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91화
50. 외전. 구름 동물병원(1)
“아이고 허리야.”
재인은 책상에서 일어나 허리를 두드리며 한쪽에 말려 있던 요가 매트를 바닥에 폈다.
한나절 꼼짝도 않고 그림을 그렸더니 허리가 욱신욱신 쑤셨다. 스트레칭이라도 좀 해야겠네.
-제이든, 허리 아파?
포이가 도도도 달려오더니 재인을 향해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포이가 두들겨 줄게.
“아니야, 괜찮아.”
재인이 웃으며 손을 젓자 포이는 뾰로통하게 뺨을 부풀렸다.
-저번에 실리가 꾹꾹 할 때 시원하다고 했잖아.
“아, 그래서 포이도 하고 싶구나?”
-응, 응!
재인은 요가 매트 위에 몸을 길게 펴고 엎드렸다.
포이가 그의 등 위에 기어오르더니 콩 콩 뛰기 시작했다.
“윽!”
-제이든, 아파?
“아냐, 아냐, 시원해. 근데 조금만 살살 뛰어.”
-응!
아실리의 노련한 꾹꾹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제법 시원하다. 우리 포이 몸무게가 늘었네.
-시원해? 응? 제이든, 시원해?
“그래, 어이구 우리 포이 잘한다!”
말도 늘고.
포이는 이제 다 자란 토끼가 되었는데 아직도 몸집이 작다. 원래 포에니 토끼의 몸집이 작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포이는 그중에서도 작은 듯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포이를 보면 지금도 아기 토끼인 줄 안다.
‘다른 포에니 토끼를 본 적은 없지만, 옛날에 본 포이의 엄마 토끼와 비교해도 좀 작은 것 같은데.’
어릴 때 밤의 경매 패거리들에게 잡혀서 움직일 수도 없게 작은 틀 안에 갇힌 채 먹이도 제대로 못 얻어먹어서 그런가.
그들이 부적을 만든다고 포이와 엄마 토끼를 틀 안에 갇혀 굶겼던 일을 생각하며 재인은 새삼 치를 떨었다.
처음엔 손으로 들어 봐도 거의 무게가 안 느껴질 만큼 작았는데 지금은 그래도 제법 묵직하다.
하긴 나와 살기 시작한 후로는 먹보 토끼가 됐으니까. 몸집은 크지 않아도 속살은 오동통하게 꽉 찼지.
허리에서 콩콩 뛰는 포이의 무게를 느끼며 재인은 조금 흐뭇한 기분이 되었다.
-제이든, 그림 너무 오래 그린 거 아냐? 쉬어 가면서 하라니까.
아실리가 방으로 들어오며 재인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표지 작업이지? 이제 그림 일은 안 해도 되지 않아?
재인은 이미 감정사로 제법 이름이 나서 감정비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일러스트 작가로 버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하잖아. 이 작가 표지는 내가 그리고 싶어서 맡은 거야.”
-저번에 말했던 그 작가?
엎드려서 포이의 안마를 받고 있던 재인이 벌떡 일어나자 포이가 등에서 굴러떨어지면서 피이웅 못마땅한 소리를 냈다.
“미안, 미안, 실리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재인은 책상 위의 휴대전화기를 집어 왔다.
“이것 봐, 표지 그릴 때 참고하라고 작가님네 고양이 사진을 받았거든?”
재인이 보여 주는 사진을 본 포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아실리를 향해 앞발을 허우적거렸다.
-실리, 실리야?
“아니야, 작가님네 고양이래. 근데 아실리랑 너무 닮았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본 아실리도 깜짝 놀란 듯 화면에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들이댔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은회색 줄무늬 고양이의 사진이 있었다.
사람들은 강아지나 고양이의 품종과 털 색이 비슷하면 다 비슷해 보인다고 생각하지만,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그들이 모두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안다.
수많은 아이를 섞어 놓아도 엄마들이 제 아이를 금방 구분하는 것처럼 보호자들도 제 동물을 구별할 수 있는데, 아실리는 흔한 생김새도 아니어서 닮은 고양이가 많지도 않았다.
사진의 고양이는 독특한 은회색 털의 줄무늬, 이마의 무늬, 커다란 초록색 눈과 옅은 벽돌색의 코, 또렷한 이목구비와 몸의 선까지 모든 면에서 아실리와 쌍둥이라고 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진짜 신기할 정도로 닮았어. 표지 그릴 때 이 사진이 아니라 그냥 아실리 보고 그리면 될 정도라니까.”
