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83화
47. 돌아가는 방법(1)
흔치 않은 하늘색 머리의 남자는 침대 옆에 의자를 바짝 끌어다 놓고 앉았다. 좀 절뚝거리는 것이 다리가 불편해 보였는데 그런 건 아랑곳 없는지 새파란 눈이 총기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하늘색 머리는 카이엔 황가의 특징 아니었던가?
제이든이 의아해하는 동안 남자는 입술에 살짝 침을 바르더니 품속에서 깃털 펜과 수첩을 꺼냈다.
“저, 그럼, 로스 감정사님, 컨디션 괜찮으시면 조금만 말씀을…….”
그때 문이 달칵 열리더니 레노아가 들어왔다.
남자를 본 레노아가 눈살을 확 찌푸렸고 남자는 레노아를 보자마자 혼날 준비가 된 어린애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티베리우스 님, 제발! 언제 또 들어오셨어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레노아 양. 그냥 로스 감정사님과 잠깐만 이야기를 나누려고.”
“이틀을 잠들었다가 이제 겨우 깬 사람이에요. 누가 티베리우스 님을 들여놔 줬어요? 경비를 어떻게 선 거야!”
“아니, 아니, 경비 잘못이 아니에요. 내가 투명 망토를 썼어요. 레노아 양, 경비들 잘못이 아니에요.”
“아니 황가의 투명 망토를 이런 데다 쓰시고.”
레노아가 어이없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가 문을 가리켰다.
“어쨌든 이만 나가세요. 제이든 씨는 좀 더 휴식해야 해요.”
“하지만 레노아 양, 의사가 제이든 씨의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잖아요? 생생한 기록은 시간이 관건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희미해지고 왜곡이 생길 수도 있고.”
티베리우스라는 남자는 울상을 지으며 레노아에게 매달렸지만 레노아는 엄격한 얼굴로 문밖을 가리켰다.
“제이든 씨에게 여쭤보고 괜찮다고 하시면 나중에 이야기 나누실 시간을 드릴게요. 어서 나가세요.”
어린애처럼 입술을 내민 남자는 제이든을 향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럼 로스 감정사님, 나중에 뵙겠습니다. 시간이 지나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꼭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 아! 천년 고룡의 잠을 깨우고 최후의 피리를 불어 마계의 문을 봉인한 사나이와 제가 마주하고 있다니, 가슴이 너무 떨립니다. 이 세상 최초로 용과 신수들의 절을 받은 사나이! 그 어떤 마법사도 이루지 못했을 위대한 일을 마나 한 줌 없는 청년이 이루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카이엔 대륙 전체의 영웅담으로 길이길이 남을 것이며…….”
“나가세요!”
레노아가 티베리우스의 등을 밀어 밖으로 쫓아내고 문을 닫았다.
“미안해요. 제이든 씨. 쉬셔야 하는데 번잡스러웠지요?”
“아뇨, 괜찮은데, 저분 대체 누굽니까?”
제이든이 레노아에게 묻자 언제 깨었는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던 아실리가 얼른 끼어들었다.
-나 저 사람 본 기억이 나. 그때 동굴 속에서 제이든이 최후의 인장을 불고 있을 때 다리에서 피를 찍어 막 글을 쓰고 있었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레노아가 물을 한 잔 따라서 제이든에게 가져다주면서 말했다.
“음, 일단은 황궁의 사관(史官)입니다. 좀 독특한 분이시지요.”
티베리우스 지노 드 카이엔은 선황의 막내 황자였고 현 황제의 아우였다.
고귀한 태생답게 풍부한 마나를 가지고 태어났고 마법에도 상당한 소질이 있었으며 황자로서 익혀야 할 문무 학습의 성과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일찍부터 뜻을 둔 것은 뜻밖에도 사관의 길이었다.
“어릴 적부터 옛 기록을 읽고 새로운 기록을 쓰는 걸 좋아하셨다고 하더군요. 음, 떠도는 말로는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기록에 미쳤다고, 큼, 흠, 흠.”
레노아는 황족에 대해 좀 불경스러운 발언이라 느꼈는지 말하다 말고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황족치고는 굉장히 소탈한 분이셔서요. 소년 시절부터 마탑에 들락거리며 마법사들의 기록을 보여달라고 조르고, 치안국에 가서 사건 기록을 열람하기도 하고, 미제 사건이 있는 곳은 직접 취재도 가고 그러셨답니다.”
