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89화
48. 포이의 소원
“아니 매형, 그게 다 뭐예요?”
다음 날 퇴근하는 매형이 뭔가 한 보따리 잔뜩 끌어안고 들어오는 걸 보며 재인이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이거 간식이랑 영양제, 고양이랑 토끼한테 좋은 걸로 챙겨달라고 했어. 회사 근처에 동물용품 파는 가게 큰 거 있더라.”
“필요한 건 제가 인터넷으로 다 주문했는데.”
“그래도 많으면 좋지 뭐, 처남 퇴원 기념으로 형님이 사주는 거야.”
처남 퇴원 기념으로 고양이랑 토끼용품 선물?
재인이나 누나가 머리를 갸웃거리건 말건 매형과 명이는 신이 나서 보따리를 풀었다.
“자, 이거 봐라, 이거, 야옹아, 이름이 아실리라고 했나? 이거 고양이들이 젤 좋아하는 거라 그러더라.”
매형은 큼직한 손안에서 가느다랗게 보이는 츄르 봉지를 찢어서 내용물을 쭉 짜더니 아실리에게 내밀었다.
아실리는 코끝으로 냄새를 킁킁 맡아본 후 재인을 쳐다봤다.
재인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츄르를 핥기 시작한 아실리는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가 분홍색 혀로 입가를 한 번 핥고 다시 먹기 시작했다.
-이거 맛있네. 흠, 제이든네 세상의 간식도 꽤 괜찮은걸? 조금 짠 맛이 있지만 상당히 괜찮아.
순식간에 매형의 손가락만 한 츄르 한 봉지를 다 핥아먹은 아실리가 입맛을 다시더니 고르릉 소리를 내며 매형의 손에 머리를 톡 부딪쳤다.
“잘 먹는다. 야옹이가 잘 먹어! 잘 샀네, 그치?”
매형은 뿌듯한 얼굴로 식구들을 돌아보면서 다른 맛 츄르를 하나 더 뜯으려고 했다.
“여보, 그거 너무 많이 주면 좋지 않대. 내가 인터넷에서 봤어. 자, 야옹아, 닭가슴살 삶아 왔다. 토끼는 사과 먹을까? 이 사과 달더라.”
누나는 사과 쟁반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면서 가늘게 썬 조각 하나를 포이에게 주었다.
포이가 좋아서 사과를 붙잡고 먹기 시작하자 누나와 매형, 명이의 얼굴이 모두 늦둥이 막내라도 지켜보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토끼가 뭐 먹는 거 처음 보는데 진짜 재밌게 먹는다. 어떻게 저렇게 입안으로 쫑쫑쫑 빨려 들어가지? 회사에서 쓰는 종이 파쇄기 같다.”
“사진! 사진! 삼촌 나 토끼랑 같이 사진 찍어도 돼요? 아니, 영상으로 찍을까?”
명이가 토끼와 같이 사과를 나누어 먹는 셀카를 찍는 동안 아실리는 새 간식을 맛보았다.
-이것도 맛있는데 좀 짜긴 하네. 이쪽 간식들이 전반적으로 좀 짠가?
아실리가 흡족한 듯 코를 발름거리면서 슬그머니 비타x스틱 봉지 하나를 앞발로 끌어당겨서 제 앞으로 가져갔다.
조금 전에 매형이 까준 간식인데 입에 맞는 모양이었다.
“실리, 츄르랑 캣스틱 다 하나씩 먹었으니까 이제 그만 먹어. 짜지 않은 걸로 줄게.”
제이든이 간을 하지 않고 삶은 닭가슴살을 아실리에게 내밀어 주자 고양이는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처음 먹어 보는데 맛있는 게 많아서 그랬어. 사실 차원을 넘어오면서 먹을 게 입에 안 맞으면 어쩌나 했는데 괜찮은 거 많네.
“포이잉!”
포이가 작은 머리를 열심히 까딱거리며 뭔가 말했다.
-포이는 다 좋은데 라벤더베리가 없는 게 아쉽대.
아실리의 통역을 들은 재인이 웃으며 포이를 쓰다듬었다.
포이가 제일 좋아하는 라벤더베리가 지구에는 없는 게 아쉽네.
그래도 아실리와 포이가 생각보다 이쪽 세상에 잘 적응해 줘서 다행이다. 재인도 마음이 좀 놓였다.
“삼촌, 근데 삼촌 방에 있는 그림 누가 그린 거예요?”
명이가 재인에게 몸을 붙이면서 물었다.
“전에는 없었는데, 삼촌이 그렸나? 고양이는 아실리 같은데 금발 머리 남자애는 누구예요?”
“아 그 그림……, 삼촌이 그린 건 아니고 선물 받은 그림이야.”
