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93화
50. 외전. 구름 동물병원(3)
아실리와 포이의 말을 들은 재인은 놀란 얼굴로 연명훈이 들어간 진료실 안쪽을 쳐다보았고, 하늘이는 흥분해서 냥냥거리며 재인에게 가까이 왔다.
-저기요. 저기, 내 말도 들려요? 보호자님, 제 말 들리세요?
병원 고양이 생활이 오래되어서 그런지 마치 병원 직원 같은 말투를 쓰는 하늘이에게 아실리가 냐아옹 대꾸했다.
-제이든은 우리 말밖에 못 들어. 다른 동물의 말은 못 알아듣는다고. 아까 그 사람은 자기가 키우지 않는 동물의 말도 듣는 거야?
-아아 그렇구나.
앞발을 달싹거리며 재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려던 하늘이는 흥분했던 게 좀 부끄러웠는지 얼른 발을 내리면서 우아하게 자세를 고쳤다.
-우리 명훈샘은 모든 동물이랑 말이 통하거든. 그래서 병원에 오는 아픈 동물들에게 큰 도움이 돼. 어디가 불편한지 이야기를 잘 듣고 원장님한테 전해 주니까.
-그렇구나, 정말 대단한데! 난 제이든이 포이랑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만도 굉장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사람이 또 있다니!
아실리가 감탄하면서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자 하늘이가 앞발로 기다란 수염을 쓸었다.
-나도 명훈샘 외에 또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이 나타날 줄은 몰랐어. 네 보호자가 자기가 키우는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굉장하다고 생각해.
두 마리의 고양이가 서로 냥냥거리고 귀와 수염을 쫑긋거리는 걸 보면서 재인은 당황한 가슴을 가라앉혔다.
“실리, 무슨 얘길 그렇게 열심히 해?”
아실리가 재인 쪽으로 돌아앉았다.
-저 하얀 고양이가 그러는데, 아까 그 사람은 모든 동물과 말이 통한대. 진짜 굉장하지? 그런 사람이 있다니, 마법 같은 게 없어 밋밋할 줄 알았는데 이쪽 세상도 얕볼 게 아니네!
-이쪽 세상?
아실리의 말을 듣고 있던 하늘이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금빛 눈 안에서 가늘어진 검은 동자가 이채를 띠고 반짝 빛났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말이 길어질까 봐 아실리가 고개를 저었지만 하늘이는 일어나서 아실리의 곁으로 오더니 이동장 문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냄새는 그냥 고양이랑 토끼 냄샌데……, 저기, 아실리, 너 혹시 다른 세상을 알아?
하늘이의 금빛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초롱초롱해졌다.
-어, 음…….
이런 걸 함부로 말해도 되나? 아니 말한다고 고양이가 알아듣기나 하겠어?
저도 사실 고양이면서 아실리가 머뭇거리는 동안 포이가 머리를 쏙 내민 채 코를 오물거렸다.
-응, 우린 다른 세상에서 왔어!
-포이, 고양이는 그런 거 못 알아들어.
아실리가 포이에게 말했지만 하늘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구나.
크게 놀라는 것 같지 않은 하늘이를 보며 아실리가 더 놀랐다.
설마, 하늘이도 다른 세상을 아는 건가?
-제이든, 이 문 좀 열어 봐, 나 쟤한테 뭐 좀 물어봐야겠어.
궁금해진 아실리가 하늘이에게 뭔가 더 물어보려고 재인을 쳐다보는데 접수처에서 재인을 불렀다.
“아실리와 포이 보호자님, 1진료실로 들어가세요.”
재인이 이동장을 들고 일어서자 하늘이가 이동장을 향해 재빨리 냥냥 울었다.
-명훈샘네 집에 너 닮은 고양이가 있어, 백호라고. 나중에 걔를 꼭 만나 봐. 할 이야기가 많을 거야.
하늘이는 잠깐 망설이다가 흔들리며 멀어지는 이동장을 향해 미야옹 말을 덧붙였다.
-청룡이라는 친구한테도 한번 이야기를 들어 보면 좋을지도.
* * *
구름 동물병원의 원장은 삼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단발머리 여자였는데 명훈과 많이 닮았다.
원장은 상냥했고 동물을 다루는 손길도 능숙했는데 포이를 살피면서 다소 묘한 표정이 되었다.
