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88화
47. 돌아가는 방법(6)
“실리, 이거 어떻게 가지고 왔어?”
재인은 놀라고 반가워서 배낭을 꽉 끌어안았다가 배낭에 묻은 흙과 먼지를 털었다.
입구를 조여 맨 끈을 살짝 늦춰 보자 가장 먼저 카티야의 은화가 보였다.
-우리가 차원 이동을 할 때, 제이든이 우릴 안고 있었잖아. 근데 갑자기 제이든의 몸이 천천히 흐려지기 시작하는 거야.
아실리가 미양미양 울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실리! 말을 할 수 있구나. 차원을 넘어오면 대화가 안 될까 봐 걱정했는데!”
-나도 제이든이 내 말을 알아듣는 능력을 잃었을까 봐 걱정했어.
아실리가 정말 안심이라는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원래 내가 사람 말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제이든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었으니까. 제이든이 변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아실리의 말에 따르면, 차원 이동이 한참 진행되던 중에 제이든의 몸이 점점 안개처럼 흐려져서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이 툭 떨어지고, 입고 있던 옷이며 목에 걸고 있던 카티야의 은화까지 공중에 둥둥 뜨기 시작하기에 아실리는 재빨리 은화를 붙잡았다.
-아마 제이든의 영혼이 병원에 누워 있다는 제이든의 몸으로 돌아가면서 육신이 사라지는 건가보다 싶었어.
처음 권재인이 차원을 넘어 카이엔으로 갔을 때, 그의 몸에 지니고 있던 옷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몸에 지니고 있는 물건은 함께 넘어올 거라는 생각에 니콜레타의 배낭을 함께 가져왔고, 신중하게 고른 물건만을 그 안에 넣었다.
-제이든의 몸이 사라질 때 카이엔에서 가져온 물건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아실리는 제이든의 몸에서 떨어진 은화와 회중시계, 수첩과 펜 등을 닥치는 대로 걷어서 배낭 속에 밀어 넣었다.
-제이든의 팔이 가장 나중에 사라지는 바람에 움직이기 좀 힘들어서 옷까지는 못 건졌어.
아실리는 가슴이 뭉클한 듯 야아옹 울었다.
제이든의 몸이 안개처럼 흩어지면서 사라질 때,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그의 두 팔이었다.
몸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팔은 남아서 아실리와 포이를 감싸 안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야 어쩔 수 없다는 듯 공간 속으로 흩어졌다.
아실리는 그것이 제이든의 마음 같았다. 의식이 있건 없건 마지막까지 아실리와 포이를 지키려고 했던 그의 마음.
현실의 아실리는 조금 새초롬한 어조로 투덜거렸다.
-정말 힘들었어. 포이는 제이든이 사라졌다고 앙앙 울고, 나는 제이든이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서 배낭에 막 밀어 넣은 다음에 혹시 포이를 잃어버릴까 봐 포이를 꼭 붙들고 배낭끈을 몸에 감고 있었다니까.
고양이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내가 오래 살았지만 차원 이동은 나도 처음이잖아. 긴장 좀 했어.
그때 상황을 돌이켜보는 아실리의 털이 재인의 손 아래에서 보르르 떨리는 걸 보면 조금 긴장한 정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공간이동 포탈 속에서 서로 떨어지면 공간의 미아가 될 수 있다.
카이엔에서도 지금은 공간이동 포탈이 발전되어서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함께 들어갔던 사람이 서로를 잃고 나중에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거나 가지고 들어갔던 물건을 잃고 영영 찾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차원 이동은 경우가 다르고, 제이든 일행이 신수의 보호를 받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제이든의 몸이 갑자기 사라지기까지 했으니 아실리와 포이가 많이 놀랐을 것이다.
-실리도 많이 놀랐을 텐데 포이 잘 돌보고 배낭까지 챙겨오다니, 정말 대단해, 우리 실리!
재인이 칭찬을 쏟아부으며 뺨을 비비자 아실리는 멋쩍은 듯 앞발로 그의 뺨을 밀어냈다.
-아이, 수염 따가워, 저리 가.
“아침에 면도했는데?”
손으로 턱을 만져보니 따가울 정도로 수염이 자라 있지도 않구만.
“자, 이제 집에 가자. 우리 집 보여 줄게.”
원래의 권재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면서 누나 집에서 독립했었다.
