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94화
50. 외전. 구름 동물병원(4)
신수가 될 뻔했던 고양이와 한때 신수였던 고양이는 나란히 앉아서 은근히 자기 고양이 자부심을 보이는 두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명훈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명훈 역시 재인과 마찬가지로 차원 이동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럼 혹시 연명훈 작가님도 카이엔에?”
“아니, 아닙니다. 저는 다른 곳이었어요.”
지구에서 건너갈 수 있는 다른 차원은 카이엔 외에 다른 곳도 있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은 저 혼자뿐일 줄 알았는데, 연명훈 작가님의 차원 이동 이야기는 제가 겪은 것보다 더 흥미진진하네요.”
“예. 금기가 있어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일단 뼈대는 이렇습니다.”
재인과 달리 명훈에게는 이야기하면 안 되는 금기가 좀 있는지 무척 조심해 가면서 말을 하고 있었다.
아실리는 뭔가 고르릉거리며 백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계속 재인에게 붙어 있던 포이도 어느새 고양이들 옆에 가서 알찐거리는 중이었다.
백호가 귀엽다는 듯이 포이의 이마를 한 번 핥아 주었다.
‘그러니까 저 백호는 진짜 신수였구나. 우리 세상의 신수.’
연명훈은 재인처럼 차원 이동의 경험이 있었고, 하나의 커다란 임무를 완수해야 했었다.
“우리 백호가 마지막 순간에 도와주지 않았다면 임무 완수는커녕 살아남지도 못했을 거예요.”
명훈은 정이 담뿍 담긴 눈길로 백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백호는 그때 금기시된 힘을 쓰는 바람에 신수의 자격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본체가 소멸되는 걸 감수했어요. 고양이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게 천운이죠.”
재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명훈의 이야기는 자세한 내용을 뺀 대략적인 줄거리였지만 재인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라 충분히 공감이 갔다.
우리 아실리는 날 위해 자기 세상의 신수가 될 기회를 포기했고, 백호는 연명훈 작가를 위해 신수였던 자신이 소멸되는 걸 감수했었구나.
“그래도 명훈 작가님은 그쪽 세상과 여기를 계속 왔다 갔다 하셨다고 하니 저처럼 돌아오지 못할까 봐 걱정은 않으셨겠네요.”
재인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저는 명훈 작가님처럼 차원을 이어주는 통로가 없었습니다. 평생 카이엔에 머물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가족도 만나지 못하는 건가 싶었거든요.”
“그러셨군요. 많이 불안하셨겠습니다.”
“카이엔에서는 집에 돌아와야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는데, 정작 집에 돌아오고 나서는 또 카이엔이 그립고 지인들의 안부가 궁금하고 그러네요. 우리 아실리의 고향이기도 하고, 아실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남긴 것들도 모두 거기 있고요.”
재인은 아련한 눈빛이 되어 목에 걸린 카티야의 은화를 만지작거렸다.
“연결이 완전히 끊겼다고 생각했을 때는 또 한바탕 꿈처럼 잊을 수 있을 것 같더니, 연결할 방법이 있다 싶으니까 자꾸 생각이 나거든요. 아까 말씀드렸던 시계가 뭔가 매개체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
“가릉빈가도 그 후 다시는 꿈에 나오지 않고, 우리 아실리가 말은 안 해도 고향이 그립지 않을 리가 없는데.”
세시온과 아실리의 집과 추억도 그리울 테고.
“명훈 작가님은 다녀오셨던 이세계와 연락이 된다니 부럽습니다. 혹시 저도 그런 방법이 가능할지 도움 주실 말씀 같은 건 없을까요?”
재인의 말을 들은 명훈이 백호를 바라보자 백호가 뭔가 몇 마디 야옹거렸다.
아실리와 명훈은 알아들은 모양이지만 재인은 백호의 말을 들을 수 없어서 명훈을 쳐다보았다.
“카이엔에서 건너온 시계를 가지고 계신다면서요. 그걸 보여 주시면 혹시 방도가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명훈이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백호는 신수의 힘을 잃었지만, 그런 걸 물어볼 만한 다른 사람, 아니, 다른 존재를 알거든요.”
* * *
며칠 후, 고려 시대의 유물 감정을 의뢰받아 관련 서적을 조사하고 있던 재인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명훈 형님.”
재인과 명훈은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급속히 가까워져서 형님 아우 하는 사이가 되었다.
-재인아, 그 시계에 대해서 좀 알아낸 게 있어서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혹시 카이엔에서 가져온 다른 물건도 있어?
“예. 많지는 않지만 두어 가지 더 있어요.”
-음, 그러면 내가 너희 집으로 갈게. 언제 가면 좋을까?