그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관으로 출사했다. 카이엔에서는 세 명의 사관을 두고 서로 교차 검증하여 기록의 오류가 없도록 엄격하게 관리하는데, 황족이 사관이 된 것은 티베리우스가 처음이라고 한다.
국가와 조정의 일만을 기록하는 다른 두 명의 사관과 달리 티베리우스는 본인의 생각에 기록으로 남길 만한 일이 있다면 어디든 찾아갔다.
이번에 레타논으로 마계의 문을 닫으러 가는 일행을 꾸릴 적에, 모두가 말렸지만 티베리우스는 불시의 사고를 당해 죽어도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유언장까지 써 놓고 종군했다.
본인이 꽤 수준 높은 마법사이기도 했고, 능력이 있는데도 황족이라 해서 위험한 일에 빠진다는 것은 오히려 불평등한 일이 아니냐, 황족으로서 오히려 모범을 보여야 하는 일이 아니냐고 비장하게 나선 바람에 황제조차 말리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제이든도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아수라장 속에서 찢어낸 옷자락에 제 피를 찍어서 미친 듯 글을 쓰고 있던 사람, 그 사람이 티베리우스였다.
“일생일대의 대사건을 목격했으니 어떻게든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마음뿐이었대요. 정말 기록에 미치……, 아니, 참된 사관이시기는 합니다.”
레노아의 말을 들으며 제이든도 감탄했다.
“그 정도 지위로 태어났으면 놀고먹을 법도 한데 사명감이 투철하시네요.”
말을 듣고 보니 제이든 기준에서는 사관이라기보다는 기자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나름대로 존경스러운 분인 건 맞는데, 좀 지나친 면이 있어서 말이죠.”
마계의 문이 봉인되고 제이든이 정신을 잃은 후, 빙룡과 니콜레타가 뭔가 대담을 나누었고 그 후 두 마리의 용과 신수들은 다하르 쪽으로 사라졌다.
용이 말하기를 제이든의 몸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동안 심력 소모가 극심했으니 푹 쉬게 해주라고 했다는데, 그 말대로 수도로 옮겨진 제이든은 이틀 동안 깨지 않고 잤다는 것이다.
“여긴 어딘가요?”
“조용히 쉬실 수 있도록 황궁에서 특별히 준비한 안가(安家)입니다. 그런데 저 양반이…….”
제이든에게 특별히 내준 안가는 황제의 별원이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가 이틀 내내 별원 주변을 맴돌며 호시탐탐 제이든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첫날은 겨우 참고, 오늘 아침에 한 번 숨어들어왔다가 쫓겨났는데 또 오셨네요. 경비들이 들여보내 주지 않으니까 투명 망토까지 쓰시고. 하, 황가의 보물창고에 있다던데 그건 또 어떻게 훔쳐내셨는지.”
레노아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걸 보면 티베리우스가 그렇게 비호감은 아닌 듯했다.
꼬르륵!
제이든의 배 속에서 소리가 났다.
꼬르륵, 꼬륵, 마치 화답하듯 아실리와 포이의 배 속에서도 소리가 났다.
제이든이 얼굴을 붉히자 레노아가 얼른 말했다.
“이틀이나 아무것도 못 드시고 주무셨으니까 시장하시죠? 치유사가 어제 영양을 공급한다는 환을 드시게 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진짜 식사를 하시는 것만 못하겠지요. 그리고.”
레노아가 아실리와 포이를 가리켰다.
“고양이랑 토끼 친구도 제이든 씨가 걱정이 돼서 그런지 뭘 안 먹고 제이든 씨 옆에만 붙어 있었어요. 배가 많이 고플 거예요. 토끼는 그래도 건초를 조금 먹었는데 고양이는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제이든이 놀라서 아실리와 포이를 보니 포이는 삐이삐이 울면서 얼른 밥 먹자는 듯 배를 만졌지만 아실리는 살짝 눈길을 피했다.
“실리, 내가 잔다고 너까지 밥을 안 먹으면 돼?”
아실리는 아니라는 듯 미야옹 울었다.