* * *
식구들과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누고 제 방으로 돌아온 재인이 크게 숨을 내쉰 후 침대에 몸을 던졌다.
카이엔에서 아실리와 포이만 데리고 살았던 기간이 너무 길어서인지, 북적북적한 저녁 시간이 좋기도 하면서 좀 낯설고 버겁기도 했다.
차원을 넘어가기 전, 눈이 안 보이기 시작하면서 혼자 방에 들어박히는 시간이 많아지기 전에는 분명 이렇게 살았는데, 그동안 혼자 살았던 기간에 너무 익숙해졌던 건가.
-좋은 집에서 자랐네, 제이든의 마음이 따뜻한 이유를 알겠어.
아실리가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오르더니 침대에 엎어져 있는 제이든의 등을 앞발로 꾹꾹 눌렀다.
“응, 좋은데, 너무 좋은데 이런 게 좀 오랜만이어서. 우리 식구들이 너무 들이대서 실리랑 포이 힘들진 않았어?”
포이가 얼른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엄마와 일찍 떨어진 데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포이는 누나 가족이 우쭈쭈 귀여워해 주는 게 좋은지 코가 발그레 붉어진 채 눈을 반짝였다.
-음, 좀 적극적인 분들이라 약간 부담스럽긴 한데 그래도 좋아. 지금은 처음이니까 더 그렇겠지.
아실리가 대답하면서 침대 옆 협탁에 놓은 그림에 눈길을 주었다.
재인이 카이엔에서 차원을 넘어올 준비를 할 때, 아실리는 재인에게 말해서 한 가지 물건을 챙겼다.
세시온의 집에 걸려 있던 어린 시절 세시온과 아실리의 그림이었다.
파란 눈의 금발 소년이 은회색 아기 고양이를 껴안고 있는 오래된 그림.
아실리는 그림 속의 어린 세시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마음대로 카이엔을, 세시온의 집을 떠나와서 미안해, 세시온. 세시온이 남겨준 수명을 포기한 것도 미안해.
고양이는 그림 속의 소년에게 코끝을 살짝 가져다 댔다.
-하지만 내가 어떤 세상, 어느 곳에 가든, 누구와 함께 지내든 세시온을 잊진 않아.
아실리는 침대에 엎어진 채 포이에게 간지럼을 태우고 있는 재인을 힐끗 보았다.
-세시온, 저 애는 세시온이 맡긴 일을 충실하게 잘했어. 세시온처럼 완벽한 인간은 아니지만 착한 아이야. 나도 세시온과 함께 살던 곳을 떠나고 싶진 않았지만, 쟤는 내가 좀 더 보살펴 줘야 해.
아실리는 세시온이 살아 있을 때 그에게 자주 그랬듯이 그림의 액자 가장자리에 머리를 콩 받은 후 침대 위를 뒹굴고 있는 재인과 포이에게 엄한 어조로 야아옹 울었다.
-자, 둘 다 이제 그만! 차원 이동의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잘 쉬어야 해. 얼른 자!
“네, 네!”
포이는 더 놀고 싶은지 불만스럽게 뺨을 부풀렸지만 제이든은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며 이불과 베개를 바로 폈다.
우리 고양이님은 신수가 안 됐어도 엄격하시네. 그 엄격한 척하는 모습이 더 사랑스럽지만.
재인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옆구리에 붙어서 하품을 하는 아실리의 보들보들한 몸을 쓰다듬었다.
아실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하지만, 신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버린 걸 생각하면 재인의 마음이 아팠다.
에우카나 카티야, 엘리미네온이나 글라키에나를 떠올리면 카이엔의 신수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다시 차원을 넘어올 수 있게 도와준 가릉빈가도 그렇고.
그런데 아실리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재인과 포이와 함께 있기 위해 버렸다.
게다가 수명조차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깎였는데.
아실리에게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삐이잉.”
포이가 눈을 비비며 재인의 옆으로 파고들어 왔다.
그래, 우리 포이도 있었지. 포이도 어렵게 차원을 넘어왔는데, 우리 포이도 보통 토끼는 아니었는데 뭔가 변한 건 없을까?
재인은 양쪽 옆구리에 낀 아실리와 포이를 쓰다듬으며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깜박 잠이 들었다가 돌아눕는데 창밖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스쳤다.
뭐지? 새 같은데.
한밤중에 새가 창가에 날아올 리가 없는데. 구름 그림자인가?
몽롱한 의식 속에서 어렴풋이 창밖을 바라보던 재인은 금방 다시 잠이 들었다.
* * *
“……은 괜찮으냐?”
가슴을 어루만지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에 재인이 눈을 떴다.