“제가 지금은 도서관에 있는데 오늘 오후 시간이면 아무 때나 괜찮아요. 한 시간쯤 뒤에 뵐까요?”
지난번 명훈의 집에서 이야기를 나눈 후 재인은 블랑셰의 시계를 명훈에게 맡겼었다.
명훈이 그 시계를 보여 주고 차원 이동에 관해 조언을 들을 곳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함부로 이야기할 대상은 아닌지 자세히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라는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연명훈은 모든 동물과 소통을 할 수 있는 것 같았고, 백호 역시 고양이로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사신수 중 하나인 진짜 백호였다는 말을 들었으니, 어쩌면 이 땅의 신수 중 도움을 줄 만한 존재와 소통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재인은 보던 책을 정리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카이엔에서는 어디든 아실리와 포이를 데리고 다닐 수 있었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동물을 데리고 출입할 수 없는 곳이 많았다.
어디든 재인과 함께 가는 것이 익숙했던 아실리와 포이는 재인이 외출할 때 집에 남아 있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오늘도 포이가 뾰로통해 있을 걸 생각하며 재인은 손님 대접용 다과를 좀 사면서 아실리와 포이가 좋아하는 간식 몇 가지도 함께 사서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포잉, 포이잉!”
집에 들어오자마자 포이가 앞발을 들고 깡충거리며 매달렸다.
-왜 나 안 데리고 갔어!
“도서관에는 동물을 데리고 갈 수 없어서 그래, 미안.”
-전에는 같이 갔잖아.
“그때는 카이엔 도서관이니까 그렇지. 여기선 안 돼. 자, 간식 먹을까?”
아실리와 포이에게 간식을 준 재인은 얼른 어질러진 집 안을 정리했다.
“손님 오실 거니까 청소 좀 해야지.”
-손님? 누구? 명이?
“아니, 명훈 형님이랑 백호 올 거야.”
-우왕, 백호! 실리, 백호 님 온대!
포이는 나름대로 뭔가 느끼는 게 있는지 백호를 무척 존경하는 것 같았고 혼자 말할 때도 꼭 백호 님이라고 불렀다.
“응, 도서관에 있을 때 전화 왔는데 그 시계에 대해 뭔가 알아낸 게 있나 봐.”
-그 시계 안 가잖아?
포이가 청소하는 재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종알거렸다.
재인에게는 블랑셰 뒤포르가 만든 시계가 두 점 있다.
카이엔에서 블랑셰에게 직접 선물로 받은 회중시계와 한국에 돌아온 후 독수리눈 영감에게서 입수한 회중시계인데 둘 다 이쪽 세상에서는 작동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차원 간 시간의 흐름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명훈에게 맡긴 것은 독수리눈 영감에게서 받은 시계였다.
-딩동댕동!
인터폰에서 오르골 소리가 울렸다.
“아, 왔다.”
이동장을 든 명훈의 뒤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누구지? 한 명 더 왔는데?”
명훈과 함께 온 사람은 열두어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어딘가 유럽계 혼혈이 아닌가 싶은 이목구비인데 머리가 파란색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요즘이야 아이돌 가수들 영향으로 분홍 머리, 노란 머리, 파란 머리 등을 한 십 대나 이십 대들을 흔히 볼 수 있지만 소년의 파란 머리는 색이 곱기도 하지만 아주 자연스러웠다.
소년을 보면서 피니어스의 남색 머리를 떠올렸던 재인이 얼른 문을 열었다.
“형님, 어서 오세요.”
명훈이 집 안으로 들어오며 소년을 소개했다.
“내 동생인데, 청이라고 해.”
한눈에 보아도 친동생은 아닌데, 소년이 들어오자마자 아실리와 포이가 흠칫하는 걸 보니 평범해 보이진 않았다. 아마도 이세계에서 사귄 동생인가 보다.
명훈이 어떤 부분에서는 말할 수 없는 금기가 있다는 것을 재인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기 때문에 더 이상 묻지 않고 명훈과 소년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안녕하세요.”
붙임성 좋게 인사한 소년이 아실리와 포이를 보며 활짝 웃었다.
“와! 말은 들었지만 정말 우리 백호 형아를, 아니 백호를 닮았네요. 그리고 토끼는……, 응? 뭐라고?”
포이가 앞발을 모은 채 포잉포잉 자기소개를 하자 귀를 기울이던 소년이 생글 웃었다.
“그래, 그랬구나? 난 그냥 청이라고 부르면 돼. 원래는 다른 이름이지만 그 이름은 너무 튀거든.”
저 아이도 동물의 말을 알아듣나 보네.
