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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86화 (186/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86화

47. 돌아가는 방법(4)

“실리…….”

제이든이 말을 잇지 못한 채 아실리를 껴안았고 아실리가 제이든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코를 문질렀다.

-아니 왜 그래, 나 괜찮아. 내가 뭐 꼭 제이든이랑 못 헤어져서 그런 건 아냐. 오래 살았으니까 이제 다른 세상도 좀 보고 싶고.

제이든이 아실리의 얼굴에 뺨을 비비자 고양이는 새침한 얼굴이 되어 앞발로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제이든이 안심이 안 되니까 그렇지. 귀찮더라도 내가 따라가서 끝까지 돌봐 줘야 하니까.

아실리는 제이든의 어깨에서 내려와 덩달아 그들 사이로 파고드는 포이를 핥아 주면서 야옹거렸다.

-포이도 내가 봐줘야지 제이든한테만 맡기긴 불안하잖아.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 제이든은 고양이의 새초롬한 얼굴과 포이의 천진한 얼굴을 함께 품에 집어넣고 꼭 끌어안았다.

너무 고맙고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실리는 내가 갈등하는 걸 알고 날 집에 보내주려고 같이 간다고 한 거겠지.

아닌 척 새침을 떨지만 아실리의 따뜻한 마음이 훤히 보였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카티야가 미소를 머금었다. 청년과 고양이, 토끼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스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오래전 일을 생각했다.

나도 저 고양이만큼의 용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오래전 그녀는 한 남자를 사랑했다. 하늘색 머리에 새파란 눈을 한 청년은 용모는 달랐지만 어딘가 제이든을 닮은 데가 있었다.

티아룬 호수에서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카티야는 그가 황태자라는 것을 몰랐고 그는 그녀가 신수라는 것을 몰랐다.

그들이 가까워져서 친구가 되었지만 카티야는 늘 그렇듯 자신이 신수라는 걸 밝히지 않았다.

그 이전에 몇 번 사람과 친구가 된 적이 있었지만 그녀가 사실 표범 신수라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전과 같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본신을 알게 된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그녀를 무서워해서 도망치거나 여신처럼 경외하여 숭배하며 거리를 두거나.

어느 쪽이건 친구 관계는 유지될 수 없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마음 맞는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황태자 역시 비슷한 이유로 그녀에게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

첫눈에 반한 여자가 신분 때문에 자신을 따르거나 또는 신분 때문에 자신과 멀어지는 걸 원하지 않아서.

서로에게 조심스럽던 그들은 차차 사랑에 빠졌고, 황태자가 신분을 밝히고 청혼했을 때 카티야는 수락했다.

평범한 마을 청년이라면 몰라도 무려 카이엔의 황태자라서 카티야도 망설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용도 가끔은 인간 신분으로 유희를 즐긴다지 않는가. 황태자비 역할이라고 못 할 건 없지.

실제로 카티야는 황태자비 역할에 잘 어울렸고 카이엔의 백성들은 그녀의 유례없는 미모를 칭송하고 그 담백하고 고아한 성품을 숭배하며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선황이 일찍 서거하는 바람에 황태자가 젊은 나이로 황제가 되고 그녀가 황후가 되었을 때, 황궁의 마법사 중 그녀가 신수임을 알아차린 사람이 나타났다.

갓 황위에 오른 젊은 황제는 표범 수인을 황후로 모실 수 없다는 마법사와 재상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황위를 버릴 수 없었고, 그녀는 황제의 마음이 부족함을 탓하며 그를 떠났다.

젊은 황후는 요절한 것으로 처리되었고 황제는 이후 다시 혼인하지 않았으며 다음 황위는 그의 조카가 이었다.

카티야는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해, 그녀는 황제가 자신이 표범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녀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황제가 자신의 책임을 버릴 수 없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한 나라의 수장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녀는 아실리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신수로서의 자아를 버리고 인간이 되어 그의 옆에 남는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녀와 그는 둘 다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카티야는 몸을 굽혀 신수가 되는 것을 포기한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실리, 너의 마음이 정말 깊구나.”

인간은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아실리처럼 오래 살아서 영기를 지니게 된 동물에게 신수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단순히 영생에 가깝게 오래 산다는 것 외에 훨씬 큰 의미가 있는 것인데.

동방 대륙에는 용이 되고 싶어 천 년을 수행한다는 이무기의 전설이 있다. 영기를 갖게 된 동물에게 신수란 그처럼 평생의 꿈이 달린 존재이며 영광과 성취의 끝이다.

