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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87화 (187/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87화

47. 돌아가는 방법(5)

처음 병원에서 깨어난 후 한동안 재인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정신은 스물일곱 살의 제이든 로스인데 몸은 스물두 살의 권재인이었고, 아실리도 포이도 옆에 없었다.

목에 걸고 있던 카티야의 은화도 사라지고 그의 몸에 카이엔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깨어나기 직전까지도 쓰리던 손바닥에도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아마 이런 상태가 될 거라고 차원을 넘어오는 중에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깨어나서 실제로 이 상황 속에 빠지고 나니 상상했던 것보다 더 심한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이엔에서의 6년은 정말 내가 겪은 일이 맞나? 그 모든 일이 이렇게 생생한데 설마 그게 꿈이었을 리는 없는데.

하룻밤에 평생의 꿈을 꾸었다는 사람들이 있듯이, 그 6년간의 일은 내가 6개월간 혼수상태에 있는 동안 꾸었던 꿈이란 말인가?

일어나서 아실리와 포이를 찾으러 가고 싶었지만 6개월간 누워 있었던 몸도 말을 듣지 않았고, 병원 관계자들이나 누나와 매형도 기겁을 하면서 말렸다.

검사가 다 끝나고 퇴원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기 전에는 꼼짝도 하지 말라고.

“잠깐만, 아주 잠깐만 외출했다 오면 된다니까요. 꼭 찾을 게 있어서 그래요.”

재인이 애원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누나는 그의 머리에 문제가 생겼을까 봐 또 눈물을 쏟았다.

이대로는 오히려 병원 생활이 더 길어질까 봐 두려워진 재인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척 연기를 했다.

빨리 퇴원해야만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카이엔에서의 생활이 정말 꿈이었는지.

혼란에 빠져서 스스로도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던 재인이 안정된 것은 깨어난 후 닷새째 되던 날이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천천히 걸으세요. 빨리 회복하고 싶으신 건 알지만 지금 마음이 너무 급하신 것 같아요.”

재활 치료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여기 잠깐 앉았다가 병실로 돌아갈게요.”

재인은 휴게실에 잠시 앉아서 천천히 물을 마셨다.

환자복을 입은 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람, 바둑을 두고 있는 나이 든 환자분들, 노트북을 펴놓고 뭔가 글을 쓰고 있는 환자도 있었다.

벽에 걸린 TV에서는 소리를 죽인 채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환자들 중 한 사람이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자 트로트 오디션 방송이 나왔다.

“저거 요새 재밌던데 소리 조금만 키워 봐.”

“다른 분들도 계신데 시끄럽게 하면 안되구마이. 바둑 두시는 분도 계신데.”

“어, 괜찮소, 괜찮어. 너무 크지만 않게 소리 좀 올려 보소.”

“그럴까? 거기 젊은 친구도 괜찮수?”

“예. 괜찮습니다.”

“저도 괜찮습니다.”

노트북을 쓰고 있던 젊은 환자와 재인이 둘 다 괜찮다고 하자 리모컨을 잡았던 환자가 소리를 조금 키웠다.

“저 노래 좋더마이, 쟈도 잘하네.”

“내는 쟈 말고 저짝에 키 큰 아가 더 낫던데.”

“갸는 노래를 잘하긴 하는데 트로트 필이 안 나지 않어?”

재인은 물끄러미 휴게실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처음 깨어났을 때 한없이 낯설기만 하던 풍경이 차차 현실로 다가왔다.

이 풍경이 진짜인데, 이게 내가 살아왔던 곳이고 앞으로 살아갈 곳이다.

그럼 카이엔은? 그건 정말 꿈이었나? 갑자기 제이든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난 정말 긴 꿈을 꾼 건가?

“김 사장, 이것 좀 보소. 우리 딸이 이번에 영국을 갔다 왔거든. 걔가 선물로 사온 거야.”

“딸이라면 그림 그린다는 그 딸 말이여?”

“이이, 전시회 건으로 영국꺼정 갔다 왔제.”

“신기하게 생긴 시계구마이. 골동품이여?”

“우리 애가 이런 쪽으로 관심이 많은데 보는 눈이 아주 좋거덩.”

골동품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재인의 눈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나이가 지긋하고 풍채가 좋은 환자가 맞은편의 환자에게 골동품 시계를 자랑하고 있었다.

‘저런 건 내가 봐도 잘 모르지.’

본능적으로 시계를 넘어다보던 재인은 피식 헛웃음을 웃었다.

그가 몇 년 동안 침식을 잊고 공부했던 것은 카이엔의 유물과 골동품이다.

원래 미대생이었던 만큼 지구의 예술품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지만 나이도 어렸고 저런 골동품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카이엔의 물건이었다면 보는 순간 재료와 연대, 가치 등 모든 정보를 척척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 눈이 잘 보이게 됐으니 복학해서 다시 열심히 그림을 그려야지.

카이엔에선 내가 이미 이름 높은 감정사로 궤도에 올랐는데.

