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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90화 (본편 완) (190/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90화

49. 그 후(본편 완)

재인은 잠시 얼음처럼 굳어서 포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꿈에서 깨어난 듯 포이를 덥석 잡아 흔들었다.

“포이, 포이가 말을 한 거야? 실리, 이것 봐, 포이가 말을 했어!”

자기도 놀란 듯 초록색 눈을 커다랗게 뜨고 흥분한 재인과 포이를 번갈아 보면서 입을 뻐끔거리던 아실리가 차차 상황이 이해되었는지 표정을 풀었다.

-포이가 말을 한 게 아니라 제이든이 포이 말을 알아듣게 된 거네. 내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아실리는 어미가 새끼를 바라보듯 따뜻한 눈으로 포이에게 다가오더니 포이의 귀와 머리를 핥았다.

-우리 포이, 제이든이랑 나랑 대화하는 게 부러웠나 봐. 포이야, 이제 내가 통역 안 해도 되겠네?

“포이야, 포이 소원이 아실리처럼 형이랑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거였어?”

재인이 포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면서 묻자 포이는 눈을 반짝이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말, 들려? 실리처럼?

아직 처음이라 그런 건지 아실리처럼 자연스럽게 대화가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포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포이야!”

재인은 감동해서 포이와 아실리를 품 안에 끌어안았고 포이도 포잉포잉 울며 짧은 앞발로 재인을 마주 껴안았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누나가 얼굴을 빼꼼 들이밀었다.

“뭐야, 아침부터 소란스러워서 놀랐잖아. 왜 그러고 있어? 어제도 종일 같이 있었으면서 새삼스럽게 또 이산가족 상봉이야?”

“아니야 누나, 그럴 일이 좀 있었어.”

“꿈이라도 꾼 거니. 아휴, 너 또 어디 아픈가 하고 가슴이 덜컹했다. 씻고 아침 먹어.”

“응. 금방 나갈게.”

“아가들도 나와서 아침 먹자아.”

누나는 재인에게 말할 때보다 몇 배 다정한 목소리로 아실리와 포이에게 한껏 상냥한 눈웃음을 지어 보인 뒤 문을 닫았다.

재인은 일어나서 창가에 가 창문을 열고 기지개를 켰다.

시원한 바람이 가슴속까지 밀려 들어왔다.

아실리와 포이가 폴짝폴짝 따라와서 창틀에 올라앉아 그와 함께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재인은 고양이와 토끼에 등에 한 쪽씩 손을 얹고 아침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실리와 포이와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듯 상쾌한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이제 또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 * *

2년 후.

이메일을 확인하던 재인이 책상에서 머리를 들었다.

“실리, 일 들어왔다.”

거실에서 포이와 놀고 있던 아실리가 방으로 들어오면서 야아옹 울었다.

-표지 작업이야?

재인은 그동안 따로 방을 얻어 누나의 집에서 독립했다.

누나와 매형, 명이는 그가 독립하는 것을 걱정했지만 병원에서도 건강하다는 진단을 받았고 재인이 혼자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싶다고 우겨서 허락을 받았다.

휴학했던 학교는 고미술사학과로 전공을 옮겼고 학교 공부 외에도 따로 2년간 죽도록 열심히 공부를 했다.

우연한 기회에 경험이 많은 유물 감정사와 인연이 닿아서 현장 경험도 적잖게 해볼 수 있었다.

웹소설 표지와 삽화 등을 그리는 일은 지구로 돌아온 직후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것인데 의외로 반응이 좋아서 중세 판타지 쪽, 특히 동물을 잘 그리는 작가로 이름이 나 있었다.

-지난번에 들어왔던 웹소설 표지 확정된 거야? 제이든이 그 작가 좋아하잖아. 용이랑 고양이 나오는 소설이라 표지 그려보고 싶어 했던 거지?

“응 그분 소설 보면 왠지 나랑 되게 결이 맞거든. 근데 이번 이메일은 그쪽 관련 일은 아니고.”

재인이 아실리와 그 뒤를 쫑쫑 따라 들어오는 포이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이건 제이든 로스 앞으로 들어온 일이야.”

-오!

아실리가 감탄하면서 제이든의 책상 위로 폴짝 뛰어올라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좀 읽어 줘, 한글은 카이엔 문자랑 달라서 아직 한눈에 안 들어와.

“그래.”

제이든은 그동안 옛 유물과 예술품 등에 대해 죽을 둥 살 둥 판 뒤 감정 일을 시작했다.

공부한 기간은 짧았지만 그에게는 카이엔에서 6년간 감정사로 보낸 경력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품을 감별할 수 있는 초능력이 있었다.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짧아서 감정 일을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고, 현장에 뛰어든 후에도 의뢰인이나 경력 있는 감정사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지만 6개월쯤 전 명망 있는 감정사와 국내 유수 대학의 고미술사학과 교수가 공개적으로 그를 인정해 준 이후로 물밑 의뢰가 꽤 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권재인의 이메일이 아니라 감정사 제이든 로스로 따로 만들어 놓은 이메일에 들어온 의뢰를 확인하며 재인이 말했다.