재인은 스마트폰을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나중에 기회 있으면 한번 실제로 보고 싶네.”
-그래도 우리 집 실리가 더 예쁠 거야.
포이가 귀를 쫑긋거리며 단호하게 포잇거리였고 재인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포이 말이 맞아. 우리 실리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똑똑한 고양이야.”
재인은 아실리와 포이를 번갈아 쓰다듬어 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아실리는 신수가 될 수도 있던 고양이인걸.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보통 고양이와는 비교할 수도 없지.
“그런데 포이, 배는 괜찮아?”
-응? 응, 이제 괜찮아.
포이를 안아 올려 통통한 배를 살살 쓸어보자 포이가 간지럽다는 듯 앞발로 배를 가리며 꿈틀거렸다.
“그 간식이 우리 포이엔 안 맞았나 봐.”
며칠 전 재인에게 일을 맡기는 출판사 편집자가 상의할 일이 있어 잠깐 들렀다가 아실리와 포이의 간식을 선물로 주고 갔다.
토끼용 간식이 입에 맞았는지 포이가 조금 많이 먹는다 싶었는데 배탈이 나서 무른 변을 봤었다.
“혹시 모르니까 오늘 병원 한 번 더 가볼까?”
-싫어, 싫어!
포이가 귀가 깃발처럼 팔락거리도록 도리질을 치면서 깡충 뛰어 내려가 아실리의 등 뒤에 숨었다.
-그 병원 싫어!
뺨을 불룩하게 내미는 포이를 보며 재인이 뒤통수를 긁었다.
“하긴 나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
포이가 배가 아프다고 끙끙 앓기에 가까운 동물병원 중 후기가 좋은 곳을 검색해서 갔는데, 개나 고양이는 잘 보는지 몰라도 토끼에 대해서는 경험도 없는 듯하고 영 어설퍼 보였다.
알아보니 토끼 진료는 일반 동물병원에서 잘 보지 못한다고 했다. 토끼나 햄스터, 조류 등은 특수동물이라, 진료 가능한 병원이 따로 있다고 한다.
아실리나 포이는 진짜 특수동물이긴 하지만, 믿을 만한 동물병원 한 군데 정도는 알아놔야 할 텐데.
그동안 아이들이 아픈 일이 없어 별생각 없이 지냈는데 이번에 포이의 배탈을 겪으면서 재인도 생각이 많아졌다.
* * *
-제이든, 또 시계 만져?
침대에 누운 채 시계를 들고 이리저리 햇빛에 비춰 보고 있는 재인 옆으로 다가온 아실리가 미야옹 울었다.
“응, 가릉빈가가 꿈속에서 한 말을 생각해 보면 이 시계가 분명히 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통 모르겠단 말이야.”
-그러게. 카이엔의 시계가 여기 막 돌아다닐 리도 없고.
“뚜껑 안쪽에 블랑셰의 서명이 있어. 이것 봐, 똑같잖아.”
재인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침대 머리맡에 걸어 둔 니콜레타의 배낭을 끌어당겼다.
배낭 안에 손을 집어넣은 재인이 예전에 카이엔에서 블랑셰에게 선물 받은 회중시계를 꺼냈다.
뚜껑에 고양이와 토끼가 새겨진 시계 안쪽에 조그맣게 각인된 블랑셰의 서명은 새로 얻은 시계의 서명과 같았다.
지구 사람들은 알아볼 수 없는 카이엔의 문자였다.
재인은 배낭 속에서 영상구를 꺼냈다. 카이엔을 떠날 때 가져올 물품들 몇 가지를 신중하게 골랐을 때 니콜레타의 영상구도 넣었다.
세시온의 서재에 있는 유물들은 당연히 손댈 수 없었고, 개인 물품만 가져올 수 있었는데 니콜레타의 영상구는 마도구지만 니콜레타가 직접 재인에게 준 것이라 가능했는지 배낭에 넣을 수 있었다.
“그치만 전혀 쓸 수가 없으니 뭐.”
