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95화
51. 외전. 언젠가 다시 만날 때까지(完)
어떤 게 효과를 볼지 몰라서 다 놓는 건가?
재인이 가슴을 두근거리며 지켜보는 동안 마법진 안의 파란 아우라가 마치 빵이나 케이크가 부풀어 오르듯 위쪽으로 둥글게 부풀어 올라왔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마법진 중앙을 응시하고 있는 청이의 눈에서 점점 더 금빛이 강해졌다. 뭔가 자신의 기운을 모두 마법진 안에 쏟아 넣고 있는 것 같았다.
둥글게 부풀어 오르던 아우라가 어느 순간 멈추더니 마법진 안쪽에 놓인 카이엔의 물건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카티야의 은화와 금화였다.
은화는 은빛으로, 금화는 금빛으로 미세하게 반짝이기 시작하다가 조금씩 빛이 더해졌다.
그에 반응하듯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독수리눈 영감에게서 구한 블랑셰의 회중시계였다.
뚜껑이 열린 채 놓여 있던 블랑셰의 시계가 누가 들고 흔드는 것처럼 달달 떨리기 시작하더니 멈춰 있던 바늘이 천천히 움직였다.
느릿느릿 돌기 시작하던 시곗바늘은 차차 속도가 붙으면서 빙글빙글 돌아가다가 점점 빠르게 회전했다.
그리고 카이엔에서 재인이 블랑셰에게 직접 받았던 회중시계의 바늘이 그 뒤를 따르듯 돌기 시작했다.
두 개의 시계는 마치 팽이처럼 바늘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정신없이 돌아가다가 한참 지난 후에야 조금씩 속도를 늦췄다.
두 개의 시계가 서로 시간을 맞추기라도 하듯 속도를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빙글빙글 돌아가다가 점점 느려지더니 마침내 회전을 멈추고 초침만 째깍째깍 정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메트로놈처럼 정확하게 울리는 초침 소리와 함께 두 개의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이 완벽히 일치했다.
“차원의 시간이 이어진 건가?”
명훈이 나직이 중얼거렸고 재인도 그 옆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카이엔과 지구는 시간의 흐름이 달랐는데, 두 개의 시계가 일치한 것이 뭔가 시간을 잇는 역할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시계가 흔들림을 멈추고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니콜레타의 영상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울 같은 표면이 조금씩 투명해지다가 다시 어두워졌다가 또 밝아지면서 뭔가 그림자가 맺힐 듯 어른거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뭔가 보일 듯 말 듯 한 영상에 애가 탄 재인이 마법진에 좀 더 가까이 갔다. 아실리도 어느새 마법진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선 채 뚫어져라 영상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여기까진가 봐요.”
청이가 크게 숨을 내쉬면서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청이의 눈에서 금빛이 서서히 사라지며 평소의 눈으로 돌아오는 것과 함께 마법진의 푸른 아우라도 불이 꺼지듯 은은하게 사라졌다.
“한 번에 연결은 안 되네요.”
청이가 시계를 집어 들어 다시 살펴보다가 재인의 손에 넘겨주었다.
“둘 다 잘 작동하고 있어요. 일단 시간은 이어진 것 같고요.”
소년은 아쉬운 듯 머리를 흔들었다.
“우리 엄마나 니베아라면 여기다 통로를 열 수 있었을 것도 같은데, 전 아직 그 정도 능력은 안 되나 봐요.”
청이가 미안해하는 얼굴을 보고 재인은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야. 시간을 이은 것만 해도 너무나 큰일을 해줬어요. 연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걸로도 너무너무 고마워, 정말 고마워요.”
청이는 생글 웃으면서 손에 쥐고 있던 푸른 비늘을 눈 위로 들어 올렸다.
제 얼굴을 다 가릴 정도로 큰 비늘을 가면처럼 얼굴 앞에서 움직이며 청이가 말했다.
“원래는 이 비늘을 드리고 가려고 했어요. 카이엔과 연결이 되면 그쪽 모습을 이 비늘을 통해 보게 하려고요. 전에 우리 명훈 형도 이렇게 비늘을 통해 다른 세계의 모습을 본 적이 있어서.”
비늘을 내린 청이가 마법진이 있던 자리에 놓인 영상구를 가리켰다.
“그런데 재인 형님에겐 저 영상구가 더 나은 것 같아요. 카이엔에서 온 물건이라 그런지 영상구가 반응하는 걸 보니까 그쪽으로 집중하는 게 더 좋겠어요.”
청이는 작은 손을 들어서 어른처럼 재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시계도 은화도 영상구도, 바로 반응하는 걸 보면 카이엔에서도 누군가가 재인 형을 생각하고 있어요. 재인 형과 연락하고 싶어서 힘을 쓰고 있고요. 조만간 꼭 서로 이어질 수 있게 될 거예요. 힘내세요!”