“무척 독특한 생김새의 토끼네요. 언뜻 보면 라이언헤드 블랙마스카라처럼 보이지만 몸의 형태가 라이언헤드와는 좀 다르고…….”
“예, 저도 잘 모르지만 믹스인가 봅니다. 길에서 구조한 토끼라 자세히는 몰라요.”
“네에.”
“생김새가 조금 특이하지만 보통 토끼와 다른 점은 없습니다. 영리하고 사람도 잘 따르고.”
혹시 원장이 의심스럽게 여길까 봐 괜히 가슴이 찔린 재인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자 원장은 재인의 눈을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괜찮습니다. 손님, 이래 봬도 제가 별의별 특수동물을 다 진료해 봤답니다.”
그래도 포에니 토끼를 진료해 보신 일은 없으실 텐데요. 신수가 되려다 만 고양이도 그렇고.
-나 이 원장님 좋아, 아우라가 있어. 느낌이 좋은걸.
-나도, 나도.
아실리와 포이가 좋아하는구나, 다행이다. 좋은 병원을 찾은 것 같아.
재인은 아이들의 반응을 보며 안심하고 원장을 향해 마주 웃어 보였다.
원장은 능숙하게 아실리와 포이의 진료를 마치고 건강 상태와 주의할 점 등을 알려준 뒤 재인에게 말했다.
“접수처 가시면 아이들 건강수첩을 만들어 줄 겁니다. 그런데, 일러스트 작가님이라면서요? 제 동생의 작품 표지 작업을 해주셨다고 들었어요.”
“예. 저도 동생분 글 애독자라서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좋은 인연이라 더 반갑습니다. 아실리와 포이에게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언제든 데리고 오세요. 정성껏 봐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 동생이 작가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답니다. 요 옆 2진료실이 비어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아, 네.”
재인도 연명훈과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지만 대기실에서는 아무래도 다른 손님이 들어올 수도 있어서 빈 진료실이 나을 것 같았다.
옆 진료실에 들어가자 연명훈이 얼른 일어나며 그를 맞았다.
“차 드시겠습니까? 커피나 녹차?”
“커피 주십시오.”
“예,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진료실을 나갔던 연명훈은 금방 쟁반에 커피 두 잔을 받쳐 들고 돌아왔다.
잠시 말없이 커피를 마시며 탐색하듯 서로를 살피는 청년들을 향해 이동장 안에서 고양이가 울었다.
-일단 나 좀 꺼내 줘 봐!
재인과 명훈이 동시에 이동장을 보았다.
“꺼내 주시죠.”
명훈이 싱긋 웃었고 재인이 이동장 문을 열자 아실리가 톡 튀어나와 두 사람 사이의 진료대로 올라왔고 포이가 그 뒤를 따랐다.
-여기 두 분은 둘 다 우리 말을 알아들을 수 있죠?
아실리의 말에 재인과 명훈이 둘 다 고개를 끄덕이자 아실리가 말을 이었다.
-우리 제이든, 재인은 나와 포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여기 선생님은 모든 동물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게 다르긴 하지만, 선생님, 혹시 동물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나요?
“아니, 내가 알기로는 없단다. 하지만 세상은 넓으니까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 또 누군가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명훈은 아실리를 향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까 대기실에서 하늘이라는 고양이가 다른 세상 이야기를 하던데요. 우리 궁금한 게 좀 있어요.
아실리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재인과 명훈이 둘 다 흠칫 놀랐다.
하늘이의 말을 듣지 못했던 재인이 명훈을 쳐다보았고 명훈은 아실리와 포이, 재인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재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정말 똑똑한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맞기는 한가요?”
“예, 좀 오래 살아서 그렇지 고양이는 맞아요. 어마어마하게 똑똑하기도 하고요.”
잠시 입을 다문 채 손가락으로 진료대를 톡톡 두드리던 명훈이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건 여기서 이야기할 게 아니고요. 아무래도 다른 친구와 함께 이야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예?”
명훈은 재인과 아실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저희 집으로 가시죠. 저도 똑똑하고 오래 산 고양이를 한 마리, 배석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 * *
명훈의 집은 병원에서 가까워서 걸어서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명훈의 안내를 받은 재인이 빌라 입구에 들어서자 이동장 안에 있던 아실리가 코를 킁킁거렸다.
