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84화
47. 돌아가는 방법(2)
자리를 털고 일어난 후 제이든은 상당히 바빴다.
피니어스와 레노아, 올리버 로렌스 등 내막을 알고 있는 지인들이 줄줄이 찾아왔고, 그들과 인사를 나눈 후에는 황궁에 들었다.
황제에게 훈장과 선물은 물론 진심 어린 치하를 받았고, 마탑에 들러 마법사들과도 회의를 빙자한 질문 공세에 답변해야 했다.
마법사들이란 원래 호기심이 많은 종족이라 온갖 질문을 다 쏟아내는 바람에 차원 이동자임을 숨겨야 하는 제이든으로서는 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많아 땀을 뺐는데, 티베리우스는 그 마법사들보다 호기심이 더 많은 인간이었다.
티베리우스는 다리에 입은 부상이 가볍지 않아 빙룡의 광역 힐링이 아니었다면 다리를 잘라냈어야 했을 거라고 한다.
완치되려면 한동안 요양이 필요하다고 했는데도 치유사들의 말을 무시하고 절뚝거리면서 제이든과의 대담을 위해 찾아와서 황궁 치유사들의 진땀을 흘리게 했다.
꼬치꼬치 묻는 인터뷰 기술도 어찌나 좋은지, 제이든은 자칫하면 차원 이동자라는 사실을 털어놓을 뻔했다.
“저 사람 사관보다는 기자가 더 적성에 맞아. 아니, 추측성 기사는 절대 안 쓰고 확인된 사실만 쓴다는 걸 보면 역시 사관 쪽인가?”
겨우 티베리우스에게서 풀려난 제이든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런데 아실리, 이제 할 일이 모두 끝났는데도 내가 차원 이동자라는 걸 밝히면 안 되는 거야?”
제이든이 묻자 아실리가 뒷발로 일어나 앉은 채 앞발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엘리미네온 님에게 들었는데, 니콜레타처럼 먼저 알아보는 사람은 상관없지만 제이든이 먼저 차원 이동에 대해 입 밖에 내면 돌아가는 데 지장이 있을 수도 있대. 그러니까 조심하자.
그래, 금기가 금기인 데는 뭔가 다 이유가 있는 법이겠지.
금기 때문이 아니어도 니콜레타와 황제에게서 부탁을 받기도 했다. 사람들이 혼란에 빠질 수 있으니 차원 이동에 대해서는 말을 삼가 주면 좋겠다고.
“제이든, 정말 돌아갈 거니? 여기서 이렇게 이뤄놓은 게 많은데.”
니콜레타가 주름진 얼굴에 아쉬운 표정이 가득한 채 제이든의 손을 토닥거렸다.
“예. 저도 고민을 많이 했는데, 저쪽 세상에 제 몸이 있고 가족도 있거든요. 가지 않을 수는 없어요.”
“그럼 다시 돌아올 수는 있을까?”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빙룡께서도 돌아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고 하고 에트루리안의 서나 레칸도르의 금척을 써 봐도 제가 돌아오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어요.”
에트루리안의 서와 레칸도르의 금척을 사용해 몇 번이나 미래를 예지하는 환각을 경험하면서 제이든이 깨달은 것은 미래는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이든의 경우 그가 다른 길을 걸을 때마다 미래가 바뀌는 것을 예지할 수 있었다.
물론 그가 그 환각을 볼 수 없었다면 처음 정해진 운명의 길을 계속 걸어갔을 것이고 세상의 운명에 나비효과를 일으킬 수도 없었을 것이다.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데 그 길목의 어떤 모퉁이마다 수레바퀴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열쇠 같은 존재가 있는 것 같았다.
천 년 전 에트루리안이 그랬고 삼백 년 전 카이엔 대제가 그랬듯이, 이번 세대의 열쇠는 아마도 제이든이지 않았을까.
제이든은 고개를 돌려 갈등이 가득한 눈빛을 감췄다.
언제 끝낼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했던 네 개의 유물을 찾는 것을 끝내고, 처음엔 상상하지도 못했던 마계의 문을 닫는 대업까지 완수했다.
이제야말로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는데, 왜 이렇게 갈등이 되는 건지.
6년간의 카이엔 생활이 너무 길었고, 생각보다 더 이 세상에 정이 많이 들었다.
아룬빌 마을의 사람들이나 니콜레타며 레노아, 피니어스, 올리버 로렌스 등 정든 사람들도 많았고, 은룡 엘리미네온이나 에우카 등의 신수들, 그중에서도 카티야와는 인간 지인들 못지않은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감정사로서의 경력도 충실하게 쌓았으며 이대로 이 세상에 머문다면 부와 명성을 얻고 탄탄대로를 걸으며 일생을 평온하게 살 수 있을 터였다.