카티야 역시 표범 수인으로 태어났다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낮과 밤을 거쳐 신수가 되었다.

신수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인간이 된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저 고양이는 주저 없이 영광된 신수의 삶을 버리고 평범한 고양이가 되겠다고 했다.

무한한 삶을 버리고 한 달이 될지 일 년이 될지 모를 짧은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녀는 제이든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제이든, 이제 돌아가렴. 위험도 해소했고 얼굴도 봤으니 나도 돌아가야지.”

제이든은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나서 카티야와 짧게 인사를 나누었다.

“정말 아쉽습니다. 베로데인으로 가십니까? 아니면 북부로.”

“티아룬으로. 하지만 그전에 카이에른에 잠시 들러 보려고 한다.”

카티야는 황궁의 묘지, 황후의 옷을 넣은 빈 관과 나란히 묻힌 어느 황제의 무덤을 생각했다. 오랜만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녀는 아실리와 포이의 머리를 한 번씩 쓸어 주고 제이든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잘 가라, 제이든 로스, 나의 친구여. 너를 만나서 정말 좋았다.”

부드러운 손이 그의 얼굴을 감싸고 향긋한 숨결을 풍기며 뺨에 입 맞춘 뒤 말했다.

“보고 싶을 거다.”

* * *

아스토시엔의 숨겨진 동굴은 제이든이 처음 도착했을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천장에선 여전히 물이 한 방울씩 똑 똑 떨어져 바위에 패인 물웅덩이에 고이고 있었다.

처음 제이든이 바위 옆에 누워 있을 때 아실리가 앞발을 물에 담가 그의 이마를 적셔 주었던 물웅덩이를 보니 왠지 반가웠다.

“자, 여기서 어떻게 하면 되지? 아실리?”

돌아가는 방법은 빙룡이 아실리에게 일러 주었다고 했기에 제이든은 아실리의 말을 기다렸다.

-우선 그 기와를 꺼내.

제이든이 배낭에서 가릉빈가문 수막새를 꺼냈다.

-제이든을 이 세상으로 보내는 중간 역할을 했던 제이든네 세상의 신수를 불러내야 해.

기와의 한쪽 끝이 조금 깨져서 날카롭게 날이 선 부분이 있었는데, 제이든이 그 부분에 손바닥을 대고 쭉 긋자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기와에 그의 피가 스며들더니 푸르스름한 안개가 일렁거리며 부드럽게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안개는 공중에서 자그맣게 뭉쳐지더니 한 마리 새의 형체를 이루었다.

제이든이 해송박물관의 뜰에서 본 파랑새를 닮았다.

새의 형체는 점점 커졌다.

목이 길어지고 부리가 줄어들면서 새의 머리는 여자의 얼굴로 변했다. 머리 위에 화관을 쓴 듯한 볏이 생기고 날개가 형태를 잡고 깃털 하나하나가 선명해졌다.

술을 드리운 듯 긴 꼬리가 모양을 잡았고 독수리를 닮은 뒷발이 땅을 디뎠다.

새의 날개와 등, 꼬리, 뒷발을 가졌지만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과 상체를 가진 신수가 비파를 닮은 악기를 가슴에 안은 채 그들 앞에 나타났다.

전설에 나오는 반인반조의 신수, 범어로 갈라빈카(Kalavinka)라고 부르는 가릉빈가였다.

가릉빈가문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인두조신상(人頭鳥身像)을 비롯해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미술 유적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황룡사지, 분황사지, 보문사지 등 많은 사찰의 유적에서 다양한 형태의 가릉빈가문 와당이 발견되었는데, 지금 제이든의 눈앞에 나타난 가릉빈가의 형상은 잘 알려진 와당의 가릉빈가와는 좀 달랐지만 해송박물관의 수막새에 있던 가릉빈가와 같은 형태였다.

완전히 모양을 갖춘 가릉빈가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흔히 봉안이라고 말하는 갸름하고 꼬리가 긴 눈이 몇 번 깜박거리더니 제이든을 내려다보았다.

금빛도 아니고 은빛도 아닌,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색조의 눈동자가 제이든을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놀랍구나. 결국 이 세상을 구원했느냐?”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천상의 음악 같았다.

다하르의 빙벽 안에서 들은 세이렌의 목소리가 사람을 홀린다고 했는데 가릉빈가의 목소리는 그보다 더 몽환적이었다.

하기는 가릉빈가의 별칭 중에 미음조(美音鳥)가 있다. 자태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극락의 소리를 낸다고 하지.