-그 고생을 하고 나니 입맛이 없었을 뿐이야.
입맛이 없긴. 제이든은 가슴이 뭉클해져서 아실리와 포이를 끌어안았다.
우리 미식가 고양이와 먹보 토끼가 내 걱정을 하느라고 밥을 안 먹었구나!
“식사를 준비해 드릴까요?”
“예. 부탁드립니다. 수고스럽겠지만 아실리와 포이 것도 함께 부탁드려요.”
“물론입니다. 식당으로 가시기 번거로우실 테니 침실로 가져다드릴게요.”
이틀 만에 식사를 하는 제이든을 위해 수프와 부드러운 음식 위주의 상이 들어왔고 아실리와 포이에게는 고양이와 토끼가 좋아할 만한 먹이가 잔뜩 들어왔다.
식사 전에 치유사와 의사가 먼저 들어오더니 제이든의 건강 상태를 확인했다.
“건강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합니다. 기분은 어떠십니까?”
“아주 좋습니다. 피곤이 다 풀린 것처럼 개운해요.”
제이든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게 확인되어 마음이 놓이는지 아실리와 포이도 기분 좋게 식사를 했다.
-나 이렇게 맛있는 생선구이 처음 먹어 봐.
“포잉, 포잉!”
제이든이 먹은 수프와 죽도 굉장히 맛있었다. 후식으로 나온 과일과 과자도 어찌나 정교하게 다듬었는지 황궁 요리사가 심혈을 기울인 게 보이는 듯했다.
“제이든, 좀 어떠니?”
“니콜레타 님.”
니콜레타는 허리를 콩콩 두드리며 제이든의 옆에 앉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니콜레타 님이야말로 좀 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니라 니콜레타의 머리카락이 전보다 훨씬 희어진 데다 얼굴도 파리했다. 주름도 더 깊어진 듯했다.
“안 죽은 게 어디냐. 이번에 사실 목숨을 건지지 못할 각오를 했는데 생각보다 피해가 적었던 게 다 네 덕분이다.”
니콜레타는 찻잔에 차를 따르고 앉아서 제이든이 잠든 동안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망자가 있었던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중상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용이 안개를 쏘여 준 덕분에 많이 회복되어서 생각보다 피해가 적었다고 했다.
두 마리의 용과 신수들이 떠난 후에는 마법사들이 뒷정리를 했고, 백성들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단 대중 상대로는 상황을 공표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알 사람은 다 알겠지만.
“널 문병하겠다는 사람이 황성을 한 바퀴 돌 만큼 많았지만 일단 네가 스스로 의사를 밝힐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단다. 올리버 로렌스나 피니어스 등 지인은 물론 심지어 황제 폐하도 기다리고 계시는데 티베리우스 그 인간은 못 참고 숨어들었지만.”
“그, 세르지오 아르카니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이든이 묻자 니콜레타는 한숨을 쉬었다. 나이가 들었어도 항상 명랑하고 활기차던 얼굴에 한순간 세월이 내려앉았다.
“어리석은 녀석이야. 오로지 마법만 생각했던 녀석이 그렇게 어리석게 이용을 당할 줄은. 스스로 몸을 바쳤으니 영혼을 되살릴 길이 없었어.”
그녀는 탄식했다.
“내가 그 애를 잘못 가르쳤어.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제이든이 살며시 그녀의 주름진 손등을 두드렸다.
“제가 마법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아마 그 노인이 사용한 가면의 힘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뇌에 특화된 가면이라면서요. 세르지오는 그 흑마법사의 직계 혈족이라니까 더 강하게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요.”
니콜레타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아무튼 그 대마법사의 영혼이 육신을 버리고 도망친 게 꺼림칙하지만, 육신이 없는 혼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겠니. 마법사들이 수색은 하고 있다만 조만간 소멸되겠지.”
니콜레타의 말을 듣고 있던 제이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제가 기절한 후 빙룡과 대담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제가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빙룡이 말해주지 않았습니까?”
“아, 그거라면.”
니콜레타가 제이든의 옆에 있는 아실리를 향해 눈짓했다.
“빙룡께서 차원을 넘을 수 있는 열쇠는 이미 네 손에 있고,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네 고양이에게 알려주었다고 하시더구나.”