유물의 내력을 보는 것이 에너지 소모가 큰 일이긴 해도 매번 유물을 볼 때마다 의미가 있어 성취감도 적지 않았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제이든은 양탄자 위에서 깡충거리고 노는 포이와 그 옆에서 나른하게 몸을 쭉 뻗고 있는 아실리를 돌아보았다.
아실리와 포이와 함께 갈 수 없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고민을 했을 것이다.
만약 아실리와 포이를 데려갈 수 없다면, 정말 지구로 돌아가겠다고 단언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지구로 돌아가는 걸 포기했을까? 제이든은 스스로 확답할 자신이 없었다.
“실리, 같이 갈 수 있는 건 확실하지?”
제이든이 아실리에게 묻자 고양이는 살그머니 눈을 내리깔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을 이동해 왔을 때도 그랬지만, 돌아가는 것도 대중에게 발설하는 것은 금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아실리는 돌아가는 것에 대해 말할 때마다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어차피 아실리의 말을 알아들을 사람은 제이든밖에 없는데도.
“니콜레타 님, 제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니, 다른 사람들에겐 제가 동방 대륙으로 떠난 걸로 해주세요.”
“그래. 많이 서운하지만 너도 가족이 있으니 돌아가 봐야겠지. 부디 잘 지내고 혹시라도 차원을 넘어 연락할 수 있는 길이 생긴다면 꼭 안부를 전해다오.”
니콜레타의 골동품상을 나온 제이든은 아스토시엔 산의 숨겨진 계곡으로 돌아왔다.
여름내 하얗게 피었던 라벤더베리 꽃이 분분히 떨어지기 시작하는 계절이었다.
감정사 협회에 일신상의 이유로 더 이상 감정 의뢰를 받지 않는다는 공지를 하고, 개인 사서함으로 의뢰하는 의뢰자들에게도 같은 답변이 가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 외 이런저런 주변 정리를 모두 마친 제이든은 마지막으로 아룬빌 마을에 들렀다.
아룬빌 주민들은 제이든이 이 세상에 온 이후 가장 먼저 만난 사람들이고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이었다. 카이엔에서 제이든의 고향이라고 할 만한 마을이었고 제이든은 이 마을 사람들을 좋아했다.
“제가 동방 대륙에 가게 되었습니다. 몇 년 못 뵐 수도 있어요. 다들 건강하시고 잘 지내시기를 빕니다.”
“아유, 섭섭해서 어째요. 야옹이랑 토끼도 같이 가나요?”
“그럼요. 가족인데 같이 가야죠.”
정 많은 플로렌스 부인이 앞치마를 끌어올려 눈물을 찍더니 제이든이 좋아하는 빵과 아실리가 좋아하는 계란과자, 포이가 좋아하는 당근과자까지 봉지에 잔뜩 주워 담기 시작했다.
“잠깐만 기다리게, 나도 선물이 있어.”
“먼저 가버리면 안 되네. 내가 꼭 줄 게 있어.”
제프 노인과 딕 노인도 허둥지둥 제이든에게 줄 선물을 찾아왔다.
“아니 이 사람은 그렇게 먼 길을 떠날 거면 빨리 말해야지.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하면 선물도 제대로 준비 못하잖아.”
“언제 다시 오세요, 제이든 씨?”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빵집 플로렌스 부인이나 제프 노인, 딕 노인, 채소가게 메리앤 부인, 우편국의 미란다 등 그동안 정을 나눈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느라 부산스러운데 딕 노인이 제이든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자네를 찾는 사람이 있었는데.”
“예?”
“사흘 전인가, 은행원처럼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였어. 젊은데 예의가 바르더구먼. 장터에 와서 로스 감정사가 여기 살지 않느냐고 물어서 여기 살진 않지만 자주 들른다고 말해줬는데.”
“아, 그분 우편국에도 왔었어요. 제이든 로스 씨가 여기 사느냐고 물어서 저도 딕 아저씨처럼 말씀드렸는데요.”
딕 노인의 말을 들은 미란다가 생각이 났는지 말을 보탰다.
“의뢰인이시면 사서함을 쓰시거나 연락처를 남기시면 제이든 씨가 들르실 때 알려드리겠다고 했는데 알았다고만 하고 그냥 가셨어요.”