* * *
명훈과 청이가 와서 시간을 이어주고 간 지도 사흘이 지났다.
오후부터 조금씩 비가 내리더니 밤이 되어도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빗소리가 계속 들렸다.
오늘따라 일찍 잠들었던 재인이 한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었다.
“포이야아.”
통통한 배를 재인의 목에 걸치고 얼굴을 그의 뺨에 올려놓은 채 도롱도롱 코를 골고 있던 포이가 재인이 밀어내는 바람에 베개 위로 떨어졌다.
끼이잉 울며 재인의 몸 위로 도로 올라오려는 포이에게 팔베개를 해주던 재인이 중얼거렸다.
“꿈이었나? 메밀꽃밭에 달이 환했는데.”
옆에서 자고 있던 아실리가 잠에 취한 소리로 고르릉 목을 울리면서 앞발로 재인의 옆구리를 토닥였다.
-꿈이야, 오늘 비 와서 달 안 보여.
“으응.”
포이를 껴안은 채 돌아누우려던 재인이 눈을 비볐다.
“아직 꿈인가? 저기 달이…….”
-응?
창가에서 달이 빛나고 있었다.
“아니야, 달 아니고.”
잠이 깨어 버린 재인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창가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것은 달이 아니고 니콜레타의 영상구였다.
“저거, 저거!”
재인이 고꾸라지듯 침대에서 뛰어 내려가 영상구를 손에 들었다.
-제이든, 목에서도 빛이 나!
역시 잠에서 깬 아실리가 눈을 크게 뜬 채 재인의 목을 향해 앞발을 흔들었다.
“응?”
재인이 머리를 숙여서 가슴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목에 걸고 있던 카티야의 은화에서도 빛이 나고 있었다.
“아, 이어졌다!”
은화와 영상구에서 번져 나오는 빛이 서로 끌어당기듯 한 줄기 실처럼 이어졌다.
끊어질 듯 흔들리던 빛의 실이 조금씩 굵어졌다.
영상구의 표면이 투명해지면서 뭔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치지직!
영상구에서 뭔가 갈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거 깨지는 건 아니겠지?
당황한 재인이 영상구를 쓰다듬는데 영상구 안에서 모기처럼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든, 소리가 났어!
“응, 나도 들었어.”
재인이 영상구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대는데 갑자기 소리가 툭 터져 나오는 바람에 놀라서 영상구를 떨어뜨릴 뻔했다.
-이거, 연결된 거 아니냐?
-글쎄요. 뭔가 보이긴 하는데.
-제이든, 거기 있니?
-시간이 이어진 건 확실하지요?
몇 사람이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두서없이 얽히더니 갑자기 영상구가 확 밝아졌다.
-됐다, 됐어! 저쪽 세상이야!
영상구가 정신없이 어른거리다가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이든, 제이든이니?
주름진 얼굴이 활짝 웃었다.
-제이든, 잘 지내고 있니?
“니콜레타 님!”
“야아웅!”
“포잇!”
제이든이 반가움에 영상구를 끌어안을 뻔했고 아실리와 포이까지 팔짝팔짝 뛰었다.
-그래, 그래, 우리 예쁜이들도 무사히 잘 있구나. 걱정했는데.
니콜레타가 영상구 너머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이마의 땀을 씻었다.
-아, 정말 힘들었다. 제이든, 시계는 받았니?
“예. 아, 그 시계 그쪽에서 보내주신 건가요?”
-그럼, 너랑 연결하려고 얼마나 애를 많이 썼는데.
니콜레타가 정말 힘들었다는 듯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카티야 님과 엘리미네온 님이 도와주셨단다. 그런데도 너랑 연결이 닿지 않아서 실망했는데 며칠 전에 그쪽 차원의 누군가가 시간의 흐름을 이어주는 바람에 나머지 일은 우리가 할 수 있었어. 그분께 고맙다고 전해 주렴, 자, 레노아, 너도 인사하렴.
-안녕하세요. 제이든 씨.
영상구에 레노아의 얼굴이 비쳤다.
“아, 레노아 씨, 정말 반가워요!”
여러 번의 사건에서 함께 일했던 레노아의 얼굴을 보자 정말 카이엔과 연결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잘 지내시죠? 저는 잘 있어요. 이쪽에서도 감정사 일을 시작했어요.”
레노아와 잠시 안부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니콜레타가 누군가를 데려온 모양이었다.
-자, 자, 인사하세요.
영상구가 순식간에 환해졌다.
옅은 금빛 테두리를 두른 보랏빛 눈동자가 영상구 안에서 몇 번 깜박였다.
-제이든?
재인이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숨을 들이쉬고 입을 열었다.
“카티야 씨…….”
영상구 안의 카티야가 조금 멋쩍은 듯이 웃었다.
-아, 정말 제이든이네.
“…….”