그러나 눈이 안 보이게 되면서 다시 누나 집으로 들어가게 되고 얻었던 원룸은 정리했다.
다시 방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재인은 포이를 어깨에 올리고 배낭을 등에 메었다.
아실리가 재인의 다리 옆에 붙어서 졸랑졸랑 따라오며 종알거렸다.
-제이든이 언제 올지 몰라서 그 뜰에서 못 나왔는데, 나와 보니까 신기한데.
“그동안 뭐 먹었어?”
-배낭 안에 있던 간식이랑 건초.
배낭이 함께 차원을 건너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랐지만, 혹시 지구의 먹을거리가 아실리나 포이의 입에 안 맞을까 봐 먹던 것을 넉넉히 넣었던 게 다행이었다.
그동안 아실리와 포이가 굶고 있을까 봐 속이 바짝바짝 탔었는데.
-저거 뭐야? 설마 집이야?
멀찍이 도로변에 선 고층 아파트를 본 아실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포잉!”
포이도 귀를 쫑긋 세운 게 몹시 놀란 눈치였다.
“응, 아파트라고 해. 음, 카이엔의 성 같은 건데 사람들이 모여 살아.”
-저렇게 높게 짓는다고? 그런데 너무 멋이 없는데. 그냥 네모 기둥 같잖아.
카이엔의 건축 양식에 익숙한 아실리의 눈에는 현대 한국의 건물이 멋없게 보일 법도 했다.
-좀 무너지긴 했지만 우리 있던 곳, 거기 건물은 괜찮던데.
해송박물관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해송박물관은 옛것을 사랑하던 해송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디자인을 골랐던 만큼 전통적인 건축 형태와 현대 건축 형태가 잘 어우러진 건물이었다.
-동방 대륙 분위기도 나고 느낌이 좋았어.
“그래, 우리 아실리가 역시 보는 눈이 있네.”
-그럼, 내가 감정사의 고양이로 산 게 몇 년인데.
아실리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접으면서 생글 웃었다.
박물관에서 집까지의 길은 사람 왕래가 많은 편이 아니지만 그래도 오가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
토끼를 어깨에 올리고 고양이와 함께 걸어가는 재인을 보고 사람들이 신기한 듯 힐끗힐끗 곁눈질을 했다.
웃는 사람도 있었지만 길을 조금 돌아 피해 가는 사람도 있었고 눈살을 찌푸리고 뭔가 말하려다 마는 사람도 있었다.
얼른 이동장이랑 가슴줄부터 사야겠네.
“자, 들어와, 여기가 우리 집이야. 음, 누나 집이지만 내가 방 얻어 나갈 때까지는 여기서 좀 지내자.”
매형과 누나는 퇴근 전이고 조카도 아직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 아니어서 집은 비어 있었다.
-좀 딱딱한 구조지만 그런대로 편리해 보이긴 하네. 재밌어 보이는 것도 많고.
아실리는 집안을 훑어보며 품평했고 포이는 마룻바닥이 미끄러워서 생소한지 발을 자꾸 바닥에 두들겨 보았다.
-그러니까 여기서 제이든 이름은 재인인 거지? 권재인? 이거 제이든 어렸을 때야?
“응.”
거실 장식장 위에 있는 재인이 어렸을 때 누나와 함께 찍은 사진을 아실리가 눈여겨보자 포이도 깡충깡충 뛰어와서 사진을 보며 귀를 쫑긋거렸다.
-누나랑 제이든이랑 많이 닮았네. 여기 이건? 이것도 제이든이야?
“아니야, 그건 우리 명이야. 내 조카, 누나 아들이야.”
그때 삐삐 현관 도어록의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삼촌!”
명이가 학원에서 돌아왔다.
“삼촌, 나 왔어요. 오늘은 몸 괜찮아요?”
현관에서부터 재인의 안부를 물으며 신발을 벗고 들어오던 명이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토끼다! 고양이랑! 삼촌, 토끼랑 고양이가 있어요!”
명이는 갑자기 몸을 낮추고 네 발로 살금살금 기어서 재인의 가까이로 왔고 포이는 재인의 뒤로 숨었다.
“명아, 왜 기어 와?”
“토끼랑 고양이가 놀랄까 봐…….”
