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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85화 (185/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85화

47. 돌아가는 방법(3)

레옹 바레의 비서였던 조셉이었다.

환각 속에서도 한 번 만난 일이 있었지. 마법사들의 마나 충전기 노릇을 하고 있다고 자조적으로 말하던 사람이었는데, 왠지 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 보였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조셉이 씩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아니, 조셉 씨 얼굴이 많이 상하셨네요.”

원래도 호리호리한 사람이었는데 그새 바람 불면 날아갈 것처럼 마른 데다 창백하고 얼굴빛도 좋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 환각 속에서 봤을 때도 저렇게 안색이 나쁘진 않았는데.

실제로는 제이든이 레타논으로 먼저 가지 않았으니 조셉을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조셉은 원래대로 지인인 용병과 함께 레타논에 가서 마법사들을 도왔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심한 부상이라도 입었나? 얼굴색이 왜 저렇지?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이번에 큰일을 하셨잖습니까. 꼭 만나 뵙고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어렵게 찾아왔습니다.”

조셉은 병색이 도는 얼굴을 손으로 쓱 문지른 뒤 사람 좋게 웃었지만 제이든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졌다.

-제이든, 저 사람 좀 이상해. 어쩐지 전에 봤을 때랑 달라.

아실리도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몸을 살짝 낮췄다.

제이든이 뒤쪽으로 조금 물러서면서 말했다.

“멀리까지 찾아오셨는데 죄송하지만 제가 많이 바쁩니다. 곧 먼 길을 떠나야 하거든요.”

“아, 그래요? 떠나기 전에 만나 뵐 수 있어 정말 다행이군요.”

조셉이 정말 다행이라는 듯 제이든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는데 눈이 기묘하게 번들거리는 게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제이든이 마을 쪽을 슬쩍 넘겨다 보았다. 공간이동 포탈을 마을 바깥쪽 숲속에 설치해 둔 터라 사람 왕래가 있는 곳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눈치가 빠르군요.”

조셉이 살짝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을 사람들 걱정은 하지 말아요. 사이좋게 함께 보내줄 테니.”

“당신, 누구지?”

제이든이 눈살을 찌푸린 채 묻자 조셉이 인사하듯 팔을 흔들었다.

“레옹 바레의 비서였던 조셉이지요. 어떤 마법사보다도 충만한 마나를 지녔지만 마법을 익힐 수 없어서 마법사들의 충전기 노릇이나 해야 했던. 마기를 이용하면 나도 위대한 마법사가 될 수 있었는데 그쪽 경로는 흑마법이라고 금지되었고.”

조셉의 원망 어린 눈이 웃음을 짓듯 휘었다.

“그래서 난 마르첼로의 종이 되었지. 어르신에게 받은 가면을 레옹 바레의 창고에 넣은 것도 나야. 마법사가 되는 데 정도가 어디 있어? 강해지는 데 수단 방법을 가려야 하나? 마도 세상이 열리면 우리 같은 사람이야말로 대마법사가 될 수 있었는데 네놈 때문에 다 망쳤어!”

갑자기 조셉의 기도가 바뀌었다.

금방 쓰러질 것처럼 병색이 완연했던 그의 몸에서 마기가 스물스물 흘러나왔다.

“애송이, 날 모르겠나?”

제이든이 경계의 태세로 아실리와 포이를 등 뒤로 보내면서 내뱉었다.

“당신, 그 흑마법사인가? 세르지오가 아니라도 몸을 쓸 수 있었나?”

조셉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다. 대마법사 마르첼로 아르카니오지. 이 몸의 주인은 원래 이 세상에 대해 한이 많아서 나를 따르게 된 아이지. 그래서 날 쉽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 혈족도 아니고 날 위해 준비 작업을 거친 그릇이 아니라서 동화가 좋진 않아. 잠깐 이 몸을 빌려 쓸 수 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몸에 부담이 되는지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지만.”

주변이 검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내 영혼은 조만간 몸을 잃고 또 저쪽 세상으로 끌려가겠지. 이제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영영 다시 빛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

조셉의 몸을 쓴 마르첼로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나의 충실한 종들이 대를 이어가며 수백 년을 애써서 겨우 이룬 대업인데, 너 같은 애송이가 망쳐 버리다니!”