다소 허망해진 재인이 병실로 돌아가려고 몸을 일으키다가 깜짝 놀라 도로 주저앉았다.

‘뭐지?’

골동품 시계를 들고 있는 노인이 탁자 한쪽에 내려놓은 시계 상자에 눈이 갔다.

원래 제 짝은 아니었던 듯 시계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나무 상자에는 자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재인은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못 보는 거지?’

골동품 회중시계에 관심을 가지고 보는 사람은 있어도 한쪽 옆에 치워진 나무 상자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재인은 가만히 상자를 바라보았다.

평범해 보이는 낡은 나무 상자에서 은은한 푸른 아우라가 흐릿하게 번져 나오고 있었다.

재인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그래, 꿈이 아니었어. 정말 꿈이 아니었던 거야.’

게다가 명품을 알아보는 제이든 로스의 눈도 사라지지 않았다.

* * *

시계 상자에서 흐릿한 푸른 아우라를 본 이후 다른 물건에서 아우라를 본 적은 없었다.

시계 상자의 아우라 역시 잠깐 반짝였다가 사라졌을 뿐이었지만 혼란에 빠졌던 재인의 마음을 다잡는 데는 큰 힘이 되었다.

‘부디 내가 찾으러 갈 때까지 잘 버티고 있어. 실리. 포이.’

만약 차원을 함께 넘어온 것이 포이뿐이었다면 재인의 마음은 이미 걱정으로 새까맣게 타 버렸겠지만 아실리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좀 안심이 되었다.

차원을 넘어오자마자 이렇게 헤어질 줄은 몰랐지만, 아실리라면 어떻게든 포이를 잘 데리고 그가 찾으러 갈 때까지 무사히 숨어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제 해송박물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재인은 걸음을 좀 더 재촉했다.

꼭 거기 있기를.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여자가 아들인 듯한 아이를 나무라고 있었다.

“거기 들어가지 말랬잖아. 위험하다니까.”

“그치만 토끼를 봤단 말야. 고양이도 있고!”

재인은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저기, 잠깐만요.”

“예?”

“토끼랑 고양이를 봤다고요?”

재인의 표정이 너무 다급해 보여서 좀 무서웠는지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엄마의 뒤로 몸을 숨겼다.

“왜 그러시죠?”

아이의 엄마가 물었고 재인은 얼른 표정을 풀면서 말했다.

“실은 제가 고양이랑 토끼를 잃어버려서 찾고 있거든요. 회색 줄무늬 고양이랑 귀가 까만 하얀 토끼인데 혹시 보셨나요?”

“진짜요? 형아, 나 봤어요. 그렇게 생긴 토끼!”

엄마의 뒤에 숨었던 사내아이가 얼굴이 환해진 채 톡 튀어나왔다.

아이는 짤막한 팔을 들어 걸어오던 길 쪽을 가리켰다.

“내가요, 어제요, 친구들이랑 저쪽에서 놀았는데요. 숨바꼭질하다가…….”

아이는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응, 울타리 너머로 들어가서 숨었는데요.”

“아휴, 울타리 넘어가면 안 된다고 말했잖니. 거기 지금 출입 금지라니까.”

“안 넘어갔어……, 밑으로 기어 들어갔어.”

“아니, 넘어가든 밑으로 들어가든!”

아이는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더니 말을 계속했다.

“울타리 밑으로 들어가서 나무 뒤에 숨었는데, 소리가 났어요. 부스럭부스럭하고!”

아이는 손을 머리 위로 올려서 귀처럼 팔락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이케 딱 뒤돌아봤더니, 하얀 토끼가 있었어요. 귀가 기다란데 까맣고 요만한 게 진짜 예뻤어요!”

“…….”

“눈이 이케 동그랗고! 너무 예뻐서 가까이 가서 보려고 했는데!”

아이는 눈을 크게 뜨면서 손을 휙 저었다.

“나무 뒤에서 고양이가 확 나왔어요! 회색 고양이요! 고양이가 야옹! 하니까 토끼가 고양이를 따라갔어요.”

아이는 손을 내렸다.

“근데요, 형아! 고양이가 토끼 잡아먹지 않아요? 토끼는 이케 조그맣고 고양이는 컸단 말이에요. 나 고양이가 토끼 잡아갈까 봐 쫓아갔는데 둘이 도망가 버렸어요. 친구들이 불러서 집에 갔는데, 자꾸 생각나서 오늘 나 혼자 또 가봤어요.”

“오늘도 봤니?”

아이는 시무룩하게 뺨을 부풀렸다.

“아니요. 인제 막 찾아보려고 했는데 엄마가 쫓아왔단 말이에요. 고양이랑 토끼 보고 싶었는데.”

아이의 엄마가 한숨을 쉬고는 부연 설명을 했다.