네 발로 살살 기어 오던 명이는 머쓱하게 머리에 손을 올리고 뒤통수를 긁었고 아실리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닮았네, 제이든이랑.
“자, 인사해, 얘는 내 조카 명이야. 윤하명인데 식구들은 그냥 명이라고 불러. 명아, 이 고양이는 아실리고 토끼는 포이라고 해.”
“야아옹.”
아실리가 점잖게 울었고 포이는 제이든의 다리 뒤에서 머리를 빼꼼 내민 채 깜장 귀를 흔들었다.
“아, 안녕, 나는 명이야. 윤하명. 가람초등학교 4학년 2반이고…….”
놀란 김에 인사하던 명이가 정신을 차렸는지 재인에게 입을 불쑥 내밀었다.
“아이, 삼촌, 나 놀리는 거죠? 사람한테 인사시키는 것처럼 하니까 나도 모르게 인사했잖아. 알아듣지도 못할 건데!”
“누가 못 알아듣는대? 우리 실리랑 포이가 얼마나 똑똑한데!”
“삼촌, 얘네들 어디서 왔어요?”
“삼촌이 원래 키우던 애들이야. 삼촌 아파서 누워 있는 동안 없어졌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삼촌 친구 집에서 잘 봐 줬대. 오늘 가서 찾아왔어.”
“아아, 그래서 삼촌이 깨어나자마자 막 고양이 찾고 토끼 찾고 그랬구나. 헛소리한다고 엄마랑 아빠랑 막 걱정했는데.”
명이는 아실리와 포이를 보면서 예뻐 죽겠다는 듯 눈이 휘어질 정도로 웃다가 다시 똘망똘망한 얼굴이 되어 재인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삼촌이 얘들 언제 키웠어? 나 삼촌 화실 놀러 갔을 때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응? 어, 어 그러니까 친구 집에서 친구랑 같이 키웠던 애들이야. 삼촌 집은 원룸인 데다가 그림이 많았잖아. 그래서 우리 집에서 키울 수 없었는데 이젠 내가 키울 거야.”
“어엉.”
명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그런대로 납득했는지 다시 아실리와 포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정말 예쁘다. 삼촌, 고양이도 예쁘고 토끼도 귀여워. 그런데 둘이 안 싸워?”
“응, 안 싸워. 아주 사이가 좋아. 명이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지?”
“그럼! 삼촌, 나 얘들 간식 줘도 돼?”
명이는 벌써부터 아실리와 포이에게 홀딱 빠진 눈치였고, 어린애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명이의 접근에 아실리와 포이도 경계심을 풀었다.
-동물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 걸 보니 가정교육을 잘 받았군. 좋다고 막 덤비지도 않고. 포이, 같이 놀아도 괜찮아.
아실리가 수염을 앞발로 쓸면서 포이에게 명이와 놀아도 괜찮다고 허락하는 걸 보니 일단 아실리의 합격선에 든 것 같았다.
재인은 컴퓨터를 켜고 일단 필요한 고양이 화장실, 이동장, 사료와 간식 등을 주문했다.
아실리와 포이를 함께 데리고 살려면 매형의 눈치도 보이고, 얼른 방을 얻어서 나가야 할 텐데 아직 퇴원한 지 얼마 안 되었고 정기적으로 병원에 검사도 받으러 가야 하는지라 따로 나가 살겠다고 누나를 설득하는 게 관건이었다.
누나와 연애 기간이 길어서 재인을 어릴 때부터 봤기 때문에 처남이 아니라 친동생처럼 여기는 매형도 설득해야 하겠지만, 우선은 고양이와 토끼를 데리고 들어온 것부터 납작 엎드려서 허락을 받아야지.
* * *
“우어어. 너무 귀엽잖아!”
“…….”
“아니, 처남. 이렇게 귀여운 아가들을 키우고 있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왜 친구 집에서 키웠어? 이리, 이리 좀 와 봐라, 야옹아. 토끼는 이름이 뭐라고? 포이?”
포이가 동공 지진을 일으키면서 제이든을 쳐다보았다.
‘이 아저씨 좀 무서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는데 야구선수 출신인 데다가 나름 거포 유망주였던 매형은 문짝만 한 몸에 솥뚜껑 같은 손으로 어떻게 고양이와 토끼를 한 번 만져볼까 호시탐탐 노리면서 눈에서 하트를 뿅뿅 쏟아내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