그의 목소리에 귀기가 서렸다.

“어떻게 그 빚을 갚지 않고 떠날 수 있겠나?”

그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미소 지었다.

“이 몸이 형편없이 약하고 힘을 쓸 수 있는 시간도 잠깐뿐이지만, 너 하나 없애는 정도는 그걸로 충분해.”

춥고 어두운 기운이 주변에 가득했다. 제이든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주변을 채운 마기가 그의 몸에 스며드는지 몸이 욱신욱신 쑤셔왔다.

공간이동 포탈 쪽으로 달리려고 하는데 다리가 땅에 뿌리라도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징글징글하기도 하다!

아실리가 공간이동 포탈이 있는 숲 쪽을 향해 누군가를 부르기라도 하듯 소리높여 울었다.

“실리, 포이 데리고 먼저 가. 빨리!”

제이든은 자신의 앞으로 튀어나와 조셉의 몸을 입은 마르첼로에게 으르렁거리는 아실리를 잡아당겼다.

아실리는 움직일 수 있는 걸 보니 조셉의 몸을 입은 마르첼로의 힘은 제이든에게만 집중된 것 같았다.

아실리는 고개를 저으며 마르첼로를 향해 몸을 낮추고 으르렁거렸다.

“개도 아니고 고양이가 충성스럽군.”

마르첼로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곧 마기에 몸이 썩어들 것이다. 이 몸도 같이 썩겠지만 너 하나 정도는 데려갈 수 있겠지.”

조셉의 몸은 보는 사이에 시시각각으로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시퍼레진 얼굴은 이미 산 사람의 얼굴 같지 않았다.

쿨럭!

제이든이 기침을 했다. 호흡이 점점 힘들어졌다. 물속에 빠졌을 때처럼 목이 따가워지고 있었다.

그때 숲속에서 한 줄기 흰 바람이 불어온다 싶더니 흰 그림자가 제이든의 앞을 가로막듯 그들 사이에 섰다.

“이리로 올 것 같았지.”

흰 표범이 보랏빛 눈으로 마르첼로를 노려보았다.

“카티야 씨!”

제이든이 놀랍고 반가워서 부르짖었다.

카티야의 몸에서 하얀 아우라가 퍼져 나오기 시작하자 주위에 내려앉았던 검은 마기가 빠르게 걷혔다.

조셉의 몸을 입은 마르첼로가 분한 듯 이를 갈았지만 그 이후의 일은 생각보다 싱거웠다.

조셉의 몸을 입은 마르첼로는 생각보다 힘을 쓰지 못했다. 잠시밖에 빌려 쓸 수 없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의 몸은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마르첼로가 또 몸을 버리고 떠난 거겠지.

영혼이 떠나도 육신이 멀쩡하게 남았던 세르지오와는 달리 조셉의 몸은 마른 흙처럼 퍼석해지더니 가루가 되고 말았다.

-감당할 수 없는 혼을 몸에 받아들여서 그래.

아실리가 씁쓸하게 말했고 주변이 다시 밝아지고 마기의 흔적도 사라졌지만 누렇게 말라붙은 나무와 풀은 제 색을 찾지 못했다.

“카티야 씨,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나무 뒤로 잠깐 사라졌던 표범은 순식간에 은빛 머리의 미녀가 되어 나타났고 제이든은 반갑고 고마워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못 뵙고 떠나는 줄 알고 섭섭했는데.”

카티야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놈이 소멸되기 전에 꼭 너를 찾아올 것 같았거든. 글라키에나 님이 아실리와 의논해서 신수를 네 옆에 숨겨두기로 했는데 내가 자원했단다.”

“실리, 너 알고 있었어?”

제이든이 아실리에게 묻자 아실리가 앞발을 핥으며 대답했다.

-응. 근데 제이든에게 미리 알려주면 티가 나서 그놈이 알아차릴까 봐.

“그래도 알려주지, 놀랐잖아.”

-안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괜히 불안하게 만들까 봐.

카티야가 아실리를 살며시 내려다보았다.

“새로운 신수가 맡을 수도 있었지만 나도 오고 싶었어.”

“새로운 신수요?”