제이든이 2급 감정사가 된 후 점점 이름이 나면서 감정사 협회를 통해 제이든에게 의뢰하는 사람들 외에 사서함으로 직접 의뢰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중에는 우편을 통하지 않고 직접 만나서 의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작년 골동품 거울과 밤의 경매 사건 이후로 마법사들이나 감정사들, 문관국의 공무원들 사이에는 제이든이 아룬빌 마을 근교에 산다는 게 어느 정도 알려진 상태였다.
의뢰인이나 호기심 많은 마법사, 제자가 되겠다는 감정사 등 아룬빌 근처까지 찾아온 사람들이 종종 있었는데 제이든이 직접 만난 일은 없었다.
그가 계속 대륙을 떠돌기도 했고, 아룬빌 사람들도 제이든의 거주지를 모르기 때문에 가르쳐 줄 수도 없었고.
레이크빌이나 아룬빌로 제이든을 찾아온 사람들은 우편국에 연락처를 남기거나 제이든의 사서함에 메모를 남기고 가곤 했다.
이번에 온 사람은 평범하지만 단정하게 입은 신사였다는데 은행원이나 공무원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기자 같은 사람일 수도 있으려나?
어쨌든 의뢰인이나 제이든과 꼭 만나길 원하는 사람이었다면 우편국에 연락처를 남겼을 텐데 따로 이름이나 연락처를 남기지 않은 걸 보면 지인도 아니고 최근 조금씩 늘어난 무작위 방문객일 확률이 높아서 제이든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룬빌 주민들이 선물로 준 식품이며 기념품 등을 한 보따리 받아서 배낭에 집어넣은 제이든이 마을 외곽에 숨겨진 공간이동 포탈로 향했다.
“이제 인사할 사람은 다 했지. 정말 마지막이네.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먀아옹!”
“포잇!”
“마계의 문을 닫고 나서 내가 기절하는 바람에 용이나 신수들에게 인사를 못 했어. 티베리우스 씨는 내가 인류 최초로 용과 신수들의 절을 받은 사람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는데 정작 난 보지도 못했잖아.”
제이든은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카티야 씨한테는 꼭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그냥 북부로 가버리다니.”
-…….
아실리가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오물오물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왜 그래, 실리? 뭐 말하고 싶은 게 있어?”
-아니야앙.
말꼬리를 길게 빼면서 눈을 살짝 피하는 게 좀 수상했다.
“실리, 맘에 걸리는 거 있는 거 아니야?”
-아니래도.
제이든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아실리의 얼굴을 살폈다. 흠, 뭔가 시원치 않은데, 나한테 말 안 하는 게 있나?
그는 포이를 어깨에 태운 채 아실리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실리, 정말 나랑 같이 가도 괜찮겠어?”
-간다고 했잖아. 같이 갈 거야.
“포잉, 포잉!”
포이도 말을 알아들은 듯 제이든의 머리통을 꼭 껴안았다.
“포이, 눈 안 보여!”
눈을 가린 포이의 앞발을 밀어낸 제이든이 다시 일어섰다.
“그래, 같이 가야지. 나도 너희들 두고는 못 가.”
포이의 마음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포이는 아기토끼 때 제이든이 구조했고 그때부터 함께 지내왔으니 포이에게 제이든과 아실리 외의 다른 가족은 없다. 포이도 어딜 가든 제이든과 함께 가겠다는 의사를 강하게 표명하고.
하지만 아실리는?
제이든은 앞장서서 살랑살랑 걸어가는 아실리의 꼬리를 바라보았다.
아실리는 보통 고양이가 아니고, 세시온의 추억을 가슴 가득 지니고 있는 고양이인데. 게다가 백 년 가까이 카이엔에서만 살아온 고양이다. 제이든 마음대로 지구에 데려간다면 적응할 수 있을까?
카이엔 대륙을, 세시온의 집을 그리워하지는 않을까.
제이든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걸 알아차렸는지 아실리가 살짝 돌아보더니 제이든에게 걸어와 다리에 몸을 비볐다.
-걱정하지 마. 제이든이랑 같이 갈 거야. 나도 다른 세상 경험 한번 해보고 싶어.
초록색 눈을 반달처럼 접으며 웃는 아실리를 보자 제이든도 마음이 놓여서 마주 웃으며 아실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아, 우리 셋이 같이 가는 거야. 우리 누나랑 조카들 다 동물 좋아하니까 실리랑 포이 보면 엄청 기뻐할 거야.”
그전에 내 몸이 잘 깨어나야 하겠지만.
“제이든 로스 씨.”
그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돌아보니 낯익은 남자가 숲 어귀에 서 있었다.
“조셉 씨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