잠시 어지러웠던 정신을 바로잡은 제이든이 공손하게 가릉빈가를 향해 절했다.

“제가 돌아가는 걸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래, 그런데 식구가 늘었구나?”

가릉빈가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아실리와 포이를 보았다.

“예. 이쪽 세상에서 얻은 가족입니다. 꼭 같이 갈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글라키에나의 전언을 듣기는 했다만.”

가릉빈가가 제이든을 향해 관음상에서 볼 수 있을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 아이를 도와준 일도 있으니 나도 널 도와주마.”

“아이요?”

“그때 그 파랑새를 잊었느냐?”

“아.”

제이든이 해송박물관의 파랑새를 떠올릴 때 가릉빈가가 날개를 펼쳤다.

가릉빈가의 날개는 몸에 비해서 놀라울 정도로 컸다.

마치 지붕처럼 펼쳐진 거대한 날개가 제이든을 감쌌고 제이든은 혹시 놓칠세라 아실리와 포이를 꼭 끌어안았다.

어미 닭 깃 속에 든 병아리처럼 가릉빈가의 날개 속에 감싸이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이 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점점 의식이 흐려지다가 무의식의 세계가 제이든을 덮쳐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인아, 재인아.”

누군가 애타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인? 재인이라고? 이름이 귀에 설었다. 그 이름으로 불린 지는 너무 오래되었다.

“재인아, 눈 좀 떠봐, 선생님, 얘 의식이 돌아온 게 맞나요?”

“보호자님, 잠시만 비켜 보시겠어요? 지금 환자분 손이 움직였습니다.”

제이든이 눈을 떴다.

눈앞에 사람의 얼굴이 오락가락하다가 차차 초점이 잡혔다.

“재인아, 재인아, 재인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재인이가 눈을 떴어요.”

누군가 그의 손을 붙잡은 채 오열했다.

제이든의 바짝 마른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누나…….”

“그래, 재인아, 누나야, 정신이 들어? 누나 알아보겠어?”

재인은 떨리는 손을 들어서 누나의 흠뻑 젖은 뺨을 만졌다.

“……, 울지 마, 누나, 나 괜찮아.”

* * *

6개월 전, 해송박물관 근처에서 큰 지진이 있었다.

서울 근교에서 이렇게 규모가 큰 지진이 있었던 것은 1613년 7월의 대지진 이후 처음이라고 하는데, 재인은 그때 해송박물관에 있다가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쓰러진 후 계속 혼수상태였다고 한다.

“몸에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도 계속 깨어나지 못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누나가 제이든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밝힐 수 없다고, 큰 병원 의사 선생님들도 와서 보고 그랬는데, 깨어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깨어나지 않는다고.”

누나는 또 눈물이 글썽해졌다.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재인아. 눈도 정말 괜찮니?”

“응, 잘 보여.”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면서 시각도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병원에서는 재인의 케이스가 희귀하다고 계속 입원시켜 놓은 채 온갖 검사를 더 해보고 싶어 했으나 재인은 최소한의 검사만으로 퇴원을 고집했다.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누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재인을 살폈다.

반년이나 무의식 상태로 누워 있었던 것치고는 놀랄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기는 했지만, 병원에서 깨어나자마자 정신없이 토끼와 고양이를 찾으며 헛소리를 하던 걸 생각하면 아직 안심이 되지 않았다.

“나 괜찮아, 누나, 계속 내 옆에 있지 않아도 되니까 얼른 나가 봐.”

“그럼 누나 가게 나가 볼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응,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봐.”

누나가 운영하고 있는 공방으로 출근하고 나자 재인은 얼른 일어나서 외출 준비를 했다.

병원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그는 다시 권재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해가 바뀌어서 스물두 살이 된 권재인으로.

가릉빈가문 수막새도, 아실리와 포이도 옆에 없었다. 설마 카이엔에서의 6년간의 생활이 모두 꿈이었을까?

차원을 건너서 겪은 그 모든 일이 기나긴 꿈이었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재인은 손을 꼭 쥐었다.

실리는 날 위해 신수의 삶을 포기했어. 분명히 이쪽 세계로 넘어왔을 거야.

내 몸이 병원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병원에서 깨어났지만 아실리와 포이는 병원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겠지.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제이든은 걸음을 서둘렀다. 오래 누워 있어서 근육이 빠져 버린 다리가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게 견딜 수 없이 답답했다.

실리, 포이, 조금만 기다려. 내가 지금 데리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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