카티야의 눈길을 따라 제이든도 아실리에게 고개를 돌렸더니 아실리는 살짝 눈길을 피했다.

카티야가 제이든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너 몰랐구나. 네 고양이가 널 무척 사랑해서 신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했단다.”

“미야옹.”

아실리가 카티야를 향해 나무라듯이 울었고 카티야가 아실리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었다.

“왜? 제이든도 아는 게 좋지. 굳이 감출 필요가 있겠니?”

“실리, 신수가 될 기회를 포기했다는 게 무슨 말이야?”

제이든이 묻자 아실리는 난처한 듯 앞발로 코를 문질렀다.

-어차피 내 선택이니까 제이든은 몰라도 괜찮은데.

* * *

마계의 문이 닫히고 제이든이 정신을 잃고 잠에 빠진 후였다.

“아실리, 그동안 정말 잘해주었다. 네가 없었으면 누가 저 아이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었겠느냐.”

빙룡 글라키에나가 아실리에게 말했다.

거대한 용 앞에 선 작은 고양이는 위축되지 않은 채 우아하게 머리를 숙였고 빙룡의 옆에 자리했던 은룡 엘리미네온이 웃음을 머금었다.

“세시온도 널 자랑스러워할 거다. 그가 너에게 자신의 수명을 넘겨준 게 이렇게 큰 결과를 낳을지 누가 알았겠느냐.”

용 두 마리가 대견하다는 듯 아실리를 내려다보다가 글라키에나가 말했다.

“아실리 다미에르. 대개의 신수는 신수로 태어나거나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신수로 발전하거나 한다. 너는 아직 그렇게 충분한 세월을 살지는 않았지만 네가 이룬 공으로 보아 신수가 될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너를 신수로 승격시키고자 한다.”

은룡과 에우카, 카티야까지 모두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네가 신수로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다면 세시온의 보고를 지키는 데도 더 수월하겠지.”

빙룡은 작은 고양이를 향해 앞발을 내밀었다.

“우리는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나는 다하르의 빙벽 너머 나의 호수로 돌아갈 텐데, 혹시 소원이 있느냐?”

작은 고양이가 거대한 용을 올려다보면서 미야옹 맑은소리로 울었다.

-예, 이제 제이든이 차원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갈 텐데, 그때 혹시 저와 포이가 같이 갈 수 있을까요?

“흐음.”

용이 얼음처럼 빛나는 발톱으로 기다란 수염을 살짝 만졌다.

“그 아이가 이쪽 차원으로 넘어온 것은 운명의 부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쪽 차원 신수의 도움을 입었다. 중재가 가능하기는 하다만…….”

용은 검푸른 눈을 가늘게 떴다.

“아실리 다미에르. 너는 기나긴 세월 세시온 다미에르의 집과 유품을 지켰다. 그 모든 것을 두고 떠날 수 있겠느냐?”

-…….

“세시온은 너를 위해 자신의 수명의 절반을 바쳤다. 이번에 신수로 승격되면 너는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제이든 로스를 따라 차원을 넘어가면 그냥 평범한 고양이가 되어버릴 것이다. 세시온이 남겨준 수명마저 사라지고, 네가 제이든 로스와 함께 살 수 있는 수명이 몇 년일지, 어쩌면 몇 달일지 모른다. 그래도 좋으냐?”

아실리는 잠깐 생각했다.

영생을 버리고 제이든을 따라 차원을 넘을 가치가 있을까?

세시온과 함께한 집을 버리고, 그의 추억이 깃든 곳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괜찮을까?

한동안 머리를 숙이고 있던 고양이가 마침내 초록색 눈을 들어 빙룡의 얼굴로 향했다.

-괜찮습니다. 세시온의 추억을 뒤로하는 건 마음 아프지만, 저는 신수의 길을 포기하고 제이든의 옆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세시온이 떠난 후 아실리는 오랜 세월 세시온을 그리며 혼자 빈집을 지켰다.

사랑하는 주인이 남긴 추억과 물건들을 지키며 기나긴 세월을 보냈고, 그와 함께 알았던 사람들이나 친구였던 동물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이제 또 그런 날들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실리는 고개를 들고 분명하게 말했다.

-제이든과 함께 차원을 넘기 위해 제가 영생을 버려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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