여신의 얼굴과 새의 몸을 가진 신수, 가릉빈가가 그에게 묻고 있었다.
“눈은 괜찮으냐?”
재인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해송박물관의 뒤뜰, 파랑새가 사는 고목 아래였다.
“아, 예.”
재인은 대답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은 고요하고, 가릉빈가는 고목만큼이나 거대한 몸으로 우아하게 앉은 채 머리를 기울이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목 위의 둥지에서 파랑새가 살짝 머리를 내밀고 그에게 까딱까딱 날개를 흔들어 보이더니 도로 둥지 안으로 사라졌다.
“이거……, 꿈이죠?”
재인이 묻자 가릉빈가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환각을 여러 번 경험했다더니 바로 아는구나. 내가 전할 말이 있어 잠시 네 꿈자리를 빌렸다.”
“예에.”
재인이 순순히 경청할 자세를 취하자 가릉빈가가 맑게 울리는 소리로 웃었다.
“내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꿈에 현몽한 적이 몇 번 있다만, 너처럼 천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아이는 처음이구나.”
제가 이런 쪽으로는 경력이 좀 되거든요.
재인은 속으로 혼잣말을 하면서 가릉빈가의 말을 기다렸다.
가릉빈가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쪽 차원에서 네가 수행한 일이 적지 않다. 네 고양이와 토끼도 제법 큰 역할을 했고. 원래라면 차원을 넘어 돌아올 수 있는 것은 너 하나였을 텐데 글라키에나가 네 고양이의 소원을 수락해 너와 함께 보냈지. 나의 선물은 네 눈을 원래 상태로 돌린 것이고.”
“예, 감사합니다. 눈은 완전히 나았습니다.”
재인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가릉빈가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 토끼에게는 선물이 없었다고 들었다. 그 아이도 적잖이 열심히 너를 도왔는데. 그래서 내가 선물을 주려고 널 불렀단다.”
“아, 정말입니까?”
재인의 얼굴이 불을 켠 것처럼 환해지는 걸 보며 가릉빈가가 또 웃었다.
“그래, 토끼가 가장 원하는 것을 선물로 주마.”
“우리 포이가 가장 원하는 것이요?”
라벤더베리인가? 머리를 갸우뚱거리던 제이든이 가릉빈가를 향했다.
“음, 그게 뭔가요?”
가릉빈가의 아름다운 얼굴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미리 말해 주면 재미없지 않겠느냐? 이제 다시 자거라. 아침이 되면 알게 될 테니.”
가릉빈가는 커다란 날개를 펼쳐서 부채처럼 재인을 향해 바람을 보냈다.
“아, 토끼의 소원은 됐고, 너도 혹시 내게 부탁할 게 있느냐?”
재인이 얼른 말했다.
“혹시 카이엔의 친구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은 없을까요?”
“흠…….”
가릉빈가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네가 그 세계에서처럼 부단히 너 자신을 발전시킨다면, 그리고 차원의 시간을 잇는 신물을 찾아낸다면, 언제가 될진 몰라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가릉빈가의 날갯짓 소리가 흐려지면서 재인의 시야도 함께 흐려졌다.
* * *
“미야옹, 냥!”
“포잉! 포잉!”
재인은 익숙한 냥냥퐁퐁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그보다 먼저 깨어난 아실리와 포이가 창가에 앉아서 종알종알 떠들고 있었다.
“실리, 포이, 왜 이렇게 빨리 일어났어?”
재인이 잠이 덜 깬 소리로 아실리와 포이를 부르자 고양이와 토끼가 그를 돌아보더니 창턱에서 깡충 뛰어내려 그에게 달려왔다.
-일어났어, 제이든? 새벽에 왠지 잠을 설치는 것 같던데. 잠꼬대도 하고.
“그래? 간밤에 선명한 꿈을 꿔서 그랬나 봐. 신수가, 그러니까 가릉빈가가 꿈에 나왔어.”
-정말? 제이든 또 예지몽을 꾼 거 아니야? 가릉빈가가 뭐라고 했어?
제이든은 잠시 꿈의 내용을 되살려 본 뒤 포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포이 소원을 들어준다던데.”
“포잉?”
포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발로 제 가슴을 가리켰다.
“응, 꿈이긴 한데, 포이, 혹시 소원이 있었어?”
-응!
“오, 정말? 무슨 소원이었어?”
웃으면서 포이의 머리를 쓸어 주던 재인이 흠칫 놀랐다.
“실리, 금방 실리가 말했어?”
-아니,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실리와 제이든이 포이를 바라보았다.
“포이?”
포이가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고 굳어 있다가 제이든을 쳐다보며 입을 오물오물하다가 포이잉 소리를 내었다.
-나, 포이, 제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