말을 잇지 못하고 서로 미소만 짓는 두 사람의 뒤에서 니콜레타가 끼어들었다.
-제이든, 카티야 님께 감사해라. 카티야 님이 안 계셨으면 연결 못 했어.
“아, 네. 감사합니다. 카티야 씨.”
카티야가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준 은화를 소중하게 보관해 준 덕분이지. 내 물건이 없었으면 연결이 어려웠을 거다. 잘 지내는 걸 알았고 얼굴도 봤으니 됐다.
옆으로 빠지려던 카티야가 깜박했다는 듯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아 참, 네 고양이에게 전해주렴. 숨겨진 계곡의 집은 엘리미네온 님이 잘 관리하고 계신다.
“야아옹!”
아실리가 자신도 모르게 기쁨의 탄성을 터뜨렸다.
말은 안 해도 아실리가 세시온의 집과 유품을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을 아는 제이든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그래, 언젠가 다시 올 때까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도록 잘 지켜준다고 하셨다.
영상구가 구름에 가린 달처럼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 이제 연결이 끊어지려고 한다.
카티야가 영상구를 니콜레타에게 떠밀었는지 니콜레타와 레노아의 얼굴이 휘리릭 지나갔다.
-잘 지내거라, 제이든, 또 보자……, 언젠가는 통로를…….
니콜레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은은히 울리며 사라져 갔다.
“아, 사라져 버렸네.”
“포이잉.”
-그래도 연락이 됐어. 엘리미네온 님이 세시온의 집을 지켜주신다니.
“잠깐이지만 얼굴 보고 말이라도 나눌 수 있어 정말 좋다. 다음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한 번 연결이 됐으니 또 기회가 있겠지.”
제이든은 뿌듯한 마음으로 빛이 사라진 영상구를 오래오래 쓰다듬었다.
* * *
“미야아옹!”
문 위에 달려 있는 고양이 모양의 놋쇠 장식이 울었다.
골동품상 문을 열고 들어오던 소녀가 문 위를 쳐다보며 생긋 웃었다.
“보통 풍경이나 종을 달지 않아요?”
“마녀의 골동품상에는 고양이가 어울리지. 어쩐 일인가, 아카디아 양?”
“포니라고 불러 주세요.”
몇 년 사이에 훤칠하게 키가 자라서 제법 아가씨 티가 나는 포니가 골동품상 안쪽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무릎에 담요를 덮은 채 차를 마시고 있던 니콜레타가 대견하다는 듯 소녀를 보았다.
“그래, 포니 양이 올해 마탑의 시험에서도 수석을 차지했다는 말은 들었네. 정말 대단해.”
포니가 배시시 웃으며 니콜레타의 옆에 앉았다.
“따로 연구하는 마법도 있다면서? 수준이 높다고 들었는데.”
니콜레타가 손녀딸 다독이듯 포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포니가 눈을 반짝였다.
“예, 차원의 통로를 여는 마법을 연구하고 있어요!”
“호오, 친구를 만나고 싶어서?”
“그럼요! 언젠가 꼭 포이를 만나러 갈 거예요!”
씩씩하게 외친 포니가 니콜레타의 무릎담요를 잡고 흔들었다.
“그러니까, 니콜레타 님, 저 좀 도와주세요. 레노아 언니에게 들었는데, 신수 님과 연락이 되신다면서요. 제이든 아저씨랑 친분이 있는 신수라고.”
“으흠, 음.”
“아이 그러지 마시고 저한테도 소개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차원의 통로 연구에는 신수 님의 힘이 꼭 필요해요.”
“아이고 그만 흔들어라, 먼지 난다. 늙은이 어지럽다.”
포니가 담요를 흔들던 손을 멈추고 니콜레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언제가 되든 간에 꼭 이 연구를 완성할 거예요. 하지만 그전에 내가 할머니가 되면 안 되는데.”
포니는 다시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니콜레타 님, 카이엔에 신수가 있는 것처럼 포이가 간 곳에도 신수가 있다면서요? 어쩌면 저보다 그쪽에서 먼저 통로를 열고 카이엔으로 올 수도 있겠지요? 그렇죠?”
“…….”
“그렇죠? 제이든 아저씨랑 아실리, 그리고 포이가 카이엔에 돌아올 수도 있겠죠? 그걸 바라는 사람이 저 혼자만은 아닐 거예요. 그렇죠? 솔직히 말해 보세요. 니콜레타 님도 보고 싶죠? 제이든 아저씨랑 아실리랑 포이랑!”
니콜레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름 잡힌 눈에 웃음을 머금고 포니의 머리를 쓸었다.
“물론이지,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깊으니 조만간 만나게 될 거다. 꼭 만나게 될 거야.”
골동품상의 가장 안쪽, 별 무늬 마법진이 그려진 방, 니콜레타와 포니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마법진에 은은한 무지갯빛 아우라가 떠올랐다.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외전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