“저쪽에 해송박물관이라고 있는데, 몇 달 전에 지진 났을 때 건물 일부가 무너졌거든요. 정원도 갈라지고 나무도 몇 그루 쓰러졌어요. 이쪽에서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은 곳이랍니다. 그래서 박물관도 닫고 출입 금지가 됐는데 애들이 자꾸 정원에 들어가려고 해서 엄마들이 조심시키고 있어요.”

“예. 해송박물관은 저도 잘 압니다.”

“우리 애가 어제 봤다니까 고양이랑 토끼가 아직 거기 있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형아, 고양이랑 토끼 같이 있어도 괜찮은 거 맞아요?”

“응, 보통은 위험하지만 그 토끼랑 고양이는 사이가 좋단다. 알려 줘서 고마워.”

“나 같이 가서 도와주면 안 돼요? 나 보물찾기 잘하는데.”

재인을 따라오고 싶어서 꾸물거리던 아이는 제 엄마에게 귀를 잡혀서 끌려갔고 재인은 얼른 해송박물관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래, 우리 아실리, 어디 안 가고 거기 있을 줄 알았어. 포이도 잘 데리고 있었구나.

가슴이 두근거리며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해송박물관의 정문은 닫혀 있었다. 재인은 뒤뜰의 울타리 쪽으로 돌아갔다.

울타리 너머로 해송박물관의 명물이었던 고목이 보였다. 다행히 지진에 쓰러지진 않은 모양이었으나 예전과 다르게 좀 기울어진 모습이었다.

저기 살던 파랑새의 새끼를 구하려다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지.

재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새 둥지를 찾아보았으나 나뭇잎 때문인지 둥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 울타리를 넘은 재인이 고목 뒤쪽, 산기슭과 연결된 숲 쪽으로 걸어갔다.

숲이라기엔 규모가 작지만 키 작은 나무들이 제법 빽빽이 서 있는 곳, 해송박물관의 뒤뜰과 산기슭이 이어지는 곳에서 재인은 심호흡을 한 뒤 낮은 소리로 불렀다.

“아실리, 포이!”

숲은 조용하기만 했다. 재인은 다시 불렀다.

“내가 왔어. 제이든이 왔어. 실리, 어디 있니?”

부스럭! 나뭇잎 밟는 소리가 났다.

“실리!”

재인이 반가운 마음에 그쪽으로 휙 돌아섰지만 커다란 눈을 뜬 채 오도카니 선 다람쥐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을 뿐이었다.

다람쥐가 놀란 듯 멈춰 있다가 재빠르게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실망한 재인이 고개를 떨어뜨렸다가 숲 안쪽으로 몇 발 더 들어갔다.

어제 아이들에게 발견되었다더니 더 깊이 숨어 버린 건가?

그는 머리를 들고 산 쪽을 보았다. 산으로 올라가 봐야 하려나?

부스럭!

다람쥐가 나타났던 쪽에서 또 소리가 났다.

제이든이 그쪽을 힐끗 쳐다보자 나무 뒤에서 뭔가 머리를 쏙 내밀었다.

“포잇!”

비명 같은 소리가 나더니 흰 그림자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포잉, 포잉, 포잉!”

흰 토끼가 까만 귀를 흔들며 화살처럼 달려와서 재인의 품에 뛰어들었다.

“포이야, 포이! 우리 포이!”

재인은 뿌앵뿌앵 우는 토끼를 꼭 끌어안고 눈이 붉어졌다.

“포이야, 실리는 어딨어?”

포이가 뛰어나온 나무 뒤에서 회색 고양이가 나타나더니 우아하게 걸어오면서 미야옹 울었다.

“실리, 우리 실리! 무사할 줄 알았어, 더 빨리 오지 못해서 미안해!”

재인이 팔을 벌리자 우아하게 몇 걸음 걸어오던 아실리가 결국 참지 못하겠는지 날아오듯 달려와서 그에게 얼굴을 비볐다.

한참이나 토끼와 고양이를 끌어안고 울먹거리던 재인이 겨우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제 집에 가자. 실리, 포이, 며칠이나 여기서 고생 많았어. 얼른 집에 가서 씻고 맛있는 거 먹고 따뜻한 데서 좀 쉬자.”

재인이 아직도 뿌앵뿌앵 울고 있는 포이를 껴안은 채 일어서자 아실리가 그의 팔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왜? 실리?”

고양이는 그들이 숨어 있던 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거기 뭐가 있어?”

재인이 아실리의 뒤를 따라서 나무 뒤까지 걸어가자 아실 리가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앞발로 나무뿌리 밑을 발로 헤쳤다.

땅 위로 드러난 굵은 뿌리 아래쪽으로 구멍이 나 있었다.

재인은 엎드려서 아실리가 헤치고 있는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구멍 바로 안쪽에 뭔가 있었다. 뭔가 몹시 낯익은 것이.

재인이 손을 집어넣고 그것을 잡아 꺼내자 아실리가 만족스럽게 야아옹 울었다.

낡은 초록색 배낭이 그의 손에 잡혀 밖으로 끌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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