카이엔에서도 일방 소통만 되던 물건인데 혹시 몰라서 가져왔지만 영상구가 작동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꿈속에서 가릉빈가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카티야의 은화도 니콜레타의 영상구도 아실리가 가져온 세시온의 초상화처럼 그냥 추억을 되살리는 기념품으로만 여겼을 텐데.
-가릉빈가는 그 후 한 번도 꿈에 안 나왔어?
“응.”
재인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하여튼 예언자나 신수들은 뭔가 애매모호하게 예언을 하는 게 문제야. 딱 들으면 알 수 있게 가르쳐 주면 안 되나.
-그게 신수들도 다 금기가 있기 때문에 그럴 거야.
재인이 침대 위를 뒹굴거리며 불평하자 아실리가 살며시 웃으면서 앞발로 그의 머리를 살살 어루만졌다.
-신수도 뭐든지 다 밝힐 수는 없어. 그런 건 세상의 법칙에 어긋난다고. 그래도 제이든은 신수들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서 다들 도와주려고 한 거야.
아실리는 엣헴 기침을 하며 옆으로 뻗친 수염을 쓰다듬었다.
-내가 이래 봬도 신수가 되려다 만 고양이니까 그쯤은 알아.
재인은 옆에 와서 함께 뒹구는 포이를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가릉빈가 말고도 신수가 또 있을까? 옛날엔 생각도 안 해 봤는데, 가릉빈가가 존재한다면 청룡, 백호, 주작, 현무도 존재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이 세계에도 신수는 있겠지.
재인에게 대꾸하던 아실리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제이든네 세계는……, 음, 편리하고 좋은 점도 많지만.
아실리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동안 보니까 이 세계는 신수가 살기엔 너무 어려운 환경인 것 같아. 옛날엔 신수가 있었다고 해도 지금은 사라졌거나 잠들어 버리지 않았을까?
“그것도 그래. 사람들의 상상력도 말라 버리고, 상상력이 있다 해도 대부분 다른 방향으로 뻗어 가니까.”
그날따라 매연과 미세 먼지가 심해서 바깥쪽의 공기가 부옇게 흐려 있었다.
빵빵거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와 빽빽한 건물들, 아실리가 눈여겨보던 TV 뉴스 등을 생각하며 재인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현대 한국 사회가 아실리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구나.
* * *
“작가님, 표지 시안 통과됐어요.”
편집자가 기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보통 카톡을 하는데, 재인이 설거지를 하느라 카톡 알림음을 못 들었더니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몽당연필 작가님이 무척 좋아하셨어요. 기대보다 더 잘 나왔다고.”
“아, 잘됐네요. 저도 애독자라서 더 즐거운 작업이었습니다.”
“네네, 두 분 다 동물 키우시는 분들이고, 글과 그림이 다르긴 해도 작품 느낌도 서로 결이 비슷하신 것 같아요.”
잠깐 일 이야기를 더 나눈 편집자가 전화를 끊으려다 재인에게 물었다.
“참, 작가님, 지난번에 그 간식은 애들이 좋아했나요?”
“예, 감사히 잘 먹였습니다.”
“토끼는 사탕수수를 더 좋아했나요? 아님 건조 딸기? 작가님 댁 토끼 너무 귀여워서 간식 좀 더 보내드리고 싶은데.”
“아니,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재인이 열심히 사양했지만 편집자는 토끼를 키우고 싶은데 못 키우는 대리만족을 하게 해달라면서 간식을 바로 보낼 태세였다.
하는 수 없이 재인이 그럼 포이가 먹고 탈이 났던 간식은 빼 달라고 완곡하게 말하자 편집자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어머, 작가님, 진작 말씀하시지. 저 진짜 좋은 동물병원 알아요.”
“예? 정말요?”
“네네, 저 햄스터 키우잖아요. 로보롭스키! 로보 잘 보는 병원이 많지 않거든요.”
“아, 햄스터 보는 병원이면 토끼도 보겠지요?”
“물론이죠. 들으시면 놀라실 걸요?”
편집자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짜잔! 하는 듯 말을 이었다.
“바로 그 몽당연필 작가님 가족분이 동물병원 운영하세요. 누님이 원장님이신데 작가님도 자주 병원 나가서 일 도우시는 걸로 알아요!”
#작가의 말:
외전에는 전작인 ‘고양이가 주워온 용’ 독자님들을 위한 서비스 이야기가 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몽당연필 작가와 그의 고양이는 전작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