주방에서 다과를 가지고 나온 재인은 아실리와 포이를 보며 머리를 갸웃 기울였다.
명훈을 따라온 아이는 밝고 상냥해 보였지만 낯선 사람이라 그런지 아실리와 포이가 다소 긴장한 듯 보였다.
백호보다도 청이를 더 어려워하는 것 같네?
“자, 그럼 시계 얘기를 해 볼까?”
명훈이 품속에서 재인이 맡긴 시계를 꺼내 들며 청이에게 눈짓하자 주스를 한 모금 마신 청이가 입을 열었다.
“가릉빈가라는 신수가 차원의 시간을 잇는 매개체에 대해서 힌트를 줬다면서요. 저는 사실 백호 형아 말고는 이 땅의 신수를 모르거든요. 하지만 차원 연결에 대해서는 우리 엄마가 잘 아시기 때문에 이 시계를 우리 엄마한테 가져다 보여드렸어요.”
-어머니요?
아실리가 놀란 듯 물었고 청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응, 근데 내가 먼저 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어. 이쪽 세상에서는.”
청이는 시계를 만지면서 재인에게 물었다.
“이 시계 말고 카이엔에서 가져온 거 또 있어요? 있으면 볼 수 있어요?”
블랑셰의 시계, 니콜레타의 영상구, 세시온과 아실리의 그림까지 살펴본 청이가 자그마한 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 백호를 향해 말했다.
“좀 약한데. 저쪽 세상에서 누군가 공명해 줄 만한 물건이 있으면 좋겠는데.”
-내가 너희 엄마랑 공명했을 때처럼 말이지?
“응!”
명훈의 경우 차원의 통로가 처음 열렸을 때 차원을 이동해 온 것은 명훈이 아니라 청이라고 했다.
저쪽 세상에서 누군가 차원의 통로를 열 때 그와 공명해 문을 연 것은 백호고.
-그때는 내가 신수의 힘이 있었으니까 이쪽에서 공명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힘이 없어.
백호가 앞발을 핥으며 아실리를 힐끗 보았다.
-이 친구나 나나 지금은 둘 다 고양이인걸.
백호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던 아실리가 갑자기 재인을 쳐다보았다.
-제이든, 그거 있잖아. 그거!
“뭐?”
제이든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아실리가 뒷발로 일어선 채 재인에게 앞발을 흔들었다.
“그거, 은화! 목에 걸린 거!”
“아!”
카이엔에서 가져온 물건을 다 꺼내 놨다고 생각했는데 목에 걸고 있던 카티야의 은화는 잊고 있었다.
재인이 목덜미에 손을 넣어 웃옷 안에서 은화를 꺼냈다.
카이엔에서는 은화만 목에 걸고 금화는 따로 보관했었는데 차원을 넘어온 이후로는 금화를 숨길 필요가 없어서 두 개 같이 꿰어서 목걸이처럼 안쪽에 걸고 있었다.
겹쳐진 은화와 금화가 딸그랑 소리를 내며 탁자 위에 놓이자 청이의 눈이 반짝였다.
“이거, 신수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청이가 카티야의 은화와 금화를 손에 들고 들여다보는데 눈빛이 점점 금빛으로 변하는 게 보였다.
“이거면 될 거 같아요.”
청이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일어서서 거실 한복판으로 갔다.
“엄마한테 열심히 배워 오긴 했는데, 처음 해 보는 거라 잘 될지 모르겠네. 이런 건 니베아가 잘하는데.”
중얼거리던 소년은 재인을 보며 또 생글 웃었다.
“아, 니베아는 제 친구 이름이에요. 마법 술식 계산이나 진 그리는 걸 아주 잘하거든요.”
소년은 주먹을 꼭 쥐어 보였다.
“그치만, 나도 잘할 수 있어요!”
청이는 비장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뭔가 푸르게 빛나는 것을 꺼내더니 거실 한복판에 둥글게 원을 그렸다.
청이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어른 손바닥 두 개를 합친 정도 크기의 비늘이었다.
저렇게 큰 비늘을 가진 물고기가 있나?
재인이 바라보는 동안 청이가 은청색으로 빛나는 비늘로 원을 그리자 그 원 안쪽의 공간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형아, 그거 좀 갖다줘. 은화랑, 영상구랑, 시계.”
명훈과 재인이 일어나기도 전에 아실리와 백호가 먼저 은화와 시계를 물고 갔다.
푸르게 빛나는 마법진 가운데에 영상구를 놓고, 그 옆에 블랑셰의 시계 두 개를 나란히 놓은 청이가 마지막으로 카티야의 은화와 금화를 올려놓았다.
마법진의 푸른 아우라가 그 모든 것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