“카이엔처럼 감정사 등급 시험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보석 감정사는 시험이 있다면서, 유물 감정사는 그런 게 없다니.

아실리도 아쉬운 듯 종알거렸고 포이가 옆에서 앞발을 모아 쥐며 포잉 울었다.

-우리 제이든이 최고야. 최고 감정사야!

“응원해 줘서 고맙다.”

재인이 웃으면서 포이의 머리를 쓸어 준 후 메일에 집중했다.

한국에는 고미술품 등의 감정사 자격 제도가 없고 대부분 단체에서 감정을 하는 형태로 감정이 진행된다.

감정 단체는 한국고미술협회,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등이 있고 해당 단체에 속한 감정위원들이 감정을 진행한다.

감정위원들은 대개 경험이 많은 화상, 미술이론가, 학자, 보존과학자 등으로 구성되는데, 공식적으로는 이러한 감정위원들 외 개인 감정사들의 감정은 거의 효력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물밑에서 이름이 높은 개인 감정사들이 몇 명 활동하고 있다.

중국에서 서화 감정학과 문헌 고증학을 공부한 경력이 있고 고서화 감정이라면 다섯 손가락에 꼽힌다는 이모 씨, 서양화가이면서 그림 감정에 탁월한 눈썰미를 가진 것으로 유명한 김모 화가, 신분이 불확실하고 본명도 알려지지 않았으며 도굴꾼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옛 유물 감정은 내로라하는 감정위원들 못지않다는 ‘독수리눈 영감’ 등 공개적으로, 또는 암암리에 유명한 개인 감정사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의 이름에 이어서 관련 계통 사람들의 입에 제이든이라는 별명을 가진 젊은 감정사가 화제가 되기 시작한 게 벌써 반년 가까이 되었다.

“나이가 어리다던데, 한참 더 배워야 하지 않을까?”

“아니, 내가 한 번 봤는데, 나이는 어려도 보통내기가 아니여. 내 생각에 그 바닥 경험은 적지 않은 거 같어.”

“진품을 귀신같이 알아보더라니까.”

“그……, 명동 황 회장 있지? 수집가로 유명한 양반, 그 양반이 요새 그 젊은 친구가 뜨니까 시험해 본다고 의뢰를 넣었다는데, 원래 황 회장 측근인 감정사 있잖아? 최 박사, 그 사람이 혀를 내둘렀다네. 일부러 속이려고 내놓은 가품에 넘어가지 않았다는군. 기가 막히게 잘 만들어진 가품이라던데.”

“독수리눈 영감이 인정했으니 끝났지 뭐. 자기 젊을 때보다 몇 배 낫다고 했다는걸.”

“맘만 먹으면 젊은 놈이 돈깨나 벌겠구먼.”

“아직 젊어서 그렇지 좀만 더 있으면 각 단체에서 감정위원으로 모셔 갈 것이여.”

“근데 특이한 버릇이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아하, 고양인가 토낀가를 데리고 다닌다는 말이 있었지. 진짜여?”

“어허이, 젊은 친구가 일을 잘못 배웠구먼. 장난도 아니고 미술품을 다루는 중한 자리에 어떻게 동물을 데리고 다닌다는 거여?”

“뭐, 징크스인가 보지. 감정할 때 빨간 옷만 입는 사람도 있고 수염 안 깎는 사람도 있는데 그 친구는 고양이가 마스코트인가 보지. 일만 잘한다면야 뭐 상관있나.”

암암리에 이런저런 소문이 퍼지면서 유물 감정사 제이든의 이름은 조금씩 널리 퍼져갔다.

* * *

“안녕하세요.”

“이잉, 어서 오게, 오늘 내가 뭐 하나 보여주려고 불렀제.”

느릿한 충청도 말씨에 푸근한 인상이지만 눈매만큼은 상당히 날카로운 노인이 재인을 반갑게 맞았다.

이 노인은 고미술품과 유물을 다루는 계통에서 ‘독수리눈 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발군의 감정 실력을 자랑하는 재야의 감정사였다.

전직 도굴꾼이라는 소문 때문인지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고 지인의 골동품상을 의뢰 창구로 해서 들어오는 감정 의뢰를 받고, 역시 해당 골동품상을 중개자로 유물 매입이나 판매를 하고 있었다.

처음 경매장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을 때 재인은 그가 도굴꾼 출신이라는 소문 때문에 가까이하지 않았는데, 그 후 몇 번의 감정 의뢰에서 그와 종종 만나게 되는 일이 있었다.

