임을 돌릴 수가 없어요.”

- ·······그럼, 실제로 해야 한다는 거야?

“에휴, 그런가 봐요.”

1시간 동안 허공에 있는 홀로그램에 대해서 알아본 결과, 김상훈은 알 수 있었다.

이건 그동안 해왔던 위닝-마스터리그처럼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경기를 뛰어야 포인트를 벌고 능력을 올릴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말이다.

게다가.

[레드 박스 ▷ 1,000포인트]

[오렌지 박스 ▷ 5,000포인트]

[옐로우 박스 ▷ 10,000포인트]

[그린 박스 ▷ 20,000포인트]

[블루 박스 ▷ 40,000포인트]

[네이비 박스 ▷ 80,000포인트]

[퍼플 박스 ▷ 160,000포인트]

게임으로 즐기던 ‘마스터리그’랑은 많이 달라진 시스템이라는 것을 말이다.

- 원래 랜덤박스가 저렇게 여러 종류가 많았었나?

“아니요, 저도 처음 봐요.”

- 그치? 원래 그냥 랜덤박스만 있잖아. 저렇게 여러 종류가 아니고.

“예. 그래서 저도 적응이 안 되네요.”

- 포인트마다 나오는 게 다른가보네. 빨주노초파남보 순서인 것 같은데, 너무 유치한 거 아니야? 무슨 무지개도 아니고.

“어? 정말 무지개 색깔 순서네요. 빨주노초파남보······. 근데 처음이라고 레드 박스로 줬나 봐요. 좀 더 좋은 걸로 줬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짜네.”

- 그러니까. 너무 짜긴 하네. 무슨 소금도 아니고 말이야. 아, 이건 그냥 개드립이었으니까 넘어가자. 근데 그만 떠들고 빨리 박스 좀 까볼래? 궁금해서 미쳐버리겠으니까.

“떠드는 건 이찬수 선수가 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안 그래도 지금 까보려고 했어요.”

[레드박스를 오픈하시겠습니까?]

허공에 떠있는 ‘예’라는 버튼을 누르자마자 사각형의 빨간색 박스가 제자리에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 오, 오! 굴러간다. 뭐가 나올 거 같냐? ‘이니에스타의 탈압박’ 같은 게 나오면 대박인데.

득점왕 같은, 웬만한 선수들에게는 꿈과 같은 기록들도 너무 자주해서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았던 남자.

챔피언스리그 우승 정도는 해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던 남자.

그런 이찬수가 지금은 빨간색 박스가 제자리에서 빛을 뿜으며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잔뜩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런 게 나올 리가 없잖아요. 게다가 이건 레드 박스라고요. 제일 싼 거. 이런 거에서 어차피 별로 좋은 거 안 나올 거니까 흥분하지 좀 말아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이찬수에게 핀잔을 줬지만, 사실 김상훈도 지금 얼굴이 벌게진 채 흥분한 상태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눈앞에서 화려한 빛을 뿜어내며 김연아가 트리플악셀을 하듯 제자리 턴을 하고 있는 붉은 박스를 보면 누가 흥분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윽고 화려하게 턴을 하던 붉은 박스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