-여기도 묘한 느낌인데.
“왜, 아실리? 뭐 이상해?”
아실리는 이동장 문으로 코끝을 내밀더니 초록색 눈으로 재인과 명훈을 쳐다보았다.
-음, 약간 세시온의 집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뭔가 강력한 존재에게 보호받고 있는 곳? 그런 느낌이야.
“감이 좋은 고양이네요.”
아실리의 말을 들은 명훈이 감탄했다.
“어떻게 봐도 보통 고양이는 아닌데. 아무튼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 들어가서 하죠.”
명훈의 집은 5층이었다.
“형아 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에 들어선 명훈이 부르자 안쪽에서 야아옹 울음소리가 들리며 고양이 한 마리가 현관으로 나왔다.
“어!”
재인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토했다.
닮았다는 말은 들었지만 방에서 나온 고양이는 정말 아실리와 비슷했다.
“모르는 사람은 깜박 속겠네요. 정말 닮아서.”
“예, 그렇지만 우린 알아볼 수 있죠.”
“그야 당연하죠. 내 새낀데 구별을 못 할까요.”
재인이 이동장을 열어 주자 아실리는 살랑살랑, 포이는 깡충깡충 밖으로 나왔다.
낯선 집이라 포이는 재인의 옆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두 마리의 은회색 고양이는 탐색하듯 천천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흠, 둘이 같이 놓고 보니까 확실히 다른 점이 있어요.”
“그러네요. 우리 실리가 선이 좀 더 가늘어요.”
백호와 아실리는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했지만 자세히 보면 백호의 털 색이 조금 더 은빛에 가깝게 밝고, 미세하게 골격이 더 크고 선이 굵었다.
쌍둥이처럼 닮았지만 백호 쪽이 조금 더 남성적이라고나 할까.
서로를 지켜보고 있던 고양이 두 마리 중 백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세계에서 온 고양이인가?
아실리가 고개를 까딱했고 명훈이 재인을 향해 말했다.
“역시 그랬군요. 이세계에서 온 고양이라니, 권재인 씨도 혹시 이세계에서 오신 건가요?”
이세계에서 왔다는 말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건가?
재인이 눈을 크게 뜬 채 머뭇거리자 아실리가 재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분들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아. 어쩌면 이분들이 카이엔과 연락하는 걸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아.
“호, 혹시 연명훈 작가님이나 백호도 이세계에서 오신 건가요?”
“아니, 아닙니다. 저나 백호는 다 지구의 주민입니다. 하지만 차원 이동에 대해서 좀 아니까, 마음 편히 말씀해 보세요.”
그렇구나.
마음이 편해진 재인이 명훈을 향해 말을 시작했다.
“음, 실은 제가 몇 년 전 신비한 일을 겪었습니다. 박물관에서 새를 구하다가 기둥에 머리를 부딪쳤는데…….”
재인이 이야기하는 동안 명훈과 두 마리의 고양이는 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고 가끔 아실리가 살짝 끼어들어 두어 마디 추가하거나 보완했다.
재인은 말을 하면서도 명훈이 전혀 자신의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들어 주는 게 신기했다.
아무도 믿지 않을 거라서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긴데.
뜻밖의 곳에서 초면인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있다니. 마치 대나무숲에 비밀을 털어놓는 사람처럼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카이엔에 돌아갈 생각은 없지만, 가능하면 연락은 하고 싶은데 전혀 단서를 찾을 수 없는 게 좀 안타깝습니다.”
말을 마친 재인이 애틋한 눈으로 아실리를 바라보았다.
“저야 원래 제 세상으로 돌아온 거지만 우리 아실리는 절 따라서 낯선 세상으로 와준 거라서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아실리는…….”
재인은 명훈을 보며 말했다.
“믿지 못하실지 모르지만 우리 아실리는 신수가 될 수도 있었던 고양이거든요.”
“아!”
명훈은 순수하게 감탄하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끄덕였다.
“아니, 믿을 수 있습니다. 믿고 말고요.”
명훈 역시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마리의 은회색 고양이에게 애틋한 눈길을 주었다.
“권재인 씨야말로 믿지 못하실지 모르지만, 우리 백호는 원래 신수였던 고양이랍니다. 진짜 백호였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