독수리눈 영감은 왠지 재인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해서 볼 때마다 뭐라도 한 가지씩 더 가르쳐 주려고 하며 친근감을 보였고 가장 먼저 재인의 실력을 인정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알고 보니 그가 도굴꾼이라는 소문에는 다소 오류가 있었고, 손을 씻은 지도 오래되었기에 재인도 그에게 느끼던 거부감이 많이 없어진 상태였다.

서너 번 함께 일을 해 보니 독수리눈 영감은 실력도 좋았지만 의외로 깔끔한 사람이었다.

재인과 얽힌 일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와 함께 엮인 일에 불법적이거나 도덕적으로 미심쩍은 일이 전혀 없었기에 재인도 꺼림칙함 없이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 나한테 물건이 하나 들어왔는데, 이거이 굉장히 신기한 물건이라서 말이제. 한중일 삼국 물건이야 내가 빠삭하지마는, 서양 쪽 물건은 자네가 보는 눈이 더 나은 거 같아서 한번 보라고 연락한 거여.”

“예, 보여 주시면 저도 견문을 좀 넓히고 좋지요.”

재인이 자리에 앉았고 독수리눈 영감은 안쪽에서 보랏빛 보자기에 싼 물건을 들고나왔다.

“값은 그렇게 비싸게 치이지 않았어. 내 고객 중 한 분이 유럽 여행 갔다가 골동품 거리에서 샀다는데, 다른 거 살 돈을 마련한다고 나한테 팔러 왔더라고. 아주 값진 놈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어덴가 평범한 물건 같지 않아서 내가 샀제.”

독수리눈 영감은 가죽 위에 벨벳이 깔린 탁자 위에 물건을 놓고 보자기를 조심스럽게 벗겼다.

“서양 골동품을 주로 보는 윤 씨한테 한번 보라고 했는데, 그 녀석이 머리를 기우뚱하더라고. 특별히 귀한 물건 같지는 않은데 연대나 제작자를 잘 모르겠다고 좀 이상하다 하던걸. 그래서 자네 불러봤제. 젊은 사람이 보면 좀 다를까 해서.”

말을 이어가던 독수리눈 영감은 재인의 얼굴을 쳐다봤다가 당황해서 그의 팔을 흔들었다.

“엉? 자네 왜 그러나?”

독수리눈 영감이 탁자에 올려놓은 물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재인이 그가 팔을 몇 번이나 흔들고 나서야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예? 뭐라고 하셨어요?”

“에헤이, 이 사람 내 말을 안 듣고 있었네. 왜 그려? 이거 뭔지 알아보겠나?”

탁자 위에 있는 것은 금속 뚜껑이 달린 골동품 회중시계였다. 아주 오래된 물건 같지는 않았고 값비싼 소재를 쓴 것 같지도 않았는데 디자인이 상당히 특이했다.

“윤 씨가 그러는데 이런 디자인이나 제작 방식은 처음 본다고, 시계 장인들 중 누가 취미로 만들어 본 거 아닌가 하던데, 시판된 시계는 아닌 것 같다고 했어.”

“영감님!”

“잉? 왜 갑자기 큰소리를 내고 그려? 놀랐잖어.”

“이 시계, 저한테 파세요!”

“엉?”

“제가 꼭 사고 싶어요.”

재인이 눈을 반짝이면서 매달리는데 옆에 있던 포이까지 포잉거리면서 합세하자 독수리눈 영감은 눈을 껌벅거리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거 저한테 파시면, 영감님이 전에 탐내시던 달항아리 드릴게요.”

“엉? 진짜? 그거 안 판다면서?”

“팔게요! 이 시계 제가 꼭 갖고 싶은 디자인이에요.”

“뭐 그렇게 맘에 든다면 못 팔 건 아니지만서두.”

시계 자체는 그렇게 값나갈 만한 물건이 아니었기에 독수리눈 영감은 흔쾌히 재인에게 넘겨주겠다고 했다.

재인은 독수리눈 영감이 전부터 팔라고 조르던 달항아리를 팔기로 약속하고 회중시계를 입수했다.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아실리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야 야옹 울었다.

-그거, 혹시 블랑셰 뒤포르의 시계야?

“응, 분명해.”

재인은 아실리를 보며 웃었다.

“어쩌면 말야. 우리 카이엔과 다시 연락할 수 있을지도 몰라.”

여기서 카이엔의 물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가릉빈가가 꿈속에서 말했던 차원의 시간을 잇는 물건을 입수한 것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재인은 블랑셰의 시계를 손에 쥔 채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카이엔에 있는 친구들의 얼굴이 노을 너머로 스쳐 갔다.

그래, 언젠가는 다시 그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한 걸음 한 걸음, 감정사의 길을 착실히 걸어 나가야지.

양쪽 세상을 이을 수 있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인 특별한 감정사의 길을.

“야아옹!”

아실리가 그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듯 울었고 포이가 뒷발을 힘차게 탕 굴렀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메밀꽃 향기가 그리움을 흠뻑 불러일으키는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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